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09 11:00최종 업데이트 23.04.0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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둑방길 위에서 내려다 본, 하남시 강변 벚꽃길. ⓒ 성낙선


한강이 소란스럽다. 한강에서 무슨 축제나 의식을 치르는 것 같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오래간만에 미세먼지가 '보통'인 날, 주말인데다 햇살까지 맑아서인지 하남시 한강변의 넓은 들판이 꽃구경을 하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중에는 그냥 바람을 쐬러 나왔다가 뜻하지 않게 꽃구경까지 하게 된 사람들도 있다. 그 얼굴에 "여기 이런 게 있었어?"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하남시 강변 둔치가 온통 꽃밭이다. 강변 자전거도로는 물론이고, 둑방길 아래를 지나가는 산책로 양쪽으로도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세상에 벚꽃길이 아무리 많아도, 이처럼 아름다운 길은 드물다. 벚꽃이 하늘을 하얗게 덮었다. 그 벚꽃이 그새 절정을 넘어서고 있는지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이 후드득 떨어진다. 꽃잎이 눈송이처럼 나부끼며 떨어지는 광경이 장관이다.
 

당정뜰 앞을 지나가는 아름다운 자전거도로. ⓒ 성낙선


그 아름다운 벚꽃길이 끝이 잘 보이지 않는다. 둑방 위에 서서 벚꽃길을 멀리까지 내려다보는데도 어디가 끝인지 알 수가 없다. 이 정도면 여의도 벚꽃길도 무색하다. 그 길에 벚꽃을 그늘 삼아 자리를 깔고 앉은 사람들이 또 벚꽃만큼이나 많다. 자전거를 타고 근처를 지나가던 사람들도 길 위로 꽃비가 휘날리는 광경을 보고는 멍하니 넋을 잃고 서 있기 일쑤다.

이 정도를 가지고 한강이 무슨 의식을 치르는 것 같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이르다. 사람들뿐만이 아니다. 한강에서 진짜 의식을 치르는 주인공들은 따로 있다. 겨우내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없는 동물들이 봄을 맞아 제각기 자기 모습을 드러내며 생존 신고를 하기에 바쁘다. 그야말로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한강으로 뛰쳐나와 '그사이 잘 있었어'라며 서로 인사 나누는 것 같은 풍경이다.
 

하남시 강변 둔치에서 풀을 뜯고 있는 고라니. ⓒ 성낙선

 
봄을 맞아 들판으로 나온 뭇 생명들

하남시 위례 강변길 버드나무 군락지, 연두색으로 곱게 물든 버드나무들 사이에서 고라니 한 쌍이 조용히 풀잎을 뜯고 있다. 새봄에 새로 돋아나는 풀잎을 뜯는 기분이 어떨지 궁금하다. 자전거도로 위로 자전거들이 떼를 지어 지나가는데도 자세가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는다. 오랜만에 맛보는 신선한 성찬에 자신이 갖출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를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경계심은 남아 있어서 가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본다. 한강을 돌아다니다 보면, 때로 갈대숲으로 고라니가 뛰어가는 걸 볼 때가 있다. 사실은 그게 고라니일 거라고 추측할 뿐이지, 실제 고라니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갈 때가 많다. 그러니 이 봄이 아니고서는 고라니가 들판에 풀어놓은 염소처럼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을 보는 건 드문 일이다.
 

팔당대교 부근, 봄 나들이를 나온 거위 가족. ⓒ 성낙선


팔당대교 근처에서는 거위 가족이 유유히 물 위를 떠다니고 있다. 이 녀석들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일에 상당히 익숙해 보인다. 사람들에게 다가와서는 계속 그 주변을 얼쩡거린다. 그 모습이 마치 다시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돼서 반가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알고 보니 이 녀석들, 이곳에서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꽤나 유명한 거위들이다.

자전거도로 위로는 겨울잠에서 깨어난 뱀 한 마리가 미끄러지듯이 지나간다. 느리면서도 유연하게 도로를 가로질러서는 건너편 풀숲으로 스르르 꼬리를 감춘다. 뱀에겐 이것도 목숨을 건 모험일진대, 어디서 이런 여유가 생기는 건지 모르겠다. 이런 행위들이 모두 이 동물들에겐 새봄을 맞아 치르게 되는 신성한 의식 중에 하나일지도 모른다. 봄이 오면 어김없이 치러야 하는 소중한 의식들 말이다.
 

당정뜰의 어제와 오늘을 비교해 보여주는 안내판. 옛날 사진엔 너른 백사장과 물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 성낙선

 
소란스럽지만 시끄럽지 않은 풍경들

아무래도 한강에서 가장 소란스러운 건 사람들이다. 너른 '당정뜰'이 산책을 나온 사람들과 자전거를 타러 나온 사람들이 뒤섞여 여느 유원지만큼이나 번잡하다. 유원지에서 볼 수 있는 놀이기구와 이러저러하게 잡다한 물건들을 파는 상인들이 없을 뿐이다. 당정뜰 수변공원은 덕풍천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에 형성돼 있는 삼각형 모양의 수변공원이다.

이때가 아마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시기일 수 있다. 당정뜰과 둑방길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하남 유아숲 체험원'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시끌시끌하다. 코로나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아무래도 이 아이들이 아닐까 싶다. 그동안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었던 아이들에겐 올봄에 보는 것들이 모두 다 새로울 수도 있다.
 

하남시 당정뜰, 덕풍천 징검다리를 건너는 사람들. ⓒ 성낙선

 
아이들이 공원에서 신나게 노는 풍경을 보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다. 유아숲 체험원은 아이들이 체험삼아 가지고 놀 수 있는 기구들이 많아, 가족 단위의 나들이객이 자주 찾아오는 곳이다. 이 체험원은 도시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베어 없어질 위기에 처해진 나무들을 모아 옮겨다 심은 곳으로, 한때는 '하남 나무고아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러다 항간에 고아원이라는 명칭이 어감이 좋지 않다는 말이 나오면서 나중에 체험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직도 나무고아원이라는 이름이 더 많이 쓰인다. 버려진 나무를 돌본다는 의미가 담긴 나무고아원이 그렇게 나쁜 이름은 아니라는 반증일 수도 있다. 이곳에서는 아이들이 '고아'가 된 나무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한창 봄맞이 의식을 치르느라 바쁜 모습이다.
 

위례 강변길에서 바라다 본 한강 풍경. ⓒ 성낙선

 
이 봄에 한강이 있어서 다행이다

당정뜰과 하남 유아숲 체험원이 시끌시끌하다고 해서 정신이 없을 정도로 어수선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모두 자신들이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잘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고 해도, 한강은 그들을 전부 다 끌어안고도 남을 만큼 충분히 여유가 있는 곳이다.

한강에서 이 많은 사람들과 동물들을 보고 있으려니, 문득 이 따뜻한 봄날에 한강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강이 없었다면 이 많은 식물들은 어디에 뿌리를 내릴 것이며, 그 많은 동물들은 어디에 보금자리를 마련할 것인가? 한강이 없었다면, 우리는 또 어디로 자전거를 타러 갔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답이 나오질 않는다.
 

봄맞이꽃. ⓒ 성낙선

 
자전거로 팔당대교를 찍고 돌아가는 길에, 고덕 생태공원과 암사 생태공원을 들른다. 고덕생태공원에 조팝나무꽃이 한창이다. 한동안 그 달큰한 꽃향기에 취해 공원 안을 이리저리 떠돌아다닌다. 공원 산책로 주변으로는 '봄맞이꽃'이나 '제비꽃' 같이 앙증맞은 들꽃들이 무리를 지어 피어 있다. 봄맞이꽃은 봄소식을 전하는 대표적인 들꽃 중에 하나다.

오늘은 이 작은 들꽃들을 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한강으로 나들이를 나온 보람을 느낀다. 마지막으로, 한강 자전거도로를 벗어나 광나루 나들목을 빠져나오는 길에 또다시 꽃비가 쏟아져 내리는 풍경을 마주한다. 오늘 한강에서 치른 봄맞이 의식이 그 끝에 이르러서는 이렇듯 장엄하게 막을 내린다. 하늘은 맑고 햇볕은 따듯하고, 이래저래 자꾸 나들이를 부르는 봄이다.
 

광나루 한강공원 나들목, 시야를 가리는 꽃비.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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