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20 17:51최종 업데이트 23.04.20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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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일본 삿포로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기후·에너지·환경 장관회의 공동 기자 회견이 열리고 있다. 왼쪽부터 바니아 가바 이탈리아 생태전환부 국무차관, 길베르토 피체토 프라틴 이탈리아 환경장관, 니시무라 아키히로 일본 환경장관, 니시무라 야스토시 일본 경제장관, 슈테피 렘케 독일 환경장관, 패트릭 그라이첸 독일 경제기후장관. ⓒ 연합뉴스


[장면 #1]

지난 15~16일 이틀간 일본 삿포로에서 주요 7개국(G7) 기후∙에너지∙환경장관회의가 열렸다. 다음 달 열리는 G7 정상회의를 앞두고 분야별 열린 첫 각료회의였다. 둘째 날 회원국들은 공동 성명을 통해 최대 이슈 가운데 하나인 후쿠시마 원전의 폐로(못쓰게 된 원자로를 영구 정지함) 작업에 대해 환영 입장을 내놓았다. 


회원국 장관들은 또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독립적 검증을 통한 원전 오염수 방류 감시에 대해 지지 입장을 내놓았다. 그것이 국제표준과 국제법에 따라 인간∙환경 보호를 위할 뿐 아니라 원자로 해체와 후쿠시마 재건에도 필수적이라는 데 입장을 같이 했다. 

이런 내용을 발표하는 기자회견 도중 문제가 있었다. 의장국 일본의 니시무라 야스토시 경제산업장관이 공동성명에 없는 내용을 구두 설명한 것이다.

"처리수 해양 방류와 원자로 폐기 문제에서 꾸준한 진전과 과학적 근거에 의한 우리의 투명한 대처가 환영을 받았습니다." 

일본의 사실 왜곡에 슈테피 렘케 독일 환경장관은 즉각 반박했다.

"도쿄전력과 일본 정부의 책임 있는 노력에는 경의를 표하지만, 오염수 방류는 세계 어디에서도 어떤 방식으로도 환영 받지 못할 것입니다." 

머쓱해진 일본의 니시무라 장관은 기자회견 후 별도의 성명을 내고 자신의 발언을 정정해야 했다.

"조금 전 '환영'이라는 말에 모든 것을 포함시켰는데 실수였습니다. 아마 여러분이 이 점을 지적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니시무라 장관의 말이 단순한 실수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일본은 지난 2월 실무자 회의에서부터 집요하게 오염수 방류를 환영한다는 표현을 이번 회의 공동성명에 넣을 것을 다른 나라 대표단에 요구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참가국들이 이에 대해 부정적 반응을 보이면서 일본의 요구가 관철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이번 장관 회의에서 일본의 니시무라 장관은 또 슬며시 '오염수 방류 환영' 메시지를 발표문에 끼워 넣으려 했고, 이를 눈치챈 독일 대표단에 의해 제지된 것이다. 일본은 의장국으로서 체면만 손상시켰고, 독일의 꼼꼼하고 정확한 지적이 주목을 받았다.

[장면 #2]
 

지난 14일 친강 중국 외교부장과 아날레나 베어보크 독일 외무장관(왼쪽)이 중국 베이징 댜오위타이 국빈관에서 열린 공동기자회견에 참석하고 있다. ⓒ 연합뉴스

   
최근 몇 달 사이 중국을 찾는 국가 정상 또는 각국 고위 인사들이 늘고 있다. 미국의 고립전략에 맞서 외교 폭을 넓히려는 중국의 물량 공세가 그들의 침샘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 달도 못 되는 사이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스페인, 프랑스, 브라질 등의 국가 정상 또는 정부 수반이 중국을 방문했다. 이탈리아의 조르지아 멜라니 총리도 올 상반기 방중을 계획하고 있다.

중국의 대외정책 가운데 대만 관련 전략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물론 중국 입장에서 대만 문제는 원론적으로 외교가 아니라 내치 문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대만은 독립적 주권 체제와 외교, 국방권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최근 미국과 대만은 전례 없는 전략적 밀착 관계를 보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은 대만에 대해 강도 높은 군사적, 외교적 압박을 가하고 있다. 최근 차이잉원 대만 총통이 미국의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을 만난 이후 중국 인민해방군은 대만을 포위한 압박 훈련을 강도 높게 진행한 바 있다.

외교적으로 중국은 얼마 남지 않은 대만의 수교국들을 상대로 '환승' 외교를 종용하고 있다. 올해에도 온두라스가 대만과 단교를 선언했다. 이제 남은 대만 수교국은 태평양과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들, 그리고 중앙아메리카의 벨리즈, 과테말라, 남아메리카의 파라과이, 아프리카의 에스와티니 정도가 전부다.

또한 자국을 방문한 외교사절을 상대로 중국은 대만 문제를 내치 문제로 취급하니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달 초 중국을 국빈 방문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이런 입장의 중국으로부터 '드골을 연상시킨다' 등의 립서비스를 받으며 굵직한 투자 계약 등 선물을 받아 돌아갔다.  

융숭한 대접을 받은 마크롱 대통령은 귀국하는 전용기 안에서 '유럽과 관계없는 문제에 연루되지 말아야 한다'면서 사실상 대만에 대한 중국의 부당한 압박에 눈을 감아줬다. 그의 천박한 거래 외교는 이내 국제사회에서 비난을 촉발했고 차기 유럽의 리더라 불리던 입지가 순식간에 외교 문제아로 전락하고 말았다.

지난주 중국을 방문한 독일의 아날레나 베어보크 외무장관의 언행이 돋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런 배경 위에서다. 앞선 슈테피 렘케 환경장관처럼 베어보크 외무장관 또한 독일의 녹색당 소속이다. 대체로 독일 녹색당의 성향이 그렇듯 그 또한 이념적으로는 중도좌파지만 행동 방식은 원칙주의자다.

그는 미국의 일방주의적 중국 고립전략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도 대만 문제에 대해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현상 변경은 우리 유럽인들에게 용납될 수 없다"는 메시지를 건넸다. 최근 중국이 행한 일련의 대만에 대한 위협 훈련에 유럽 차원의 경고를 보낸 것이다.

[장면 #3]
 

지난 15일(현지시간) 0시를 기해 독일은 남아있던 세개의 원자력 발전소 가동을 멈췄다. 사진은 독일 니더작센에 있는 엠스란트 원전의 모습. ⓒ 연합뉴스


지난 15일 자정(현지시간)을 기해 독일은 에너지 역사의 한 페이지를 넘겼다. 자국 내 운용 중이던 이자르2, 네카베스트하임2, 엠스란트 등 마지막 원전 3곳을 전력 네트워크에서 완전히 분리시킨 것. 1961년 원전 가동을 시작한 지 61년 만의 일이다.

이날 오후 10시부터 해당 원전들은 서서히 동력을 줄여 나가기 시작해 자정쯤 정상 가동의 20% 수준에 이르자 전력망에서 완전히 분리됐다. 그리고 급속 가동 중단 장치가 작동하면서 최종적으로 수명을 다했다. 이로써 독일은 전력 에너지원으로서의 핵발전에 완전한 이별을 고하게 됐다.

독일의 경제 규모와 외교적 영향력을 볼 때 선언 차원을 넘어 실제 탈원전 시대로 몸을 던진 것은 원칙주의적 신념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커다란 에너지 불확실성 속에서 행한 결정이라는 점은 더더욱 그렇다.

독일 내부의 반론도 만만치 않다. 에너지원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감뿐만이 아니다. 상당수 환경주의자들도 탈원전이 자칫 화석연료의 비중 증가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웃 나라이자 원전 강국 프랑스의 견제 역시 신경 쓰이는 대목이다.

독일과 프랑스는 각각 탈원전, 친원전을 대표해 무엇이 더 친환경적인지를 놓고 학문적, 정치적 영역을 포함해 전방위적 경쟁을 하고 있다. 화석연료 대체효과로 따지면 원전의 경제성과 적은 대기오염이 친환경적이라는 것이 프랑스 등 친원전 진영의 입장이다. 과거와 달리 안전한 운용도 보장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독일을 포함한 탈원전 진영은 원전이 가지고 있는 잠재적이고 치명적인 결함으로 원전은 결코 친환경적이지 못하다는 입장이다. 원전의 위험성은 안전한 관리가 가능한가 그렇지 않은가에서 찾으면 안 된다. 어떤 경우의 수도 배제할 수 없을 때, 최악의 시나리오가 가져올 결과가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이해해야 한다.

1945년 히로시마, 1986년 체르노빌, 2011년 후쿠시마. 인류는 수십 년 주기로 핵에너지로 인한 절망적 비극을 겪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 후 세대까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안전한 관리는 희망이지만 치명적 재해는 실재하는 역사다. 독일의 원칙주의는 이 점을 놓지 않고 있다.

국제무대에서 돋보인 독일 녹색당
 

2021년 12월 7일(현지시간)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SPD) 총리 후보 올라프 숄츠(앞줄 왼쪽부터)와 자유민주당(FDP) 대표 크리스티안 린트너, 녹색당 공동대표 로베르트 하벡이 베를린에서 열린 신호등(사민당-빨강·자민당-노랑·녹색당-초록) 연립정부 협약 서명식에서 협약서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들 3개 정당은 연방의회에서 숄츠 후보를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의 뒤를 이을 차기 총리로 선출해 차기 연립정부를 출범시켰다. ⓒ 연합뉴스


독일 원칙주의의 기반이 되는 역사 인식은 원전 사고의 역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20세기 초 두 차례 유럽을 잿더미로 만든 독일은 이후 역사 기록에 대해 '새김돌' 수준의 강박을 가지고 있다.

사실 역사와 관련한 독일인들의 인식은 2차대전 후 커다란 단절을 경험했다. 다소 뒤늦은 통일로 근대 유럽의 후발주자로 합류한 독일은 인문주의와 함께 소위 민족주의 사관의 정립으로 빠른 시간에 강대국 대열에 설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나친 민족적 자신감은 이웃 국가와 스스로를 치명적 파멸의 길로 이끌었고 이에 대한 반성이 전후 역사 인식의 단절로 이어진다.

물론 전후에도 나치의 역사를 돌발적 사건으로 치부하려는 시도는 있었다. 그리고 그런 조류를 넘어 나치 사상을 민족공동체의 원형으로 이해하려는 흐름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원초적 본능에 저항하는 지식인들의 합리성에 대한 신뢰와 노력은 이보다 강했다. 주로 사회학계가 주도한 비판적 역사관은 독일을 탈민족주의로 향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정치적으로는 그러한 흐름의 중심에 녹색당이 있었다. 독일 녹색당은 여전히 보수의 기독교민주연합(기민련, CDU)과 진보의 사회민주당(사민당, SDP)이라는 거대 정당에 이어 규모 3~4위의 정당이다. 하지만 팽팽한 거대 양당의 세력 경쟁 속에서 원칙주의적 존재감을 톡톡히 과시하고 있다. 

특히 2021년 9월 총선을 넉 달 앞둔 5월 한 때 지지율 1위를 기록하면서 최초의 녹색당 총리 탄생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기도 했다. 최종결과는 사민당의 승리로 귀결됐고 사민당-녹색당-자유민주당(자민당, FDP) 연정 체제가 만들어졌지만 앞선 장면들에서 보듯 현재 국제무대에서 독일이 보여주는 역할에는 녹색당 출신 장관들의 활약이 한몫하고 있다. 

녹색당의 원칙주의는 유연한 연정 파트너 구성에서도 나타난다. 연방정부에서는 사민당, 자민당과 신호등 연정(사민당의 붉은색, 녹색당의 녹색, 자민당의 노란색)을 구성하고 있지만, 지방정부에서는 경우에 따라 진보의 사민당뿐 아니라 보수의 기민련과 연정을 구성하기도 한다. 앞서 기민련 출신 앙겔라 메르켈 총리 당시의 연방정부 연정에도 참여한 바 있다.

얼핏 보기에 원칙주의와 유연한 연정 파트너 선택은 모순처럼 보인다. 하지만 합리적 원칙주의의 핵심은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모든 정당의 존재 이유는 권력 쟁취이며 최종 목표는 집권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 일관된 이념적 흐름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원칙주의가 설명된다. 

집권을 위해서라면 이념의 실종도 아랑곳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는 정파주의에 해당하며 최근 지구촌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민주주의의 위기가 여기에서 기인한다. 반면 이념의 실현을 위해서 정파에 구속되지 않는 것이 원칙주의다. 집권이 목표라고 해서 정강정책을 손바닥 뒤집듯 하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최근 국제무대에서 보여준 독일 녹색당의 돋보임은 이러한 원칙주의에서 오는 자신감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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