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10 04:56최종 업데이트 23.04.10 04:56
  • 본문듣기
'동성애가 뭐 대수라고'

언젠가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고 남겼던 메모 중 일부다. 많은 멜로 영화들이 주인공들 사이의 사랑에 난관과 제약을 둔다. 계급, 사회적 신분, 세간의 편견 그리고 때로는 한정적으로 주어진 시간까지.


이런 방해물들이 강하면 강할수록 이를 뚫기 위해 주인공들이 나누는 감정은 더욱 강렬해진다. 그리고 우리는 각본가가 만든 가상의 이야기 속에서도 진정성 넘치는 사랑을 느낀다. 그런 면에서 동성애는 영화 속에서 낭만화되기가 생각보다 쉬운 소재이다.

동성애를 둘러싼 차별과 편견은 실제로 존재한다. 여타의 설명이 더 필요하지도 않다. 제도 밖으로 밀려나면서도 서로의 손을 놓지 않는 동성 연인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진정한 사랑의 상징이 된다. 그리고 '이성애'와 같이 비교적 관습적이고 안전한 관계는 주인공들이 나누는 사랑의 진정성을 강조하기 위해 명확히 대비될 수 있는 위치에 배치된다.

1700년대 프랑스를 배경으로 두 여성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도 비슷한 이야기를 다룬다. 다만 내 관점에서 이 영화에 차이점이 있다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두 주인공의 동성애를 다른 안전한 관계와 대비되는 낭만적인 것으로 그리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1700년대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이들이 겪는 제약은 두 사람의 관계를 방해한다. 하지만 영화는 담담하게 엘로이즈와 마리안느가 겪는 상황과 나누는 감정을 스케치하듯 그려낼 뿐이다. 처음에는 감독이 동성애 서사로 만들 수 있는 뻔한 도식을 답습하지 않고 싶었던 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시대에 동성애가 뭐 대수인가.

유독 동성애자 캐릭터에게만 요구되는 개연성

차별과 금기가 여전한 건 사실이지만 많은 경우 사람들은 동성애자가 존재함을 알고 있으며 이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기도 한다. 그들에게 이성애나 동성애나 그냥 성애의 한 종류인 것이다. 엘로이즈나 마리안느는 절절한 이성애를 할 수도 있지만 캐릭터의 성적 지향에 따라 동성애를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런 영화가 나온 것뿐이다.

동성 간 로맨스를 그 자체만으로 특별하고 강렬한 것으로 그릴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이건 방식의 차이일 뿐 정답은 없다. 동성애를 둘러싼 금기와 배제를 부각해 그 관계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또한 다를 것 없는 여러 사랑 중 하나라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도 가능하다. 전자가 소수자로서 동성애자들이 점한 사회적 위치에 주목한다면 후자는 그런 동성애를 이제는 사람들이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하나의 사례를 제공한다.

그런 면에서 얼마 전 흥미로운 영화 하나가 또 등장했다. 전도연 주연의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이다. 영화의 주인공 길복순의 정체성은 두 가지 주요한 역할로 구성된다. 하나는 업계 최고의 청부살인업자, 다른 하나는 딸을 키우는 엄마.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 영화의 주인공 길복순의 정체성은 두 가지 주요한 역할로 구성된다. 하나는 업계 최고의 청부살인업자, 다른 하나는 딸을 키우는 엄마(아래 사진). 딸인 김재영은 같은 학교를 다니는 여성 동급생 소라와 비밀리에 연인 관계를 맺고 있다(위 사진). ⓒ 넷플릭스

 

<길복순>은 공개와 동시에 전 세계 넷플릭스 시청자 수 3위를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영화에 대한 평단의 평가도 대부분 우호적이다. 다만 시청자들의 반응은 호불호가 나뉘는 편인데 워낙 개성이 강한 영화라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는 만족스러운 관람이었다. 넷플릭스는 여성 청부살인업자가 나오는 폼 나는 액션 영화를 홍보했고 내게 약속한 것을 주었다. 다른 지점에서 미진함을 발견할 수는 있어도 일단 가장 중요한 기대는 충족했다.

아무리 좋은 영화도 관람자가 누구냐에 따라 평가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건 <길복순>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들은 이 영화가 지나치게 현란한 스타일에 치중한 나머지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고 평가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주요 인물 몇몇의 동기를 끝까지 이해할 수 없어 했다. 영화를 좋게 본 나와 반대인 입장이긴 한데 차근차근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판단들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것도 있었다. 주인공 길복순의 딸 길재영의 이야기에 대한 평가다. 길재영은 같은 학교를 다니는 여성 동급생 소라와 비밀리에 연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 사실을 길복순에게 말하지 않는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딸에게 길복순은 벽을 느끼며, 길재영의 성적 지향은 두 인물이 만드는 드라마의 중심축이 된다. 그런데 영화가 공개된 후 몇몇 기사들은 길재영이 동성애자인 게 개연성이나 필요성이 없다거나 어리둥절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길재영이 아무 맥락도 없이 길복순에게 자신의 성적 지향을 밝히는 게 아니다. 길재영과 소라의 관계, 이로 인한 고민과 처하는 난관은 영화 속에서 충분히 묘사된다. 길재영의 성적 지향은 이 인물이 저지르는 돌발 행동과 깊은 연관이 있다.

하지만 길재영은 그 모든 전말을 길복순에게 말하지 못하고 이는 길복순이 자신의 딸에게 답답함을 느끼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길재영의 커밍아웃은 길복순과의 갈등이 극적으로 해소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개연성이 없는 것도 불필요한 설정도 아니다.

그렇다면 저 평가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길재영이 동성애자인 것 자체의 개연성과 필요성을 설득했어야 한다는 뜻일까. 길재영이 동성애자여야만 하는 이유를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이해하면 이야기는 더욱 이상해진다.

소수자 향한 차별이 전제된 질문들

<길복순>은 살인보다 양육이 더 어려운 킬러의 이야기다. 때문에 길복순과 길재영의 갈등은 필수 요소다. 만일 길재영이 동성애자인 게 개연성도 필요성도 없다면 다른 건 괜찮은가? 길재영이 이성애를 하다가 사고에 휘말린다면? 동급생을 따돌리는 걸 주도한다면? 사실은 길복순 몰래 술을 마시고 있었다면? 아니면 마음속으로는 사실 엄마를 증오하고 있었다면? 길복순과 길재영의 갈등을 위해 이런 요소들을 썼다면 어떨까. 이들은 개연성이 있나? 불필요한 게 아닌가?

만일 영화 속에서 이를 암시하는 단서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다면 이 요소들은 개연성도 필요성도 없다고 평가받을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충분히 발생할 수 있거나 오히려 극의 전개상 반드시 등장해야 할 요소가 된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언급한 것처럼 길재영의 동성애 관계와 그로인해 벌어질 사건에 대한 단서는 영화 초반에 이미 주어진다. 그렇다면 왜 평가가 달라야 하는가. 단지 동성애라서?

사람들은 낯설고 이상한 것을 마주하면 질문을 한다.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 우리는 누구에게 무엇을 질문하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질문 받지 않는 것은 기득권이다. 사람들은 이미 이해하고 정상이라 여기고 보편적이라 판단하는 존재들에 대해서만 그렇게 한다.
   

넷플릭스 <길복순>에서 주인공 길복순과 그의 딸 길재영 ⓒ 넷플릭스

 
그래서 질문 받는 것은 주로 소수자들이다. 당신은 왜 여기서 살아야 합니까. 당신의 성별은 왜 남성이 아니라 여성입니까. 당신은 왜 동성애자입니까. 이는 특정 대상을 이해할 수 없고 정상이 아니며 예외라고 생각할 때만 할 수 있는 질문이다.

사람들은 '당연하지 않은 대상'에 대해서만 '어쩌다 왜 여기서 그러고 있는지'를 질문한다. 겉으로는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미 차별을 전제하고 있는 질문이다. 단지 다른 삶을 산다는 이유로 누군가에게 이런 질문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길재영의 동성애 서사를 다룬 기사들에 대한 내 해석이 부디 오해이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역으로 질문할 수밖에 없다. '이성애 코드'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개연성을 의심할 것인가? 필요성을 질문할 것인가? 어떤 인물이 이성애자여야만 하는 이유를 설득하라고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동성애에 대해서는 왜 그걸 할 수 있는가. 도대체 요즘 세상에 동성애가 무슨 대수라고 말이다.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9,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