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한일 정상 공동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3.5.7
연합뉴스
원폭 투하로 인한 일본인들의 희생에 대해 한국인들 역시 당연히 연민의 마음을 가져야 하지만, 일본 정부나 극우세력이 이 문제를 전략적으로 활용해 왔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 문제에 접근할 때는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 정부는 원폭 문제를 전범국가 이미지를 희석하는 데도 활용했다. 일종의 피해자 코스프레에 이 문제가 이용된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총리는 박정희 정권의 굴욕외교에 힘입어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및 부속협정을 체결하는 외교적 성과를 거뒀다. 뒤이어 그는 석 달 뒤인 9월 21일 제9차 국제원자력기구(IAEA) 총회를 도쿄에서 개최하는 성과도 거뒀다.
이 일은 IAEA 총회가 본부가 있는 오스트리아 빈을 벗어나 제3국에서 개최된 최초 사례였다. 사토 총리는 이것이 갖는 의미를 일본의 피해자 이미지와 적극적으로 연결했다. 그달 28일 자 <조선일보> 기사 '원폭의 피해국 일본서 열리는 원자력기구 제9차 총회'는 "좌등 일본 수상은 광도(広島)에 인류 최초의 원폭이 떨어진 지 20년 만에 일본에서 처음으로 이 모임을 갖게 된 데 대한 의의를 강조하여 박수갈채를 받았다"라고 보도했다.
일본이 원폭 피해를 활용해 이미지 세탁을 기도한다는 점은 한국인들의 눈에 자주 비쳐졌다. 1998년 2월 5일 자 <조선일보> '일본의 평화 만들기'는 "일본은 빅이벤트 때마다 평화를 앞세웠다"라며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과 관련해 "당시 일본은 원폭 피해가 남아 있는 공원 이름을 '평화'로 붙이는 등 대대적인 평화 캠페인을 벌였다"고 한 뒤 "원폭 피해국 일본을 적극적으로 부각시켰다"라고 말한다. 원폭 피해를 활용한 일본의 평화 만들기가 '세계평화 만들기'가 아니라 '평화 이미지 만들기'였다는 점이 한국인들의 눈에 자주 포착됐던 것이다.
일본은 자국의 전쟁범죄로 세계 인류가 고통을 당한 사실을 외면한 채, 자국의 이미지를 원폭 피해국, 전쟁 피해국으로 만드는 데 주력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일본 총리의 원폭 피해자 참배는 희생자에 대한 추모의 마음도 당연히 담은 것이지만, 동시에 전범국 이미지를 희석하려는 기획과도 무관치 않음을 알 수 있다.
한국 대통령이 일본 총리와 함께 참배할 때는 그런 효과가 더욱 배가될 수 있다. 중국과 더불어 일본 군국주의의 최대 피해국인 한국의 대통령이 일본 총리와 함께 원폭 피해자를 참배하면 일본의 가해국 이미지가 더 옅어지게 될 수 있다.
대통령실은 이번 공동 참배를 강제징용에 대한 일본의 성의 표시 혹은 윤 정권의 외교적 성과를 부각하는 기회로 삼으려는 듯이 보이지만 일본 입장에서는 이를 전범 이미지를 더욱 희석하고 평화 이미지를 한층 부각하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다. 기시다 총리가 윤 대통령보다 훨씬 '큰 그림'을 그리면서 한국인 위령비 앞에서 눈을 감게 되리라고 전망할 수 있다.
지금 기시다 총리에게는 평화 국가 이미지가 매우 절실하다. 작년 12월 16일 안보 문서를 개정해 적극적인 대외군사전략을 표방한 그는 헌법 개정을 통해 군사적 운신 폭을 확장하려 한다. 아베 신조 피격 이후 크게 추락한 지지율을 한국 대통령의 '협조' 덕분에 대폭 끌어올린 그는 이 여세를 몰아 개헌 추진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 3일 자 <산케이신문> 인터뷰에서도 개헌 필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전쟁 도발을 억제하는 현행 헌법을 바꾸고 일본을 공격적인 나라로 만들려면, 무엇보다 국제적 견제를 약화시킬 필요성이 절실하다. 그러려면 전범국가 이미지를 하루빨리 털어내야 한다. 윤 대통령과의 공동 참배는 이런 전략에도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윤 대통령이 한국인 위령비를 참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기시다 총리의 '큰 그림'에 휘말려 들지 말아야 할 이유다.
정작 원폭 피해자 문제 해결은 외면
원폭 피해자 문제는 그동안 한·일 양국 대중의 투쟁에 힘입어 상당히 많이 개선돼 있다. 하지만 갈 길은 여전히 멀다. 일본 정부는 피해자들에게 시혜적 조치를 베풀 뿐, 국가배상책임에 입각해 책임을 지지는 않는다. 또 한국인 피해자에 대해서는 시효가 경과했다거나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다 해결됐다는 주장도 펴고 있다.
일본은 피폭자 2세들의 피해도 외면하고 있다. 작년 12월 12일 나가사키지방재판소는 피폭으로 인한 유전적 영향이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피폭자 자녀 28명의 의료비 청구를 기각했다. 보통 사람들이 그런 인과관계를 입증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일본은 피폭자 2세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방법으로 책임을 기피하고 있다.
한국인 피폭자와 2세들은 일본인들보다 훨씬 더한 불이익과 차별을 겪었다. 위의 정용하 논문은 "일본의 한국인 피폭자에 대한 정책은 일본인 피폭자 지원과는 달리 외면, 거부, 차별의 역사였다"고 애석해 한다.
한국인 원폭 피해자 위령비를 참배하게 될 윤석열 대통령이 특히 신경 써야 할 것은 그런 과제들이다. 굴욕외교를 가리기 위한 수단으로 위령비 참배를 활용했다가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큰 그림'에 휘말리는 실책을 또다시 범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