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가 주최한 서울퀴어퍼레이드가 16일 서울광장 일대에서 열렸다. 오프라인에서 서울퀴어퍼레이드가 진행된 건 코로나19 이후 3년 만이다. 2022.7.16
소중한
종종 들르는 포털 사이트 메인에 서울퀴어문화축제에 관한 뉴스가 걸렸다.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지난 3일 서울시는 서울퀴어문화축제의 서울광장 사용을 불허했다. 2015년 이래로 코로나 때를 제외하곤 매년 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축제는 열려왔다. 그렇기에 아마 어떤 사람들은 이 소식에 충격을 받았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서울퀴어문화축제의 개최는 늘 순탄치가 않았다. 분노는 해도 크게 놀라지는 않은 이유다.
축제가 처음 서울광장으로 갔던 해에도 광장을 사용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그해 서울시는 중복신청을 이유로 서울퀴어문화축제의 광장 사용 신청 접수조차 받지 않았는데, 사전에 예약되었다는 행사가 홈페이지에 공지조차 되어있지 않아 논란이 있었다.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요건을 갖추어 광장 사용 신청을 해도 서울시는 매해 '국민 정서' 등의 모호한 이유로 서울퀴어퍼레이드를 '열린광장운영시민위원회'의 안건으로 회부했다. 위원회의 결과가 나오기까지 축제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늘 살얼음판을 걷는 경험을 했다.
그러다 보니 축제를 둘러싼 이야기들은 마치 씨름판에서 두 선수가 샅바 싸움을 하는 것과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축제의 조직위와 참가자 이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한쪽에 있다면 반대편에는 축제를 반대하고 방해하는 개신교계 혐오 집단과 이들의 눈치를 살피는 서울시가 있을 것이다.
물론 서울퀴어퍼레이드 현장을 찾아 당일의 분위기를 기록하고 조직위와의 인터뷰를 통해 행사의 의의를 남기는 언론인들도 많다. 늘 감사한 마음이다. 하지만 서울퀴어문화축제 개최의 난항과 혐오집단의 반대 집회 소식이 뉴스를 덮을 때면 다소 씁쓸한 불안감이 든다. 만약 사람들이 서울퀴어문화축제를 그 모습으로만 기억하는 건 아닐지. 축제가 어떤 행사인지 잘 알지 못한 채 매해 개최 장소 선정을 놓고 투쟁을 벌이는 모습만 기억하는 건 아닐지 말이다.
성소수자인 내가 서울로 온 이유
결국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서울퀴어문화축제에 대한 몇 가지 기억을 남기고자 한다.
2008년 꽃샘추위가 한창이던 3월에 나는 서울에 도착했다. 바라던 대로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했고 태어나 계속 살아온 부산을 떠났다. 서울이 아닌 지역에 사는 많은 성소수자들이 스무 살이 되면 살던 곳을 떠나 서울로 향하곤 한다. 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이 가족에게 원치 않게 드러나고 이로인해 집을 잃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가능한 한 빨리 독립하여 새로운 터전을 개척하는 것이 목표가 된다.
운이 좋은 경우 대학이라는 좋은 명분을 가질 수도 있다. 경제적인 여유만 된다면 서울로 공부를 하러 가겠다는데 자식을 막아설 부모는 많지 않다. 그렇게 비슷한 이유로 서울로 흘러든 성소수자들은 이곳에서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만들기도 했다. 성소수자에게 서울이 매력적인 도시인 이유 중 하나다.
연고가 없는 도시에서 완벽한 익명성과 새로운 삶의 터전(그게 비록 고시원 방 한 칸일지라도)을 얻었지만 그럼에도 동성애자로서 자유롭게 살아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폐쇄성이 몸에 습관처럼 새겨졌다.
이유는 이렇다. 일상의 동선이 학교와 학원으로 압축되는 중고등학생에게 살아가는 공동체는 극히 좁았다. 소문이 퍼지면 물이 엎질러지듯 공동체를 잠식했고 떠나지 않는 이상 거기서 해방될 수 없는데 10대에게 그건 불가능했다. 그러니까 애초에 책잡힐 거리는 만들지 않는 게 나에게는 현명한 일이었다. 나는 성적 지향을 철저히 숨겼고 이성애자인 척 연기했다. 그러지 않으면 위험에 처할 것이란 감각이 나를 지배했다.
그렇게 10년이었다. 이러면 사람이 쉽게 바뀌기가 어렵다. 동성애자로서 나의 첫 서울살이는 깊은 물에 발끝만 담그며 주저하는 모양새였다.
잊을 수 없는 첫 퀴어문화축제 방문
그렇게 시간은 흘러 2014년이 되었다. 운이 좋았던 것인지 돌아보면 참으로 신기한 시간이었다. 세상에 아무리 존재를 숨겨도 비슷한 이유로 서울로 흘러들어온 성소수자 친구들은 나를 발견해 냈다. 누군가는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드러내며 먼저 다가오기도 했고 때로는 술자리에서 하나둘씩 사람들이 자신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렇게 성소수자 동료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나는 그들에게 이끌려 관련된 행사나 단체에 가입하기도 했다. 작은 발걸음이 성큼성큼 큰 보폭이 되었고 그만큼 용기와 자신감을 얻자 꿈꾸던 일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동아리방이나 사무실, 술집의 구석진 테이블이 아니라 해가 쨍한 열린 공간에서 나를 드러내 보는 것. 더 이상 숨지 않고 불특정 다수가 나를 볼 수 있는 공간에 서보는 것. 바로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하는 일이었다.
4년의 시간 동안 용기와 자신감을 얻었다지만 그럼에도 열린 공간으로 나선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동성애자로서 나는 오랜 시간 숨어 있거나 외부와 완벽히 차단된 '우리'의 공간으로 여겨지는 곳에 있는 게 익숙했다.
축제 전날은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하지만 모이기로 한 친구들이 있으니 약속을 어길 수는 없었다. 2014년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열리는 신촌을 찾았다. 눈만 가린다고 몰라볼 것이 아닐 텐데, 혹시 누가 알아볼까 선글라스를 쓰고는 잰걸음으로 축제의 현장을 찾았다. 하지만 선글라스는 금방 벗어버렸다. 축제에 도착하자마자 현장의 분위기에 금방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여섯 색의 무지개가 여기저기서 보였다. 사람들은 자신을 상징하는 다양한 색을 스티커로 붙이거나 몸에 두르거나 가방에 걸고 다녔다. 누구도 서로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축제는 성소수자로서 아무렇지도 않게 있을 수 있는 개방된 공간이 된다. 그 분위기 속에서 숨을 들이쉬던 첫 순간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즐기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 축제
물론 축제는 즐겁고 재밌는 행사다. 하지만 서울퀴어문화축제가 마냥 그런 행사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답하고 싶다. 자신을 숨기지 않고 편견에서 자유롭게 일상을 살아가는 건 많은 성소수자들의 꿈이다. 그렇게 학교를 다니고 회사에서 일하며 거리를 누비는 것.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질문받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이 사회의 사람들이 서로를 평등하게 대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며 함께 어우러지는 문화가 있어야 한다. 물론 그런 사회는 아직도 요원하다. 하지만 상상으로만 그리던 세상을 잠시나마 몸으로 느껴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그게 바로 퀴어문화축제다. 축제에서 우리는 평등하게 공존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몸으로 겪는다. 나의 모습 있는 그대로 충만함을 느낀다. 청사진 속으로 한걸음 발을 내디뎌 본 경험은 사람을 돌아갈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일상이 된 사회를 더욱 강하게 염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