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작품을 보고 있는 앨리슨 래퍼지난 2006년 4월 28일 방한한 영국 화가 앨리슨 래퍼가 경기도 파주시 헤이리 예술인 마을 전시관에서 열린 앨리슨 래퍼 사진전에 자신의 사진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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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슨 래퍼는 영국에서 활동하는 구족 화가다. 선천적으로 팔이 없고 다리가 짧아 입과 발로 그림을 그린다. 태어나면서 부모에게 버려져 보호시설에서 자랐고, 열아홉 이른 나이에 결혼했지만, 남편의 폭력으로 9개월 만에 이혼하는 등 결코 순탄치 않았던 그녀의 삶은 미술을 만나며 달라졌다.
스물여섯 늦깎이로 입학한 미술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한 뒤 로열 페스티벌 홀, 바비칸 센터, 헤이워드 갤러리 등에서 전시회를 가졌을 만큼 그녀는 예술가로서의 성장을 이뤄냈다. 이러한 그녀의 노력은 자신이 처한 환경을 담대하게 극복한 모범 사례로 인정받아 2003년 영국 왕실로부터 '영 제국 국가 공로 훈장(MBE)'을 받기도 했다. 이는 지역사회에 이바지하는 바가 크고 타의 본보기가 되는 시민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하지만 마크 퀸의 작품을 통해 앨리슨 래퍼가 장애인이고, 임산부인 데다가 이혼 상태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녀를 응원하는 목소리만큼이나 장애 여성의 임신과 출산은 사회적 부담을 가중시키는 무책임한 처사라는 부정적인 목소리가 크게 터져 나왔다. 또 마크 퀸의 작품은 비장애인 남성 작가가 장애 여성 작가의 몸을 도심 광장에 전시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혹평도 나왔다.
엘긴 마블스와 앨리슨 래퍼... 정상과 비정상
그런데 이러한 논란은 모두 근본적으로 앨리슨 래퍼의 '신체'가 '정상'이 아니라는 시각을 전제로 한다. '신체의 정상성'은 마크 퀸이 지속적으로 탐구해 온 주제다. 그는 이미 이를 주제로 다룬 자신의 연작 <완전한 대리석상>(1999-2005)에서 앨리슨 래퍼의 전신상을 제작한 바 있다.
<완전한 대리석상> 연작은 앨리슨 래퍼를 포함해 각기 다양한 사연으로 팔이나 다리가 없는 절단 장애인들을 등신대 크기의 대리석상으로 재현한 작품이다. 작가의 의도는 이들의 조각상과 영국미술관의 대표 유물인 '엘긴 마블스(Elgin marbles)'를 향한 시선의 차이를 비교하기 위해서였다.

▲왼쪽의 <임신한 앨리슨 래퍼>(MARCQUINN)와 오른쪽 엘긴 마블스(EPA/연합뉴스). 정상과 비정상, 아름다움과 추함의 경계의 모호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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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긴 마블스'는 고대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을 장식한 대리석 조각이다. 19세기 초 고대 유물 애호가이자 오스만제국 주재 영국 대사였던 엘긴 경이 영국으로 교묘하게 빼내오면서 지금의 명칭에 이르렀다. 여기저기 부서지고 떨어져 나가 파편적으로만 남아있는 이 고대 유물을 우리는 최고의 이상미를 갖춘 완전한 인체 상으로 바라본다.
대체 무엇이 '엘긴 마블스'와 '신체장애인'의 조각상을 다르게 보게 하는 것일까. 무엇이 완전과 불완전, 정상과 비정상, 보편과 특수, 다수와 소수를 가르는 기준이 되는 것일까. 마크 퀸은 바로 이 지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가 앨리슨 래퍼의 전신상을 갤러리를 벗어나 트라팔가 광장에 세우자 대중의 관심이 증폭하면서 장애인, 특히 장애 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이 자연스럽게 공론화될 수 있었다. <임신한 앨리슨 래퍼>는 이렇게 탄생한 작품이었다.
뜨거운 논란 속에서도 <임신한 앨리슨 래퍼>는 2007년까지 트라팔가 광장을 지켰고, 마크 퀸은 예술적으로도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사이 앨리슨 래퍼는 스스로를 현대판 '밀로의 비너스(Venus de Milo)'로 상정한 작업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자서전 <앨리슨 래퍼 이야기>(2005)로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올랐다. 출산 후에는 아들과 함께 BBC의 기획 다큐멘터리 시리즈 <우리 시대의 아이(Child of Our Time)>에 출연하며 유례없는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2012 런던 패럴림픽 개막식2012년 8월 29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패럴림픽 개막식 오프닝 공연 모습. '임신한 앨리슨 래퍼' 조각상이 중앙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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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컬하게도 마크 퀸의 작품으로서의 앨리슨 래퍼는 그렇지 못했다. <임신한 앨리슨 래퍼>는 2012년 런던 패럴림픽의 개회식 무대를 장식하며 '희망과 의지'의 아이콘으로 거듭나는 듯했지만, 이듬해 베네치아 비엔날레 기간에 맞춰 진행된 마크 퀸의 개인전에서는 다시 한번 잡음이 나왔다. 산 조르조 마조레 교회 앞 광장에 세워진 작품을 두고 베네치아 총대주교구가 불만을 표했던 것이다. 전시의 흥행을 목적으로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 건축물인 산 조르조 마조레 교회를 이용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흥미롭게도 서구사회에서 장애인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은 그리스도교의 발흥과 궤를 같이한다. 예수 그리스도교의 신성성을 그가 행하는 치유의 기적을 통해 강조하는 동안 역설적이게도 장애는 죄악으로 여겨지게 되었는데, 특히 종교개혁이 일어난 르네상스 시대는 분수령이 되었다. 명확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작품을 통해 공간에 새겨진 역사적 지층을 폭로하고 공론화해 온 마크 퀸이 이러한 사실을 몰랐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오히려 이로 인한 갈등을 기대했을 심산이 크다.
미술 작품은 때때로 그것이 놓인 장소에 따라 다른 의미를 생성한다. 특히 공공 공간에서 장소가 갖는 의미는 작품 자체의 의미를 좌지우지할 만큼 강력한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마크 퀸의 <임신한 앨리슨 래퍼>는 전시 장소가 달라질 때마다 영웅과 장애인 사이를 진동해 왔다. 이 진동의 폭이 줄어들지 않는 한 이 작품의 역할과 가치는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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