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출근길에 바라본 공사장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다.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은 바로 옆이다.
나재필
"청춘에게 고하노니 방황하지 마라. 직업의 귀함과 천함은 사람들의 시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 달려있다. 나와 직업 궁합이 맞으면 그게 천직이다. 이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꿈꾸는 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니 장밋빛 청사진만 꿈꾸지 말고 지금 당장 칩거하고 있는 방을 박차라.
길은 있다. 가끔은 울퉁불퉁하지만 그래도 그 길은 가볼 만하다. 지름길만 찾다 보면 되레 오르막길만 보이게 된다. 살다 보면 정신에도 근육이 붙는다. 난 팔 힘만 있으면 피 튀기는 현장 속에서 버티고, 감내하면서 하루를 맞을 것이다. 설령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가 잠시 파열돼도 말이다."
1987년 캠퍼스는 최루탄과 화염병, 그리고 포악무도한 군사독재 정부의 서슬 퍼런 압재가 밤이슬을 적시고 있었다. 당시 나는 투사가 아니라 들러리에 가까웠다. 민주화운동의 변방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고 유혈이 낭자한 거리에서 막걸리에 취해있었다. 자본주의가 싫었지만, 사회주의에도 경도되지 않았다. 짝사랑마저 좌절되자 꿈은 시들었다. 그 꿈을 이룰 희망이란 애초부터 없었다. 그때 도피처가 군대였고 3년을 세상으로부터 도망 다녔다.
1994년 대학을 무사히 졸업했을 때, 백수의 어두운 그림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1년을 영화 시나리오 공부를 하며 소일했다. 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기본기가 없었는지 이력서를 83곳에 냈으나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물론 낙방의 이유는 83가지가 넘었다. 신문방송학을 전공했는데 이력서를 낸 곳이 대부분 이공계였다.
이후 번지수를 제대로 찾아 지방의 한 신문사에 입사했다. 기자의 길은 결코 원하던 바가 아니었다. 영화 쪽 일을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이란 늘 예측한 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비껴가면서 시험대에 세우곤 한다. 그렇게 시작된 기자 생활은 1년, 5년을 넘어 30년 가까이 총알처럼 흘러갔다.
나는 '기자'로 살지 않고 '직장인'으로 살았다. 정말 치열했다. 1년 차, 3년 차, 6년 차, 9년 차 등 '3의 배수'로 위기가 찾아왔는데 그때마다 용케도 버틸 거리가 생겼다. 아기가 태어났고, 전셋집을 구했으며, 승진했다. 15년 차가 됐을 때 난 편집국 간부가 돼 있었고, 논설위원까지 겸직했다. 취재와 편집은 물론 사설과 칼럼을 썼고 심지어 광고 관리에도 한발 담갔다.
회장과 사장단 앞에서 회사 발전에 대한 프레젠테이션(PPT)하느라 수시로 불려 갔고, 사장의 각종 행사 연설문 작성도 남몰래 전담했다. 몸은 한 개인데 일곱 가지 업무를 하다 보니 폭음도 함께 늘어났다. 그러나 불평불만을 하지 않았다. 기자의 일은 누가 시켜서 한 게 아니라 내가 선택한 것이었다.
주말, 휴일은 물론 여름휴가까지 반납하면서도 난 일에 빠져들었다. 내가 없으면 신문사가 망한다는 착각으로 온몸을 바쳐 일하는 '회사 인간'이었다. 어쩌면 일을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노가다'처럼 했다. 문제는 정신적인 노동이 육체를 좀먹는다는 거였다. 흔히들 육체노동이 정신을 지배한다고 여기지만, 실상은 정신과 육체는 합일(合一)된다. 둘 중 하나가 무너지면 둘 다 무너진다.
결국 정신과 전문의도 만났다. 알약 한 움큼씩을 입에 털어 넣어야 머릿속에서 소리가 나지 않았다. 아내는 자세히 묻지 않았으나 눈물로 현실을 증명했다. 난 스스로 열정이라고 변명했지만, 실은 정신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는 매스컴과 인터넷, SNS상에서 기자들을 '기레기(기자와 쓰레기를 합친 말)'라고 손가락질하는 장삼이사들을 '반은 이해하고, 반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설령 기레기는 있어도 모두가 기레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히 짚고 넘어갈 것은 대부분의 기레기는 언론사 경영진들이 만드는 종족이다. 기사 쓰는 본분을 잊게 하고, 돈 벌어오는 세일즈맨으로 전락시키는 장본인은 사주다. 그들은 '월급 받으려면 월급보다 더 벌어오라'는 지상명령을 내린다. 나 또한 그런 생태계를 수도 없이 목도했다. 돈 벌어오는 기자는 승승장구하고, 기사 잘 쓰는 기자는 멸족하는 행태가 기레기 사육장을 만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취직한 다음 착실하게 일한 결과 과장, 부장, 사장, 회장이 된 다음 하나 더 올라가니 송장이 되더라는 우스개가 있다. 나 또한 기자생활 27년 동안 편집국장, 논설위원까지 지내며 정점을 찍었으나 남은 건 송장 같은 육신이었다. 어느 날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정글을 떠났다.
노가다는 부끄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