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반도체 공사현장에 쌓여있는 각종 건설자재들.
나재필
건설현장 용어는 머리를 싸매고 공부한다고 알게 되는 일이 아니다. 시간이 가면서 스며들게 되고, 깨지면서 배우게 된다. 신규 인력들이 처음에 고전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게다가 현장용어들은 일본어 잔재들이 많다. 쓰기 싫은 데도 굳어져 '머리'보다 '말'이 앞선다.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건설업에 침투했으니 113년째 이어져 오는 일이다. 건설현장 경험이 적은 사람의 경우 일본·외래용어를 몰라 곤욕을 치르거나 낭패 보는 일이 적지 않다.
현장에서 일본어 잔재가 청산되지 않는 이유는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 때부터 이미 입에 붙었기 때문이다. 기성세대, 꼰대들의 잘못이다. 또 이런 잘못된 답습은 텃새에서 비롯된다. 다른 업종에서 일하다가 왔거나, 초짜가 오면 그들은 토착화된 용어와 언어로 은근히 자기 경력을 과시한다. 그래봤자 일본말인데 뭐 그리 대단하단 말인가.
노가다라는 말은 일본 말 '도카다(土方)'에서 유래됐다. '틀이 없다'라는 뜻이니 건설현장이 터(부지)만 있는 무(無)의 상태에서 어떤 구조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에 이 같은 말이 생겼다고 한다. 한마디로 '틀이 없는 직업, 틀이 없는 산업, 틀이 없는 직장'이다.
건설현장 용어를 보면 우리말의 뿌리를 찾기 힘들다. 나 같은 조공, 즉 전문기술자를 돕는 노동자는 보조공 또는 곁꾼으로 쓰면 되는데 '데모도'라고 부른다. 공사 현장에서 '공구리 친다'라는 말은 '양회반죽' 또는 '콘크리트'로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데마찌'란 말은 눈이나 비가 와서 작업 진행이 안 되거나 일거리가 없는 상태일 때 사용하고 있다. '가타(形)'는 틀 또는 거푸집, 낫토는 너트, 네지는 나사, 니빠는 니퍼, 단도리는 채비 또는 단속, 나라시는 고르기, 오사마리는 마무리, 도끼다시는 '갈기 또는 갈아 닦기', 메지는 줄눈, 멧키는 도금, 판네루는 널빤지를 이른다.
일을 끝내자는 '시마이', 그날 정해진 할당량을 채웠을 경우 끝나는 일을 일컬을 때 쓰는 '야리끼리', 지렛대란 뜻인 '빠루', 운반이란 뜻의 '곰방', 각목을 뜻하는 '가꾸목', 줄자는 '겐나와', 오비끼는 고임목, 아나방은 천공 강철판, 반생이는 둥글게 말아놓은 철사(와이어 로드)를 뜻하는데 흔히들 쓰는 용어다.
비단 건설 현장뿐만이 아니다. 유치원이란 명칭도 1897년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자녀를 위해 세운 '부산유치원'이 그 시작이었다. 순우리말이란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한 고구마·구두·가방도 일본어에서 파생됐다.
기자 세계 남은 일본 잔재 "독고다이야?"
"이 기사 독고다이야? 우라까이 아니지? 야마를 제대로 잡고 써. 그래야 미다시가 잘 나오는 거야. 와리스케 가져와봐."
기자시절 자주 듣던 신문용어다. 이런 걸 보면 건설현장 용어만 비웃을 입장이 못 된다. 선배가 그렇게 썼고, 선배의 선배, 그 선배의 선배들이 으레 그렇게 쓰니 그런 줄 알고 썼다.
주제가 뭐냐고 하면 될 일을 '야마가 뭐냐'고 했다. 기사 마감에 임박해 다른 신문사의 기사(특종 포함) 일부를 대충 바꾸거나 조합해 새로운 자기 기사처럼 내는 행위를 '우라까이', 표제·헤드라인·색인 등을 가리켜 미다시, 레이아웃을 와리스케, 가로를 요꼬, 세로를 내리다지라 불렀다. 출입처를 말할 땐 '나와바리'라 칭했다.
신입 기자가 입사하면 경찰서를 돌면서 취재 훈련을 받게 되는데 이를 '사쓰마와리'라고도 한다. 사쓰마와리(察回)는 일제강점기 신문사들부터 내려온 용어로 추정된다. 독불장군을 의미하는 '독고다이'는 태평양 전쟁 당시 자폭공격을 감행한 가미가제를 칭하는 특공대(特攻隊)가 발음이 변한 것이다. 절반이라도 만회해 보라며 '반까이(挽回)'라는 말도 썼다.
사회의 귀감이 되어야 할 언론계마저 아직까지도 그런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 뿌리 깊게 박힌 일제의 잔재를 지우자고 떠드는 건 한글날이나 읊어대는 캠페인이다.
'노동자의 적은 노동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일본 현장용어 사용은 노노(勞勞) 갈등의 단면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런 싸구려 용어를 알아듣지 못한다고 노동자가 노동자를 무시하는 일은 이상한 위계요, 자승자박이다.
60~70년대 대한민국의 뼈대를 세우고, 부흥의 기틀을 잡은 주체가 누구인가. 건설노동자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보다 사람으로 '사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한다. 뜻이 맞지 않는 사람을 피해 가기가 어려운 일이고, 그 사람과 악연이 닿아 그르칠 일을 만들지 않기가 또 어려우며, 결국 잘못된 인연으로 후회하지 않기가 제일 어렵다.
난 초짜 노동자이지만, 숙련된 노동자들과 좋은 인연으로 남고 싶다. 같은 노동자들끼리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한다. 경력이 많든 적든 이들은 모두 '먹고 살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이다. 일을 제대로 시키려면, 제대로 가르쳐주는 게 순서다.
나는 현재 비계 양중(공사에 필요한 자재들을 운반하는 일)팀에 속해있다. 대차(네 바퀴 손수레)를 이용하는 일이 많은데 짐을 묶으려면 래칫 힐(깔깔이바, 자동바)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것도 아주 기초적인 기술이 필요하다.
처음 해보는 사람은 줄의 엉킴과 꼬임 때문에 버벅거린다. 내 경우가 그랬다. 난 개인적으로 '깔바'를 구입해 집에서 연습했다. 젊은 사람들이야 악력도 좋고 기술도 있어 별것도 아니지만 초짜인 난 훈련이 절실했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건설노동자들은 대략 200만 명쯤 된다. 이들이 일본식 현장용어를 답습하듯 무책임하게 사용한다면 우리말 지키기의 근간을 위협할 수도 있다. 그들의 자식과 가족을 포함하면 1000만 명, 인구의 5분의 1이 경도되는 셈이다.
미국 스워스모대 데이비드 해리슨 언어학 교수는 "언어를 잃어버리면 시간과 계절·수학·풍경·신화·음악·미지의 세계 등 수세기에 걸쳐 인간이 생각한 것을 잃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건설현장의 언어는 우리의 말이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경멸하는 나라의 언어다. 일본 잔재 청산은 바로 말의 힘, 언어의 순화, 글의 근본에서 시작돼야 한다. 언어를 잃으면 그 나라 정신과 문화가 사라진다.
덧붙이는 말
'나의 막노동 일지'를 연재하면서 '노가다'라는 용어를 쓴 것에 대해 통렬히 반성합니다. 보통 막일을 지칭하는 말로 알기 쉽게 전달하려다 보니 피해 갈 수 없었고 스스로 무너졌습니다. 일제 잔재를 없애자고 하면서 스스로 그 단어를 집어삼켰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독자님들께 용서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