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상(왼쪽부터)과 소설가 박태원, 시인 김소운의 기념 사진. 22일 일반에 공개하는 청와대 춘추관 문학 특별전시 '이상, 염상섭, 현진건, 윤동주, 청와대를 거닐다'에서 볼 수 있다. 1934∼1935년 무렵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가로 15㎝, 세로 14.2㎝의 낡은 사진이다. "아동세계를 간행당시의 편집실에서"라는 메모와 함께, 세 작가의 모습 아래 성명이 적혀 있다. 2022.12.21
연합뉴스
이상은 거의 매일 낙랑파라를 찾았다. 이곳에는 언제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와 함께 온갖 잡지와 음악도 있었다. 이상이 자신이 경영하는 제비다방보다 이곳을 찾았던 이유 중 하나는 연인 금홍의 일탈이었다.
황해도 배천온천에서 요양하던 중 만나 함께 서울로 내려와 다방을 차렸던 금홍은 날이 갈수록 술 취한 모습으로 담배를 물고 푸념을 늘어놓는 시간이 많아졌다. 손님들과의 염문도 끊이지 않았다. 이상은 이런 모습을 피해 남촌의 낙랑파라를 자주 찾았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쓴 박태원이 이상과 늘 만났던 곳도 낙랑파라였다.
낙랑파라는 1930년대 다방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상이 박태원의 신문 연재를 위해 그린 삽화 그리고 잡지 <삼천리> 1933년 10월 호에 실린 박옥화의 글에 낙랑파라의 모습이 남아 있다. 박옥화의 <인테리 청년 성공직업>에 보면 낙랑파라 입구에는 "남양에서 이식하여 온 듯이 녹취 흐르는 파초"가 놓여 있었고, 안에는 "슈베르트, 데도릿지 등의 예술가 사진"과 "좋은 데생"도 알맞게 걸려 있었다.
실내 분위기가 손님에게 안온한 심정을 주는 곳이 낙랑파라였다. 이상이 마음의 위안을 위해 찾을 만한 분위기였다. 커피 또한 위안의 음료였다는 것은 덤이었다. 바로 여기서 시인 이상이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기록상 처음으로 더치페이를 했다.
낙랑파라에서 이상을 처음 만나 친구가 된 시인 김소운이 훗날 회고한 바에 의하면 이상은 "희희낙락 담소하다가도 일어설 때는 제가 마신 찻값으로 10전 경화 하나를 테이블 위에 내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김소운은 이런 이상의 모습을 "도회적"이라고 표현하였고 이상을 "폐습을 탈피한 선각자"였다고 불렀다.
더치페이의 선각자 이상이 세운 제비다방은 2년 만인 1935년에 문을 닫았고, 잠시 잡지사에서 하던 일을 그만둔 이상은 1936년 여름 변동림과 결혼한 후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일본 도쿄로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찾던 새로움은 거기에도 없었다.
많은 사람이 일본에서 발견한 새로움 때문에 친일로 돌아서던 시절이었다. 오므라이스나 '돈가츠'도 그런 새로움의 하나였고, 일본식 도시 문화도 부러움의 하나였다. 그런데 이상은 오히려 일본 도쿄의 모습에서 경성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점을 발견하고 곧장 귀국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두 가지가 그의 귀국을 막았다. 일본 경찰이 그를 불령선인으로 분류하여 조사하기 시작한 것이 하나였고, 이런 일로 인해 악화된 폐결핵이 다른 하나였다. 그는 결국 도쿄대학교 병원에 입원하였다. 급히 현해탄을 건너온 아내에게 "멜론이 먹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일본,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알기 어려운 나라다. 믿고 친해야 할 이웃인지, 경계하고 경계해야 할 남인지. 분명한 것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쉽게 알기는 어려운 나라, 그래서 함부로 판단하기보다는 조심해야 할 나라다.
(유튜브 '커피히스토리' 운영자, 교육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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