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8일(현지시간) 프랑스 전역에서 제10차 연금개혁 반대시위가 열린 가운데 서부 낭트에서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로 자동차 한 대가 불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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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처음으로 노령연금이 법적으로 인정된 것은 전쟁 직후인 1946년이었다. 1월 1일부로 시행된 당시의 노령연금 수령 가능 연령은 65세. 그러다 1983년 미테랑 정부 들어 60세로 대폭 낮춰졌고 소득대체율은 50%였다. 37.5년을 납부한 65세 이상자는 최고 임금 기간 10년의 50%를 수령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노령층 증가와 청년층 감소 등 인구구성 비율이 달라지고 전 세계 신자유주의 광풍이 불면서 역대 정부는 연금제도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한마디로 덜 노동하는 방향에서 더 노동하는 방향 전환이 시작된 것이다. 미테랑 개혁 후 정확히 10년 만에 프랑스의 연금제도는 유턴하게 된다.
1993년 에두아르 발라뒤르 총리는 100% 연금을 수령할 수 있는 총 노동시간을 37.5년에서 40년으로 늘린다. 그리고 2012년 프랑수아 피용 총리는 이를 다시 41년으로, 2020년 에두아르 필립 총리는 42년으로, 점차 납입기간을 늘려왔다. 비슷한 시기 법정 은퇴 연령도 62세로 늘어났다.
현재의 프랑스 정부는 연금을 수령할 수 있는 총 노동시간, 즉 세금 납입 기간을 42년에서 43년으로, 수령 연령을 62세에서 64세로 늘리려 하고 있다. 결국 1980년대 이후 프랑스는 노령연금을 수령하기 위한 납입기간도, 수령 가능 연령도 일관되게 높여가고 있다. 그렇다면 프랑스인들이 분노하는 이유가 단지 과거에 비해 일을 더 하라는 요구 때문일까?
프랑스 국민들은 과거와 달라진 청년 대비 노년 인구의 비율을 알고 있다. 따라서 필요하다면 연금제도 개혁을 해야 한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정부의 개혁에 저항하는 이유는 연금제도 개혁의 진짜 이유가 연금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프랑스를 포함한 많은 국가의 재무 정책에 떠도는 유령, 그것은 연금 재정의 고갈 위험이다. 현재와 같은 연금 체계로는 조만간 곳간이 빌 것이라는 게 그 골자지만, 그와 관련한 어떤 이론도 모두를 납득시키지 못했다. 현재 프랑스의 재정 전문가들과 경제학자들 역시 서로를, 그리고 국민을 이해시키는 보편적 이론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보편적 민주주의의 위기

▲3일(현지시간) 프랑스 남동부 아비뇽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을 풍자한 아티스트 렉토의 그래피티가 그려져 있다. 아티스트 렉토는 마크롱 대통령이 헌법의 49조3항을 사용해 하원 표결을 건너뛰자 히틀러의 콧수염을 상징하듯 얼굴에 '49.3'을 그려 넣고 위에는 '아니오'(NON)라는 글씨를 새겨 정부의 연금 개혁안 통과를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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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프랑스 정부와 여당은 연금재정 고갈위험이라는 낡은 무기로 국민을 위협하고 있다. 노령연금 예산은 복지정책의 하나이고 복지정책은 국방예산과 같다. 그 자체에서 수입을 바랄 수 없고 그럼에도 국가의 존속을 위해 지출해야 하는 예산이다. 그런데 프랑스 정부는 반대로 연금 예산을 끌어다 다른 손실을 메우려 하는 것이다.
최근 한 방송에 출연한 마크롱 대통령은 연금개혁의 이유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그 사실을 시인했다. 지난 3월 22일 방송에서 그는 연금제도에 구조적 적자가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를 뒷받침할 이론적 근거가 빈약했기 때문일 게다.
대신 그는 연금예산을 절약해야 하는 이유로 팬데믹 기간 행해진 과다한 예산 지출을 말했다. 그리고 환경, 교육 정책 등에 필요한 예산을 나열했다. 타분야의 예산 확보를 위해 국민연금 예산을 전용(轉用)하겠다는 속내를 시인한 것이다.
국민들이 대통령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이유는 예산 부족을 말하면서도 꾸준히 대기업과 부유층에 대한 과세 즉 법인세와 부유세는 줄여왔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정부 여당은 고용을 북돋기 위함이라고 강변하지만 이것 역시 경제정책에 떠도는 또 하나의 유령이다. 어떠한 경제 이론도 법인세 인하가 고용을 늘린다는, 모두가 납득하는 입증을 내보이지 못했다.
마크롱 대통령과 지지자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유령을 앞세워 자신들의 신념을 거짓 이론으로 포장해 그에 동의하지 않는 다수의 국민들에게 수용하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극우 바리케이드를 인질 삼아서. 극우를 막아준 대가로 국민들로부터 백지 위임장을 받은 것으로 착각하는 듯하다.
급기야 프랑스 정부는 국회(하원) 표결 절차마저도 건너뛰었다. 프랑스 정부는 이 또한 헌법(49조3항)이 보장하는 민주주의 절차라고 항변하지만 역설적으로 민주주의의 위기는 바로 여기에 있다. 법 기술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법의 음지와 양지를 교묘히 이용해 민심에 반하는 것들을 합리화한다.
이는 프랑스뿐 아닌 많은 다수의 '제도적' 민주주의 국가, '법치' 민주주의 국가들이 당면하고 있는 보편적 민주주의의 위기다. 프랑스 국민들은 앞으로 4년을 더 이 권위주의와 싸워야 한다. 그들에게 행운을 빈다. 본 샹스(Bonne ch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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