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07 12:24최종 업데이트 23.04.07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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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하멜의 고향인 네덜란드 호린험(Gorinchem)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암스테르담에서 남쪽으로 70㎞쯤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도시다. 하멜은 1630년 이곳에서 태어났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취업하여 일본 나가사키로 가는 드 스페르베르호를 타고 항해하던 중 제주에 표류했다. 13년간 억류 생활을 하던 중 탈출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에는 우리나라 강진군과 호린험시가 자매결연 체결을 기념해 하멜의 동상을 세웠다. 자동차 여행 중이던 나는 하멜의 동상을 보려고 주차장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호린험시 안에는 공용 주차장 표시가 없었고, 눈에 보이는 모든 주차장에는 거주자 전용이라는 표시가 붙어 있었다. 하멜 동상이 보이는 곳에 있는 주차장도 마찬가지로 거주자 전용 주차장이었다.


주차장 안에서 당황하고 있는데 자전거를 타고 지나던 한 여성이 다가왔다. 도움이 필요하냐고 묻는 것이었다. 하멜의 흔적을 찾아 한국에서 왔는데 주차를 할 수 없다고 했더니, 몇 시간 정도 머물 것인지 다시 물었다. 나는 점심을 먹고 사진 좀 찍고 하면 세 시간 정도 걸릴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이곳에 주차하라며 자신의 주차 카드로 결제하고 나에게 주차할 공간을 알려주었다. 차를 옮기는 것을 지켜본 후 출발하려는 이 여성에게 주차비를 주겠다고 했더니 손사래를 치며 출발하려 하였다.

궁금증이 생긴 나는 그 사람에게 물었다. 우리가 아는 네덜란드는 더치페이로 유명한데 어떻게 처음 보는 동양인에게 주차비를 대신 내줄 수 있느냐고. 그 웃으며 대답하기를 더치페이는 영국 사람들이 네덜란드를 무시하는 감정으로 만들어낸 영어 표현이지 네덜란드에는 없는 문화라는 것이었다. 혹시 궁금하면 더치 와이프(Dutch wife)라는 단어를 한번 찾아보라고 하며 손을 흔들고 가던 길을 재촉하였다.

더치 와이프는 네덜란드 사람들이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커피 농장을 설치하기 시작하던 18세기 초반 현지인 아내를 두는 일이 많았는데 이를 비난하는 용어로 영국 사람들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진짜가 아닌 가짜 아내를 의미하였고 이후에 네덜란드 사람들이 더운 인도네시아에서 냉방용으로 즐겨 사용하던 죽부인에 이런 이름이 붙기도 하였다.

더치 와이프처럼 더치라는 단어가 접두어로 쓰이는 영어 표현이 많다. 더치 커리지(Dutch courage)는 술김에 벌이는 헛된 용기 즉 객기를 말하고, 더치 바겐(Dutch bargain)은 술김에 맺은 잘못된 계약을 말한다. 더치 골드(Dutch gold)는 가짜 금, 더치 콘서트(Dutch concert)는 듣기 불편한 연주회, 더치 위도(Dutch widow)는 매춘부를 뜻한다. 온통 부정적인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이런 표현들이 생겼을까? 배경은 17세기 후반에 벌어진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의 잇단 전쟁이다. 17세기에 접어들며 벌어진 네덜란드 독립전쟁과 30년 전쟁을 통해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전성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 자리를 대신한 것이 해상 세력 영국과 네덜란드였다.

1602년에 출범한 주식회사 형태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유대인들이 운영하여 크게 성장하였다. 아시아 향신료 무역에 이어 커피 무역을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네덜란드의 성장에 불만이 가득했던 영국의 분노가 가져온 세 차례의 전쟁으로 네덜란드 세력은 위축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1688년 명예혁명의 결과로 잉글랜드가 네덜란드 출신 윌리엄 3세를 국왕으로 맞이하면서 네덜란드에 대한 적대감은 다시 커졌다.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네덜란드와 관련된 부정적인 표현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폐습을 탈피한 선각자"

우리나라는 비록 역사적으로 경제적 여유를 누린 시절은 별로 없었지만 함께 식사하거나 술을 마신 경우에 나누어서 내기보다는 초대한 사람 혹은 누군가 여유 있는 사람이 모두의 식음료 값을 다 내는 풍습이 있다. 커피가 처음 들어오고, 끽다점이나 카페가 처음 생겼을 때도 이런 풍습은 여전했다. 한 테이블에서 같이 차를 마셨을 때 그중 한 사람이 찻값이나 커피값을 내는 것은 하나의 관습이었다.

그런데 이런 전통적인 풍습에서 이탈해 자신이 마신 커피값을 자신이 계산하는 도시적인 면모를 보인 선구적인 인물이 나타났다. 기록에 나와 있는 첫 번째 인물은 흥미롭게도 커피를 즐겼던 천재 시인 이상이었다.

이상은 1933년 여름 서울의 북쪽인 청진동에 자신의 아지트인 '제비다방'을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만 나면 남촌 입구인 소공동에 있던 다방 '낙랑파라'를 찾았다. 지금의 서울시청 앞 프라자호텔이 있는 자리다. 청진동에서 다동 쪽으로 내려와 친구인 박태원이나 구본웅을 만나서 광통교 다리를 건넜다. 그러고는 남대문으로 향하는 길을 걷다 오른쪽으로 돌아서 낙랑파라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이것이 일과였다.
 

시인 이상(왼쪽부터)과 소설가 박태원, 시인 김소운의 기념 사진. 22일 일반에 공개하는 청와대 춘추관 문학 특별전시 '이상, 염상섭, 현진건, 윤동주, 청와대를 거닐다'에서 볼 수 있다. 1934∼1935년 무렵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가로 15㎝, 세로 14.2㎝의 낡은 사진이다. "아동세계를 간행당시의 편집실에서"라는 메모와 함께, 세 작가의 모습 아래 성명이 적혀 있다. 2022.12.21 ⓒ 연합뉴스

 

이상은 거의 매일 낙랑파라를 찾았다. 이곳에는 언제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와 함께 온갖 잡지와 음악도 있었다. 이상이 자신이 경영하는 제비다방보다 이곳을 찾았던 이유 중 하나는 연인 금홍의 일탈이었다.

황해도 배천온천에서 요양하던 중 만나 함께 서울로 내려와 다방을 차렸던 금홍은 날이 갈수록 술 취한 모습으로 담배를 물고 푸념을 늘어놓는 시간이 많아졌다. 손님들과의 염문도 끊이지 않았다. 이상은 이런 모습을 피해 남촌의 낙랑파라를 자주 찾았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쓴 박태원이 이상과 늘 만났던 곳도 낙랑파라였다.

낙랑파라는 1930년대 다방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상이 박태원의 신문 연재를 위해 그린 삽화 그리고 잡지 <삼천리> 1933년 10월 호에 실린 박옥화의 글에 낙랑파라의 모습이 남아 있다. 박옥화의 <인테리 청년 성공직업>에 보면 낙랑파라 입구에는 "남양에서 이식하여 온 듯이 녹취 흐르는 파초"가 놓여 있었고, 안에는 "슈베르트, 데도릿지 등의 예술가 사진"과 "좋은 데생"도 알맞게 걸려 있었다.

실내 분위기가 손님에게 안온한 심정을 주는 곳이 낙랑파라였다. 이상이 마음의 위안을 위해 찾을 만한 분위기였다. 커피 또한 위안의 음료였다는 것은 덤이었다. 바로 여기서 시인 이상이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기록상 처음으로 더치페이를 했다.

낙랑파라에서 이상을 처음 만나 친구가 된 시인 김소운이 훗날 회고한 바에 의하면 이상은 "희희낙락 담소하다가도 일어설 때는 제가 마신 찻값으로 10전 경화 하나를 테이블 위에 내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김소운은 이런 이상의 모습을 "도회적"이라고 표현하였고 이상을 "폐습을 탈피한 선각자"였다고 불렀다.

더치페이의 선각자 이상이 세운 제비다방은 2년 만인 1935년에 문을 닫았고, 잠시 잡지사에서 하던 일을 그만둔 이상은 1936년 여름 변동림과 결혼한 후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일본 도쿄로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찾던 새로움은 거기에도 없었다.

많은 사람이 일본에서 발견한 새로움 때문에 친일로 돌아서던 시절이었다. 오므라이스나 '돈가츠'도 그런 새로움의 하나였고, 일본식 도시 문화도 부러움의 하나였다. 그런데 이상은 오히려 일본 도쿄의 모습에서 경성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점을 발견하고 곧장 귀국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두 가지가 그의 귀국을 막았다. 일본 경찰이 그를 불령선인으로 분류하여 조사하기 시작한 것이 하나였고, 이런 일로 인해 악화된 폐결핵이 다른 하나였다. 그는 결국 도쿄대학교 병원에 입원하였다. 급히 현해탄을 건너온 아내에게 "멜론이 먹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일본,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알기 어려운 나라다. 믿고 친해야 할 이웃인지, 경계하고 경계해야 할 남인지. 분명한 것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쉽게 알기는 어려운 나라, 그래서 함부로 판단하기보다는 조심해야 할 나라다.

(유튜브 '커피히스토리' 운영자, 교육학 교수)
덧붙이는 글 이길상(2021). 커피세계사+한국가배사.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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