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망명생활 중 일본인 후원자 스나가 하지메(須永元)와 함께(오른쪽에 앉은 이가 박영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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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그렇게 한 것은 고종이 좋아져서가 아니었다. 고종 퇴위에 앞장선 인물이 바로 이완용이기 때문이었다. 샌프란시스코 교포들로 구성된 공립협회가 발행한 그달 30일 자 <공립신문> 2면에 따르면, 경무청에서 조사받을 때 그는 '이완용은 역적'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박영효 편은 "1907년 7월 조선과 일본 양국인의 친목을 도모하여 조선에 부식(扶植)할 목적으로 한일동지회를 조직해 회장에 선출되었다"라고 설명한다. 1905년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으로 외교권이 넘어가는 것을 보고서도 일본과의 친목을 위해 한일동지회를 조직했던 것이다.
이처럼 '처가 망하라'며 친일 행보를 보였던 그가 고종 퇴위를 반대한 것은 이완용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의 윤해동 기고문은 "이는 이완용과의 갈등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을사늑약을 계기로 이토 히로부미의 최고 파트너가 된 이완용과의 갈등 관계가 배경에 있었던 것이다.
박영효는 이완용 등에 대한 암살 미수로 1년간 제주에 유배됐지만, 얼마 뒤 복귀해 친일 행보에 속도를 냈다. 이 과정에서 '레드 라인'을 벗어나기도 했다. <친일인명사전>은 "1909년 6월 신궁봉경회 설립과 함께 총재에 선임"된 일을 소개한다. 한민족의 조상인 단군왕검, 조선왕실의 시조인 태조 이성계, 일본 왕실의 시조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함께 숭배하는 단체의 총재가 된 것이다.
단군과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함께 숭배하는 것도 문제지만, 처가의 시조인 이성계를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함께 받드는 것도 문제였다. 처가에 대한 도전적 의식이 이런 데로도 발현됐다고 볼 수 있다.
일본에 이완용보다 더 필요했던 사람
일본은 그런 박영효를 우호적 인물로 평가했다. 이완용 때문에 잠시 '탈선'했던 그를 관대하게 대했다. 일본은 그의 위상을 이완용보다 높게 설정했다. 1910년 한국 강점 뒤에 이완용에게는 백작 작위를 줬다가 1920년에 후작으로 높인 데 비해, 박영효에게는 처음부터 후작 작위를 부여했다.
또 1911년에 이완용에게는 은사공채 15만 원어치를 준 데 비해, 박영효에게는 28만 원어치를 줬다. 이들은 은행에 예금되는 이 돈의 이자를 받아 곳간에 채웠다. 1910년부터 1921년까지 평안도와 경기도에서 군수로 부역한 친일파 김연상(1878~1924)이 1910년에 받은 월급은 50원이다. 이완용에게는 이 월급의 3000배, 박영효에게는 5600배가 일왕 하사금으로 주어졌던 것이다.
일본이 볼 때 한국 강점 이전에는 이완용이 더 필요했어도, 그 후에는 박영효가 더 필요했다. 대한제국을 값싸게 넘겨받는 데는 매국노 이완용의 역할이 절실했지만, 일단 넘겨받은 뒤에는 한국 민심을 억누르는 게 급선무였다. 왕실 일원인 박영효가 자신들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선전하는 것이 일본에 더 유용했다. 고종의 친형인 이재면에게 은사공채 83만 원을 준 데에도 그런 판단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작위와 은사공채로 박영효를 이완용보다 위에 놓은 일본은 두 사람의 강점을 활용해 식민지 한국을 지배해 나갔다. 김윤희 경원대 연구교수의 <이완용 평전>은 "박영효는 오랜 망명 생활로 국내 정치기반이 약했지만, 고종의 폐위를 반대했던 전력으로 인해 조선인에게 이미지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라면서 "이완용은 을사조약 이후 매국의 상징으로 송병준과 나란히 비교될 정도로 세간의 혹평을 받고 있었지만, 정치 기반이 탄탄했고 전직 고위 관료들과도 두터운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라고 비교한다.
박영효는 조선귀족회장이 되고, 이완용은 중추원 부의장이 됐다. 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의장직은 총독부 정무총감이 겸했기 때문에, 중추원 부의장은 한국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이었다.
일제는 이 둘을 앞세워 한국인 특권층의 지지를 끌어내려 했다. <이완용 평전>은 "조선귀족원 의장 박영효와 중추원 부의장 이완용을 구심으로 조선 귀족을 포함한 조선인 상층의 결집이 다시 시작"됐다고 서술한다.
1907년 고종 퇴위 때만 해도 박영효와 이완용은 대립 관계였다. 그랬던 것이 조선귀족회가 창립된 1911년부터 달라졌다. 위 책은 "이완용과 박영효는 조선귀족회 활동 과정에서 친밀한 관계로 돌아섰다"고 설명한다. 조선귀족회장 직과 중추원 부의장 직을 분점해 상호보완 관계가 되면서 두 친일파가 우호적이 됐던 것이다.
▲박영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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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과 함께 핵심 부역자 지위에 오른 박영효는 일제하에서 안정적으로 친일 재산을 축적했다. 1913년에는 조선무역회사를 설립하고, 1918년에는 경제침략 기관인 조선식산은행의 이사가 됐다.
그런 후광에 힘입어 1919년에는 경성방직 사장도 되고 1920년에는 동아일보사 사장도 됐다. 1921년부터 5년간은 중추원 고문으로 일하며 연봉 3000원을 받았고, 1926년부터 1939년 사망 시까지는 중추원 부의장으로 일하며 연봉 3500원을 받았다. 1932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일본제국의회 귀족원의 칙선의원(勅選議員)에 임명됐다.
친일재산을 축적하는 가운데, 그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침략전쟁을 응원하는 데도 적극성을 보였다. 1937년 9월에는 국방비 500원을 헌납했다. 1939년 2월에는 경성부 육군지원병지원자후원회 고문이 됐다. 4월에는 조선군사후원회연맹에 1200원이 넘는 금비녀 등을 기부하고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고문이 됐다.
처가가 존속하는 동안 박영효는 불안정했다. 처가를 상대로 정변을 자주 일으켰고 망명 생활도 오랫동안 했다. 그러다가 막판에는 처가를 무너트리려는 이토 히로부미와 손잡았다.
그랬던 그가 49세 때인 1910년에 처가가 무너진 뒤로는 더 이상 반역을 시도하지 않았다. 이완용과도 사이좋게 지냈다. <친일인명사전>은 "1939년 9월 21일 사망했다"라며 "욱일대수장이 추서되었다"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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