23.05.15 13:53최종 업데이트 23.05.17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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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관 '봉선화'의 집에서 니시자키 마사오가 열띤 설명을 하고 있다. ⓒ 민병래

 
니시자키 마사오는 메이지(明治) 대학 영어과 4학년 때인 1982년 '관동 조선인 대학살의 진상'을 접한 이래, 지금까지 학살 현장이었던 아라카와(荒川) 강변을 지키며 살아왔다. '조선인 추도비'를 세우는 데 온 힘을 쏟겠다고 중학교 교사직까지 그만두고 추도비가 세워진 다음에는 극우단체의 공격이 있을까 봐 비 옆에서 7~8년을 먹고 자고 했다.

그러다 보니 자기 몸을 돌보지 못해 지병인 녹내장에 백내장이 더해지고 한 때는 심근경색까지 앓았으니 그의 삶은 정녕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니시자키 마사오에게 선배인 스에나가의 권고는 운명이 되어버렸다. 그는 도쿄도 에도가와(江戸川) 구에서 구의원을 했던 다카노 히데오(高野秀夫)의 비서였는데 '관동대지진 때 학살당한 조선인 유골을 발굴하여 위령하는 모임'이 만들어지고 있으니 참여해 보라고 했다.

뜬금없었지만 이를 주도하는 기누타 유키에(絹田幸惠)의 호소에 니시자키는 마음을 빼앗겼다. 1950년 오카야마대학 교육학부를 나온 기누타는 도쿄 아타치(足立)구의 한 소학교에 재직할 때 학생으로부터 인공 하천인 아라카와의 유래에 대해 질문을 받는다. 그는 마을 노인을 찾아다니며 이모저모 강의 역사를 조사하다 한 노인의 중요한 증언을 듣는다.

"옛요쓰기바시(四ツ木) 다리 아래 아라카와 강가에서 열 명씩 조선인을 묶어 늘어놓고 군대가 기관총으로 쏴 죽였어요. 다리 아래에 세 군데 정도 큰 구덩이를 파서 묻었어요. 참혹한 짓을 했지요."

기누타에게 "죽은 조선인의 뼈가 그대로 묻혀 있으니 독경이라도 해줘야 하지 않을까"하는 노인의 말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기누타는 "유골이라도 추려 조선인 영령을 위로하고 싶다"고 언론사와 부근 사찰에 호소했지만 차가운 반응뿐이었다. 그때 기누타는 다카노를 만났고 네 차례나 구의원을 했던 그의 힘으로 시민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백여 명 이상이 모였다.

니시자키 마사오가 1982년 5월 추도 모임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받았을 무렵 그는 메이지대학에서 '조선어 자주강좌'를 듣고 있었다. 조선어가 정식학과로 만들어져 있지 않아 뜻맞는 학생들이 학교 밖에서 강사를 모셔와 공부했다.

'가갸거겨'부터 배우는 걸음마 모임이었는데 뜻밖에 조선인이 많았다. 그는 조선인이 자기 말을 모른다는 사실에 많이 놀랐다. 그것이 조선어 말살 정책 때문이고 패전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은 차별 정책 때문임을 알고 그는 민족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때 강덕상은 메이지대학에서 강사로 동아시아사와 조일 관계사 강의를 했다. 니시자키는 강덕상의 수업에서 '조일수호조규'가 일본이 조선에 '영사재판권', '무관세 무역' 같은 조항을 강요한 불평등 조약임을 알았다. 또 청일전쟁 승리 후 일본이 갑오 농민군을 짓밟고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발판을 마련한 사실을 알았다.

일본에서 가르치지 않는 일본의 역사였다. 강의실 분위기는 뜨거웠다. 니시자키는 강덕상의 강의는 빼먹지 않았다. 추도 모임 가입을 제안을 받은 건 바로 이때였다.

니시자키 마사오의 고향은 도쿄 아다치구의 니시아라이. 그는 아다치구립 제10중학교를 다닐 때 아라카와 둔치에서 즐겨 공을 찼다. 봄에는 강물 위에 벚꽃잎이 그득하고 가을에는 저녁 노을이 강물을 단풍색으로 물들이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런데 자기가 뛰놀던 이곳에서 60여 년 전이기는 하나 끔찍한 살인이 있었고 그 시체가 기름에 태워져 아무렇게나 묻혀 있다는 얘기에 충격을 받았다. 안 그래도 민족 차별과 일본의 침략 범죄에 눈뜨고 있던 니시자키 마사오는 추도 모임에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니시자키는 증언 수집반에서 뛰고 싶었으나 노인들에게 직접 경험을 듣는 이 활동은 인기가 높아 그에게 차례가 돌아오지 않았다. 니시자키는 1983년까지 문헌반에서 활동했다. 당시 문헌반은 릿쿄(立敎) 대학 야마다 쇼지(山田昭次) 교수의 연구실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지도를 받았다. 야마다는 그때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옭아 매인 서승, 서준식을 돕는 활동을 하고 있었다.

유골 발굴의 첫 삽을 뜨다

기누타의 제안으로 시작된 추도 모임은 1982년 7월 18일 준비회를 결성하고 발굴 준비, 증언 수집, 문헌반 등으로 짜임새를 갖췄다. 무엇보다 발굴 작업에 팔을 걷어붙였다.

추도 모임은 아라카와가 국가 하천이기에 주무 부처인 건설성에 발굴 허가를 내달라고 요청했다. 유골이 나오면 파장이 클 텐데 과연 허가를 내줄까 긴가민가하면서 낸 신청이었다. 예비교섭 때는 고개를 저었는데 8월 초순 분위기가 바뀌었고 19일 오나기가와(小名木川) 출장소에 '하천부지 사용원'을 제출하니 다음 날인 20일 허가가 떨어졌다. 태풍이 오는 때니 사흘 동안 세 곳만 파고 그날 판 곳은 그날 메우라는 조건이었다. 태풍 때문에 강물이 불어날 수 있어 안전에 무척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1982년 9월 유골 발굴 현장과 파낸 곳. 9월 2,3,7일에 발굴했다. ⓒ 민병래

 
준비회는 학살로부터 59년이 지난 1982년 9월 1일 아라카와 강가에서 첫 위령제를 열었다. 다음 날인 2일부터 발굴이 시작되었다. 발굴 과정은 야마다 쇼지의 소개로 참여한 릿쿄 대학 고고학과의 오카모토 이사무(岡本勇)가 이끌었다.

가장 중요한 게 어느 지점을 팔 거냐였다. 네 명의 주요 증언자 중 세 명은 제방 밑을 가리켰으나 콘크리트로 덮여 있어 자칫 강둑이 무너질 수 있기에 이는 시도할 수 없었다. 나머지 한 명인 이이(井伊:가명)는 군대의 명령을 받고 시체를 묻기 위해 직접 땅을 판 사람이었다. 당시 있었던 전당포 창고가 남아있어 표지 노릇도 하기에 그가 가리키는 지점을 택했다. 기네가와 다리에서 하류 쪽으로 100m 정도, 둑에서 강쪽으로 18m 떨어진 아라카와 남쪽 강가의 한 곳이었다.

얼마나 깊이 팔까도 어려운 문제였다. 둔치는 산책로나 제방 안전을 위해 여러 차례 흙더미가 얹혀 높이가 계속 올라갔다. 1923년 당시의 높이를 알아야 했다. 일단 3.5m를 파기로 했다.

9월 2일 아침 7시 30분부터 굴착기가 움직였다. 9시경이 되었을 때 8*4m 넓이의 구덩이를 3m 넘게 파들어 갔다. 매스컴을 탄 탓인가 이른 아침부터 방송국 카메라, 사진작가, 다큐멘터리 감독, 마을 주민이 몰려들어 북적거렸다.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조인승도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발굴 전부터 추도 모임에 전화를 했고 뼈가 나오면 알려드릴테니 집에 계시라 권했는데도 첫날부터 자리를 지켰다. 구멍이 깊어가니 흙 바가지가 미치지 못해 회원들이 내려가 삽집을 했다. 매일 되메워야 하는 조건, 시간과 싸워야 했다.

물론 스물두 살의 니시자키도 웃통을 벗고 뛰어들었다. 9월 2일 늦더위는 오전부터 매서웠다. 한길 넘게 판 땅 밑에는 바람이 불지 않는 데다가 바닥에서는 강물이 솟아 올라왔다. 회원들은 땀투성이가 되어 9개 반으로 나눈 35명의 회원이 15분마다 교대했다. 물기 많은 흙벽이 허물어질까 조심스러웠지만 파고 또 팠다. 도자기, 술병, 곰방대가 나왔으나 좀체 뼈는 나오지 않았다. 구덩이 밑바닥에선 물이 솟구치듯 올라와 다음날 다른 곳을 파기로 하고 3시쯤에 되메우기에 들어갔다.

아침부터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불볕더위에도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키며 삽질하던 회원들이 나올 때마다 질문을 하거나 증언을 했다.

"뼈는 나왔는가?" "여기가 아니라 둑 안을 파야 돼" "3m 깊이로는 안돼."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좋은 일이다" "사실은 나도 봤네." "긴시쵸우(錦絲町)에서 피난 가던 길에 조선인 소동이 있어서 조선인을 둘러싸고 철봉과 통나무로 때려죽였어."

격려금을 보내오는 사람도 많았다. 니시자키는 문헌반이지만 추도 모임의 막내 격이어서 흙도 파고 현장에 온 증언자의 연락처도 적고, 전화 응대도 하면서 분주했다. 개중에는 격려도 있었지만 협박도 있었다. 어떤 전화에서는 남자 노인이 "너 조선 사람이야? 라고 물어 "일본 사람이다"라고 답하니 " 왜 일본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을 하느냐"고 나무랐다.

둘째 날은 태풍이 다가오면서 아침부터 날씨가 흐렸다. 첫날 발굴 지점에서 강쪽을 보고 왼쪽으로 팔 지점을 골랐다. 그런데 3.5m를 넘게 팠을 때 비닐이나 나일론 양말 같은 게 나왔다. 이는 전쟁 이후에 나온 소재이니 4m를 넘게 파야한다는 말이었다.

이날도 흙 바가지가 원하는 깊이에 다다르지 못해 회원들이 내려갔다. 깊이 팔수록 흙벽이 계속 무너져 내렸고 양동이로 물을 퍼내도 강물은 바닥에서 계속 솟구치듯 올라왔다. 합판을 바닥에 칸칸이 대고 작업을 이어 나갔지만 2시부터는 비까지 내렸다. 다음 발굴은 태풍이 물러간 다음에 하기로 하고 소득 없이 철수했다.

9월 7일 다시 작업을 했다. 첫 번째 발굴 지점에서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떨어진 곳을 겨냥했고 2~3일에 썼던 굴착기보다 큰 것을 동원해 5.5m를 목표로 파갔다. 깊이가 깊어질수록 위험했다. 자칫 흙벽이 무너지면 회원이 흙더미에 깔릴 수 있기 때문이다.

5.2m를 팠을 때야 비로소 1923년 당시 지표층에 이른 것 같았으나 뼈는 발견하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되메우기에 들어갔다. 기누타 유키에를 비롯해 회원 모두는 실망감이 컸다. 니시자키도 간절한 마음으로 유골이 나오길 바랐지만 뜻이 이뤄지지 않아 속을 끓였다. 그는 발굴 현장을 찾아온 조선 학교 학생들의 간절한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꼭 발굴해 주세요"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3일에 걸친 발굴이 실패하고 추도 모임은 고민이 깊었다. 건설성에선 2차 허가를 내줄 리 없을 것 같았다. 막내 격인 니시자키는 모임을 이끄는 30~40대 회원들이 심각하게 논의하는 걸 묵묵히 지켜봤다.
  

경관이 유족의 접근을 막고 시체를 빼돌렸다는 1923년 11월 14일 <호지 신문> 기사 ⓒ 민병래

 
다행이랄까? 발굴 작업이 성과를 거두지 못한 중요한 이유 한 가지가 밝혀졌다. 60년이 지나 장소를 제대로 짚지 못했을 수도 있고 여러 사람이 지목한 제방 밑을 파보지 못한 점도 있겠지만 경찰이 지진을 수습하면서 은폐 작업을 했던 게 신문 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바로 니시자키의 문헌반이 1983년 발굴한 <호지 신문>과 <국민 신문>의 기사였다. 이 기사를 토대로 야마다 쇼지는 그의 책 <민중의 책임>에서 경찰이 시체를 감추고 빼돌린 과정을 소상히 정리했다.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의 관헌은 계엄령을 틈타 조선인만이 아니라 눈엣가시였던 저항 세력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9월 4일 밤부터 5일 새벽에 가메이도 경찰서에서 나라시노 기병 연대의 병사들이 사회주의자인 노동운동가 10여 명을 참살한 것이다. 이때 혼란 상태에서 일본인 자경단원 4명도 함께 살해당했다. 자경단원과 노동운동가의 유족은 항의했고 10월 10일이 되어서야 계엄당국은 살해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정당한 법집행이라고 주장했다.

10월 14일 가메이도 경찰서에서 유족 3명과 변호사 후세 다쯔지(布施辰治)가 고모라(小森) 서장에게 유골만이라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고모라는 조선인 사체 등 100여 구를 함께 화장해 묻어서 누구의 유골인지 알 수 없다며 이를 거부했다. 유족은 자기들의 힘으로 11월 13일부터 수습에 나서겠다고 경찰에 알리고 현장에 함께 있어줄 것을 요청했다.

이날 오전 유족 후세 다쯔지 난카쓰 노동회 회원 그리고 조선인 정연규가 요쓰기바시 다리 근처에 도착하자 헌병과 정복 차림의 데라지마 경찰 스무 명 그리고 사복경찰이 일행을 막아섰다. 경찰은 유족의 유골 수습을 막은 것 뿐만이 아니라 11월 13일 이전에 1차로 뼈를 빼돌렸고 11월 14일 오후에 경찰 19명을 인부로 꾸며 세 트럭분의 유골을 파내 어디론가 가져갔다.
 
경찰의 이같은 은폐 행위 때문에 유골 발굴이 어려웠던 것이다. 1983년에 발견한 이 자료를 전후로 추도 모임은 유골 발굴보다는 증언과 자료를 충실히 모으는 것으로 방향을 조정한다.

증언을 들으러 한국에 오다

추도 모임은 1983년 들어 한국 방문 조사를 결정한다. 가해자 측에서 나온 목격담은 일본에서 많이 들었지만 피해자 측의 증언은 조인승, 신창범 등이 극적으로 살아남아 들려준 이야기 외에는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한국에 가 학살을 보고 경험했던 사람의 말을 직접 듣고 자료를 모으고 싶었다.

마침 1982년에는 교과서 문제가 불거졌다. 일본 문부성이 출판사에 일본의 '침략'을 '진출'로, '탄압'을 '진압'으로 기술하도록 지시한 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때 한국의 언론이 일본의 침략 범죄를 크게 다루면서 관동대학살을 경험한 여러 사람의 증언도 소개했던 터라 이들을 직접 만나고 싶었다.

1983년 8월 26일 니시자키 마사오는 시모지마 테쓰로(下嵨哲郎)와 함께 김포공항에 내렸다. 숙소는 종로구 운당여관의 홍실. 회원들이 조금씩 비행기표 값과 경비를 모아준 덕분이었다. 1차 한국 조사의 안내나 인터뷰 연결은 민속학자 심우성의 도움을 받았다.

니시자키는 한국에서 함석헌, '반달' 할아버지 윤극영, 1923년 당시 이재동포위문반으로 피해 조사를 한 최승만, 교육자 이성구 등을 만났다. 1차 조사는 9월 7일까지 이어졌는데 직접 경험한 사람의 얘기는 생생하고 현장에 있는 느낌을 주었다. 먼저 이성구의 증언이다. 
 

도쿄 YMCA 앞에 모인 한국 청년들.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최승만이다. ⓒ 1923역사관 제공


"나는 1920년에 도쿄에 가 제지공장의 공원도 하고 신문배달도 했다. 생활비는 벌었으나 공부할 시간을 낼 수 없었다. 인삼 행상을 하고서야 동경물리학교(현 동경이과대)에 들어갔다. 지진이 난 다음 날 이웃 사람이 '조선인을 헐뜯고 있으니 밖에 나가지 말라'고 했으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리로 나섰다. 가는 도중에 길을 물었는데 누군가 '조선인이다'라고 외쳤고 오츠카(大塚)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경찰서에서 너무 맞아 허리가 아파 계단 한 개도 오를 수 없었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풀려났다. 집으로 가려고 다시 길을 물었는데 '조선인이 간다'는 소리에 청년들에게 잡혀 파출소로 갔다. 청년들과 경찰관은 나를 흠씬 팼고 오츠카 경찰서에서 받은 감기약을 보더니 독약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내가 이를 먹어보이자 그제야 내보내줬다. 조선에서는 물리나 수학을 배울 수 없어 졸업하는 1926년까지 일본에 있었다. 인삼을 팔러 나가면 우물에 독을 넣고 나쁜 짓을 했으니 필요없다고도 하고 미안하다며 사주기도 했다. 조선에 와서 학교 선생이 되었는데 뒤에서 학생이 뛰어오거나 소리가 들리면 자경단에 쫓기던 기억 때문에 몸이 굳어진다."


- 2편(https://omn.kr/23wnm)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1) 아라카와 방수로 공사는 1910년 대홍수 이래 1911~1930년까지 시행되었는데 이와부치 수문에서 도쿄만에 이르는 길이 22km의 큰 공사였다. 당시 조선인 노무자는 대부분 합숙소 생활을 했고 부근 가메이도 남쪽의 오지마(大島) 부근에는 중소기업이 많이 있어 조선인 직공이 적잖이 일했던 터였다. <독립신문>에는 아라카와 부근과 구역 내에서 약 120여 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 건설성은 현재 국토교통성이라 부른다.

3) 유골을 은폐하는 과정은 <민중의 책임> 205쪽에 나오는데 여기서는 짧게 재구성했다.

4) 후세 다쯔지는 일본의 진보 성향의 변호사다. 한국의 독립운동과 한국인의 인권을 위해 투쟁한 일본의 인권변호사. 1919년 2·8 독립선언으로 인해 체포된 조선 유학생들의 변론을 시작으로, 제1·2차 조선공산당 사건, 한신[阪神] 교육투쟁사건 등 광복 전후 재일본 한국인과 관련된 사건의 변론을 도맡았으며, 1946년에 <조선건국 헌법초안>을 저술했다. 진재동포위문반이 만들어졌을 때도 고문 변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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