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30 11:01최종 업데이트 23.03.30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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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 고구려대장간마을 전경 ⓒ 구리시


경기도 구리시에서 서울 광진구 쪽으로 달리다 보면 진행 방향 오른편에 그리 높지 않은 아차산이 있다. 이곳에 아주 특별한 고구려 유적지가 자리하고 있다. 도로변에 '고구려 대장간마을'이라는 표지판을 커다랗게 세워 놓아 외지인들도 쉽게 찾을 수 있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백제와 겨루던 고구려 군대의 전초 기지인 아차산 보루(堡壘)들이 바로 여기 있다. 보루는 현대의 우리나라 사정에 맞춰 보면 비무장지대 최전방 감시초소인 GP(Guard Post)나 일반 전방초소인 GOP(General Out Post)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남한 땅에 흔치 않은 고구려 군사 유적이라서 특별한 것도 있겠지만, 산꼭대기 보루에 딸린 대장간 흔적이 발굴되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큰 관심을 끌었다. 산속 군사기지에 대장간이라니 좀 생경한데, 그 전초에 근무하는 병사들의 무기를 손보고 무뎌진 창이나 칼날을 벼리던 시설이다. 요즘 개념으로 치면 부대마다 배치된 정비 시설 같은 거다. 

현대전에서도 탱크나 장갑차 등 첨단 장비가 많은 기계화 부대의 경우 정비부대는 사단 직할대로 삼아 각 단위 부대마다 따로 배속시켜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빠르게 대응하도록 한다. 이는 전투 현장에서 고장이 난 장비를 즉시 조치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다. 고구려 아차산의 보루 대장간이 바로 이 현장 조치를 위한 정비창이었던 거다.

아차산의 여러 보루 가운데 대장간 시설이 발굴된 곳은 '아차산 4보루'다. 다른 보루에도 대장간은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여기에서만 발굴되었다. 아차산 4보루는 발굴 전, 그러니까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군용 헬기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1500년 전 고구려군이나 대한민국 국방부나 아차산의 군사적 효용성을 보는 눈은 똑같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대장간 시설이 발굴된 '아차산 4보루'
 

아차산 고구려유적전시관에 전시 중인 아차산 4보루 모형. 보루를 지키는 병사들의 거주 시설이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보루의 오른쪽 맨 위 귀퉁이 흰색 표시가 붙은 부분이 간이 대장간 시설이다. 2023년 2월 28일. ⓒ 정진오


아차산 대장간마을에서 옛날 대장간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농기구며 각종 무기며 다양한 철제 도구들이 발굴되었는데, 그 장소를 쉽게 알리기 위해 대장간 마을이라고 이름을 붙인 거다. 구리시에서는 이곳에 작은 박물관인 전시관을 운영하고 있다. 1층과 2층 공간에 보루 모형을 갖추고 발굴 유물을 복제해서 보여주고 있다.

동아시아 최강의 철기 문화를 자랑하던 고구려. 그 대장간 문화가 고려로, 조선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경우 대장장이 같은 기술자들을 우대한 임금을 꼽으라면 세종과 정조를 들 수 있다. 여기서는 정조 시대를 살펴보자.

1795년 을묘년 윤2월, 임금 정조는 수원 화성(華城) 공사 현장에서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 잔치를 열었다. 이때 화성 축성에 동원된 기술자(장인)들도 푸짐한 상과 음식을 받았다. 상으로는 저마다 1~3등으로 차등을 두어 무명이나 베, 쌀 등을 내렸다. 

임금이 참석해 음식을 베푸는 '호궤(犒饋)'에서도 기술자들에게 수육과 술, 떡 등을 배불리 먹여 격려했다. 1794년 정월부터 1796년 9월까지 2년 반가량 이루어진 화성 공사 때 기술자들은 그야말로 호강했다.

정조는 기술자들의 건강까지 챙길 정도로 각별했다. 가장 더울 때와 가장 추울 때는 공사를 중단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름철에 더위 먹었거나 더위에 약해진 몸의 기운을 돋우는 데 쓰라고 약을 주기도 했고, 겨울에는 털모자와 무명을 개개인에게 보급했다. 

호궤도 공사 기간에 총 11회나 펼쳤다고 하니, 2~3개월에 한 번씩은 임금이 직접 일꾼들을 모아 놓고 음식을 내린 셈이다. 그 옛날 임금과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 그야말로 없던 힘도 솟구치게 만드는 마법 같은 역할을 했을 터이다.

임금이 친히 나서서 기술자들을 격려하니 그 밑의 신하들은 어떠했겠는가. 임금의 진한 기술자 사랑이 있었기에 화성은 조선시대 성곽 건축의 꽃으로 평가받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됐는지도 모르겠다.

조선시대 대장장이 일당이 목수보다 두 배 이상 
   

2022년 4월 8일 경기도 수원시 세계문화유산 화성(華城)을 찾은 시민들이 벚꽃이 활짝 핀 성곽길을 걷고 있다. ⓒ 연합뉴스


김동욱 경기대 교수가 펴낸 <실학 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수원 화성>에 따르면, 화성을 짓는 데에는 석수(石手), 목수(木手) 등 22개 직종에 총 1840명의 기술자가 투입되었다. 여기엔 당연히 대장장이 야장(冶匠)도 포함되었다. 

돌로 된 성을 쌓는데 무슨 쇠를 다루는 대장장이가 들어가느냐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화성은 성벽 대부분을 돌이나 벽돌로 쌓기는 했지만, 신도시로 만들다 보니 목조 건물이 유난히 많았다. 장안문, 팔달문 등의 문루(門樓)와 동포루를 포함한 다섯 곳의 포루(砲樓), 그리고 행궁 등 목조 건축물에는 철물이 필수적으로 들어가게 마련이다.

화성 축성 현장에서 대장장이는 기술자 중에서도 꽤 높은 일당을 받았다. 돌을 다루는 석수가 매일 쌀 6승(升)에 전(錢) 4전5푼을, 대장장이는 매일 8전9푼을 받았다. 목수는 하루에 4전2푼씩을 받았다. 당시 쌀 6되 값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어 대장장이와 석수의 일당을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대장장이가 목수보다 두 배 이상 더 받았음은 확연하다.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대장장이들이 제대로 된 대접을 받았을 때 나라는 흥했고, 그렇지 못했을 때 나라는 어려웠다. 우리 민족의 흥망성쇠를 따지는 키워드를 고른다면 그중에 대장장이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이다. 대장장이는 특히 무기 제조와 관련해서는 가장 우월한 존재였다. 그 대장장이가 사회적으로 천대받는데 국방이 튼튼할 리 없고, 과학기술이 발전할 수 없는 건 자명하다.

조선시대의 기술직인 공장(工匠)들은 표면적으로는 무척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대장장이인 야장(冶匠)을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장인들이 어느 기관, 어느 지방에 몇 명씩 배치되어야 한다는 규정이 당시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에 실려 있을 정도다. <경국대전>은 조선 개국 직후부터 시행한 각종 법령을 정리하기 시작해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 1485년 완성하였다.

'경공장(京工匠)'이라고 하여 서울의 장인들을 따로 관리했으며, 서울을 제외한 전국 각지의 장인들은 '외공장(外工匠)'이라 칭했다. 경공장은 2800명 정도 되었고, 외공장은 3450명가량 되었다. 이들을 직종별로 나누면 총 137개 종류였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대부분 무슨 무슨 장(匠)으로 불렀는데, 활을 만드는 궁인(弓人), 화살을 만드는 시인(矢人)만 '장(匠)' 자를 쓰지 않고 '인(人)' 자를 붙였다. 

이는 활이나 화살 만드는 사람을 다른 장인에 비해 높이 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활시위를 만드는 이는 '궁현장(弓弦匠)'이라 했다. 활이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활과 화살 이외에도 활시위가 꼭 필요한데 셋 중에 누구는 '사람 인(人)' 자를 쓰고, 누구는 '장인 장(匠)' 자를 써서 그 차등을 둔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

대장장이의 호적인 '장적(匠籍)'으로 관리
 

조선시대 통치 법전인 <경국대전>번역편과 주석편. 대장장이를 비롯한 장인들의 종류와 배치 숫자까지 이 법전에 명시해 놓았다. 오른쪽이 한문 문장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고, 왼쪽이 어려운 개념이나 사항을 알기 쉽게 설명한 주석편이다. <경국대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를 함께 읽어야 한다. ⓒ 정진오

 
여기서 대장장이(冶匠)와 관련해 주목할 대목은, 서울 이외의 외공장 가운데 대장장이의 경우 그 전문성과 항상성을 특별히 인정했다는 점이다. 대장장이를 제외한 다른 장인들은 농업에 종사하면서 동시에 장인을 겸해야 했는데 대장장이는 농사를 짓지 않고 쇠 불리는 일에만 전념했다. 장인들은 호적(戶籍)처럼 '장적(匠籍)'이란 문서를 만들어 관리했다.

조선시대 최고 권위의 법전인 <경국대전> 속에 각 기관이나 지방별로 137종이나 되는 장인의 종류와 총 숫자를 정해 놓고, 일일이 장적(匠籍)에 넣어 관리하던 전통은 고려시대에도 시행하던 방식이었다. <경국대전>의 기술자 관련 내용을 보면 고려의 것을 그대로 따온 듯하다.

고려시대 관리를 지낸 최사위(崔士威, 961~1041)의 묘지명에 전국 장인들의 명단을 작성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가 펴낸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에 실린 최사위의 묘지명에 따르면, 1010년 거란 침략 때 왕도인 개경에 보관하고 있던 백공(百工, 각종 장인)에 관한 모든 문서가 불타 없어졌다. 

개경 왕궁을 회복한 뒤 최사위가 임금의 허락을 받아 백공의 문서를 다시 작성하는 일을 주관했다. 최사위는 중앙과 지방으로 나누어 공장(工匠)들의 성명을 적은 호적을 만들어 각 관청에 배포했다. 이 작업에 5년이나 걸렸다.

고려시대 장인들의 관리 문서가 조선의 <경국대전>에 적힌 대로 중앙과 지방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불타버린 것을 새롭게 작성하는 데 5년이나 걸릴 정도로 그 숫자도 많았다. 이때가 고려 초기인 점을 생각한다면 전국의 모든 장인을 호적처럼 문서로 기록해 꼼꼼하게 관리하던 규정은 고려 이전인 고구려나 신라, 백제 때부터 전해오던 것일 수도 있다.

고려 장인들의 기술 수준을 엿볼 수 있는 해외의 평가 기록도 남아 있다. 송나라 사신 서긍(1091~1153)이 고려를 방문해 보고 느낀 바를 적어 송나라 왕 휘종에게 올린 『고려도경』에는 '고려 장인의 기술은 매우 정교하여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이는 모두 관아(公)에 귀속된다'는 구절이 있다. 중국의 관료가 당시 고려 장인들의 기술력이 꽤 높다고 인정한 거다.

역모사건에 연루된 대장장이도 있어
 

아차산 4보루 발굴 현장에서 드러난 간이 대장간 모습. 여기에서 각종 철제 도구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차산 고구려유적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 정진오

 

아차산 4보루에서 출토된 철제 투구 모습. 가운데 둥그런 부분은 머리 위에 쓰는 것이고, 그 옆에 날개처럼 펼쳐져 있는 것들은 가느다란 쇠줄로 연결해 목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 정진오

     
대장장이가 엉뚱하게 역모사건에 연루돼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광해군이 즉위하던 시기,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1574~1609) 역모사건이 일어났다. 여기에 대장장이들이 얽혀들었다. 역모가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집권세력이 꾸며낸 것인지 그 실체적 진실을 알 수는 없지만, 당시 사건은 임해군이 철퇴와 환도 등을 마련해 놓고 실력자들과 결탁해 왕권을 노렸다는 데로 맞추어졌다. 

이 과정에서 애꿎게도 몇몇 대장장이들이 연루되었다. 대표적인 게 야장(冶匠) 조명환이다. 조명환은 혹독한 고문이 가해지는 심문에서 임해군의 요청으로 말발굽과 못, 자물쇠 등의 철물을 만들어 주었을 뿐 무기 제작에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일관되게 진술했다. 그러나 조명환은 여러 차례의 가혹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죽고 말았다. 이 내용은 조선시대 중죄인 심문 기록인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번역)에 자세히 나와 있다.

대장장이들이 직접 나서서 시장을 개설하는 일도 있었다. 1732년 영조 8년에 당시 야장(冶匠)들이 모여서 파철전(破鐵廛)을 창설했다. 영조 임금은 대장장이들의 파철전을 비롯한 시장에서 일어나는 온갖 문제점을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이는 상인들의 요구사항을 비변사가 듣고 그 답변을 정리한 내용에 영조의 관심이 컸다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이를 기록한 게 <시폐(市弊)>라는 책으로 엮였다.

<시폐(市弊)>에 적힌 사례 하나만 꼽아 보자. 시장을 낸 야장들이 조정에 철물인 가랫날 10개를 납품해야 한다면, 거둬들이는 관리(員役輩)들은 그 두 배인 20개를 받아갔다. 더 납품한 10개에 대한 값은 1~2년이 지나도 그저 반 정도만 받을 뿐이었다. 야장들이 이런 문제점을 호소하자 비변사에서는 관원과 하인배의 죄를 따져 다스리라고 명했다. 대장장이들의 이런 호소와 비변사의 대응에 임금 영조는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영조나 정조 때처럼 기술자나 상인들이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체계 속에서도 그나마 더 낫게 대우받던 호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정조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 뒤로 조선은 쇠퇴했고, 열강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안확 "공업의 쇠퇴는 국가의 쇠락으로 이어진다"
 

아차산 4보루 발굴 현장에서 출토된 등자와 재갈 모습. 말 위에 앉아 발을 걸치는 등자와 말을 마음대로 움직이게 하는 재갈은 말을 다루는 데 있어서 필수 장비다. 당시 기병들은 아차산 보루가 있는 산꼭대기까지 말을 타고 다녔음을 알 수 있다. ⓒ 정진오

 

아차산 4보루 발굴 과정에서 나온 철제 도끼. 무기로도 쓰이고 나무를 자르는 용도로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정진오

  
국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안확(安廓, 1886~1946)은 1923년 저술한 <조선문명사>에서 "관리들의 탐욕과 침탈로 인하여 공업이 크게 쇠락하고 말았으니, 아! 쇠락한 때의 정치에 대해서는 차마 말조차 할 수가 없도다"라고 조선 후기 정치 경제적 타락상을 한마디로 꼬집었다.

안확은 이 책에서 조선 말기 서울의 각 관청과 공장에 연계된 기술자의 숫자가 3012명이라고 밝혔다. 또 서울 이외 지역에서 일하는 공장적(工匠籍)에 적혀 있는 기술자 수는 총 3502명이라고 했다. 안확이 적시한 전국 팔도의 장인 숫자가 흥미롭다. 

경상도가 1129명으로 가장 많았고 전라도가 771명, 충청도 614명, 강원도 224명, 황해도 221명, 평안도 214명, 함경도 176명, 경기도 153명 등이었다. 안확이 통계를 잡았던 시점보다 400년이나 빨리 쓰인 <경국대전>에 나오는 서울 2800여 명, 지방 3450명과 비교하면 서울이 200여 명 늘었을 뿐 지방은 큰 차이가 없다.

공업의 쇠퇴는 국가의 쇠락으로 이어진다는 안확의 지적은 그보다 앞선 19세기 후반 조선이 기울어 갈 때 외국인들의 눈에도 그대로 비쳤다. 러시아 군인들이 1896년 초 조선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쓴 『내가 본 조선, 조선인』에 서울의 망가진 대장간 모습이 잡힌다. 

이 책에 보면, 러시아 장교들은 서울을 구경하다가 궁궐 근처 공장에 들렀다. 그 공장의 한 건물에는 소총과 탄약을 만드는 작업대 24개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이를 돌릴 수 있는 발동기가 움직이지 않아 무기 생산 라인 전체가 멈춰 서 있었다. 다른 건물에는 고장 난 대장간 난로만이 있을 뿐 공장은 텅 비어 있었다. 러시아인들이 보았던 대로, 조선은 대장간의 불을 꺼뜨린 지 불과 10여 년 만에 국권을 강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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