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13 19:55최종 업데이트 23.03.13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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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28일 박진 외교장관이 외교부에서 열린 인도-태평양 전략 설명회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정부는 이날 인태전략 최종보고서를 발표했다. ⓒ 연합뉴스


작년 말 윤석열 정부는 이른바 '인도-태평양 전략'을 발표했다. 한국 최초의 글로벌 외교전략인 만큼 국제적으로도 관심을 끌었다. 자유, 민주주의, 법치, 인권 등과 같은 "보편적 가치에 기초한 규칙 기반 질서를 강화"하며 "국제규범을 수호"한다는 것이 핵심내용이다.

물론 혼자가 아니라 이런 가치들을 공유하는 국가들과 함께한다고 한다. 특히 유럽 주요 국가들과의 '가치외교 파트너십'을 강조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유럽국가들도 최근 대외정책 전략문서에서 한국을 중요한 가치 파트너로 주목한다.


당연한 일이다. 중국, 러시아, 북한 등 소위 권위주의 체제 국가들이 점점 더 규칙 기반의 국제 질서에 도전하고 있는 상황인데, 한국은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발전에서도 돋보이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즉, 소위 서방 동맹국들은 동아시아에서 한국이 일본과 함께 자유민주주의 원칙과 규범에 입각한 가치기반 다자주의를 지키는 중심적인 역할을 해줄 수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이러한 기대에 걸맞게 윤석열 정부는 '글로벌 중추 국가'와 '모범 민주주의 국가'로 자처하기도 했다. 사실 윤 대통령은 이미 2021년 대선 초기부터 자유주의, 민주주의, 법치주의 등을 주술사가 귀신을 쫓을 때 주문을 외듯이 되풀이하여 낭송하곤 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이 막상 지난 한 해 동안 국정을 어떻게 이끌어 왔는지 보면 그의 말과 행동 사이에 상당한 괴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언론의 자유에 관한 사례가 그렇다. 윤 대통령은 작년 미국 국빈방문 때 비속어 논란을 최초로 보도한 MBC를 '악의적 행태'와 '가짜 뉴스'라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 뿐 아니라 다음 국빈방문 때 MBC 기자를 대통령 전용기 탑승에서 배제했다. 이에 국제기자연맹(IFJ)은 언론의 자유 침해라 비판했다. 그 전에 국민의힘이 자막조작을 했다며 MBC를 형사 고발했을 때도 역시 IFJ가 언론의 자유를 위협하는 위험한 선례라고 규탄한 적이 있다.

이렇게 국제사회로부터 두 번이나 날카로운 지적을 받았는데도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외교부는 해당 보도에 대해 사실관계 정정을 요구하며 MBC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언론의 자유보다 '정권의 자의'가 더 세보이는 대목이다.

사면은 자기 진영 결집시키려는 계략
 

지난해 12월 30일 윤석열 대통령의 신년 특별사면으로 사면복권된 이명박 전 대통령이 그동안 지내던 서울대병원을 퇴원해 서울 강남구 논현동 자택으로 귀가하며 취재진에 둘러싸여 질문을 받고 있다. ⓒ 권우성

 
역시 헌법에 명문화된 '근로의 권리'에 대한 정부의 태도에서도 이런 자의가 발견된다. 작년 말 화물연대 파업 때 윤 대통령은 색출·징벌하듯이 노동자들을 위협했다. 노동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모든 행정력을 동원해 끝까지 추적하고 신속 엄정하게 조치"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러자 유엔 국제노동기구(ILO)가 윤 대통령이 노동자들의 결사의 자유를 침해했다며 우려를 표명했다. 하지만 역시 소용없었다. 윤 대통령은 마치 상습범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건설노동자들을 싸잡아 '건폭'으로 지칭하며 일방적으로 몰아세웠다.

모두 현 정부의 노동에 대한 일그러진 인식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즉,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 애호가인 윤 대통령은 '경제의 민주화'와 '기업의 경제 자유' 중 후자만을 선택한 셈이다.

작년 말에 부정부패 등 중범죄에 대해 유죄판결을 받은 전직 공무원을 포함한 1300여 명의 사람들을 사면한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즉, 거친 언행으로 권리를 찾는 노동자들을 적대시하며 죄인 취급하는 것과 반대로 명명백백한 중범죄자들의 처벌을 대거 면제해줬다. 터무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대규모 사면은 어느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다. 윤 대통령 본인이 검사 시절에 감옥에 보낸 이명박 전 대통령을 다시 풀어준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그것도 모자라 이명박 정부 시절 고위 관료들도 사면시켰고, 심지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과 유죄판결의 사유가 된 국정농단에 연루된 핵심 관리들도 사면시켰다.

사면 근거로 정부는 "화해와 포용을 통한 국민통합", "우리 사회의 대립과 갈등 해소" 등을 들었다. 하지만 당시 이명박 특별사면에 다수가 반대한다는 여론조사로 미뤄보면 통합보다 오히려 국론분열을 부채질한 것으로 보인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자기진영을 집결시키려는 뻔한 계략이다. 정치공학에 따라 사면권을 남용했다면, 즉 '법에 의한 통치'를 자의적으로 했다면 문제가 정말 심각하다.

윤 대통령 본인이 그렇게 중요시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도 분명히 자의적 지배를 배제한다. 자의적 지배란 법치주의의 침식을 의미하고, 이는 형평성과 공정성 외에 성숙한 민주주의 정치문화로 직결되는 정의에도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중범죄를 저지른 전두환·노태우와 박근혜에 이어 이명박 전 대통령까지 일관되게 별 다른 정당성 없이 함부로 사면해버렸다. 이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본 민주주의 상식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처럼 과거를 의식적이고 비판적으로 성찰하지 않으면 화를 키울 수 있다.

현 정부의 역사에 대한 망각은 중범죄자에만 한하지 않고 과거 국가폭력에 대한 인식에서도 드러난다. 물론 윤 대통령이 선거운동 때 약속한 대로 작년 5·18 행사를 앞두고 여당 인사들은 5·18 단체를 미리 만났고, 윤 대통령 본인은 기념행사에 공식 참석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소리까지 내어 불렀다.

겉으로는 보수 대통령으로서 굉장히 진전된 모습을 보인 듯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의 5·18 추념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전 보수 대통령들의 자세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쉽게 깨닫게 된다. 왜냐 하면 그도 광주 학살 가해자들과 그 비극의 과정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또 5·18 정신은 언급했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 부연 설명하지 않고 엉뚱하게 '자유민주주의' 타령만 갖다 붙였기 때문이다.

얼마 전 논란이 됐던 특전사동지회와 일부 5·18 단체의 '화해 대국민선언식'이라는 퍼포먼스도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원인과 책임에 대한 별다른 반성과 노력 없이 과거를 쉽게 뒤로 하고 앞만 보려는 태도는 시민단체도 그렇지만 특히 정부로서는 무책임한 태도이다.

과거의 국가폭력 사실을 반복적으로 왜곡하거나 은폐한 것도 모자라 가해 외세에 대한 태도조차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은 놀라울 수밖에 없다. 올해 3·1절 축사에서 윤 대통령은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문제나 과거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해 언급하는 대신 "조선이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고 말해 논란이 되고 있다. 마치 가해자의 악행보다 조선인들이 잘못함으로써 스스로 피해를 자초했다는 듯한 발언이다.

일제강점기에 대한 윤 대통령의 기이한 역사의식도 역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작년부터 박정희와 박근혜의 전통(?)에 이어 비슷한 수법으로 윤 정부도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를 왜곡하고 있다. 한국 대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한국 재단이 일본의 전범기업을 대신하여 배상금을 지급하도록 하겠다고 하니 어처구니가 없다.

민주주의 지수 8계단 떨어져
 

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중구 유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제104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정부는 한인 징용 노동자들이 착취당한 사도광산을 일본이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하려는 것에는 완강하게 반대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의 행태와 그 유산에 대해서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쯤 되면 해외에서는 일제 강점기와 전범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응에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어두운 과거를 제대로 평가∙정리하기 위해 설립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의 2기 위원장에 윤 정부가 앉힌 인물은 납득할 수 없다. 그는 과거에 진실화해위원회를 폄훼하고, 4·3과 5·18을 왜곡하는 취지의 주장을 했으며, 10월유신을 찬양하는 취지의 발언을 공개적으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부러 뻐꾸기 알을 둥지에 넣은 것 같다는 의구심이 들게 한다. 야당은 여야에서 각각 제안한 진실화해위원회 2기의 위원 중에도 역시 부적절한 인물이 있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현 정부는 자유주의, 민주주의, 법치주의 등을 밥 먹듯 선전하면서도 실질적인 국정 운영은 이러한 보편적 가치들과 자주 어긋난다. 그러나 견제와 균형의 역할을 해야 할 야당도 제 역할을 못 하고, 비방과 정쟁에만 몰두하는 일그러진 행태를 과시(?)해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현 정부가 한국 민주주의 퇴행의 주범처럼 보여도, 실은 윤 대통령의 '개인기'만이 아니라, 두 거대 정당 카르텔의 '합작' 탓으로 보인다.

마침 영국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은 올해 초 발표한 '2022 민주주의 지수 (Democracy Index 2022)' 보고서에서 바로 이 문제를 정확하게 짚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민주주의 지수는 1년 사이에 무려 8계단 하락했다.

"정치인들이 합의를 모색하고 시민의 삶을 개선하는 것보다는 정적들을 제거하는 데에 정치적 에너지를 쏟는" 한국 정치문화의 타락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불과 몇 년 전 박근혜 탄핵을 이끌어낸 촛불시민들이 독일 에버트재단의 국제 인권상을 수여받고, 성숙한 민주주의 문화라고 찬사를 받은 것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물론 지구상에 완벽한 민주주의는 없고, 민주주의의 점증적 침식이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시작될지 알 수 없다. 민주주의가 정확하게 언제쯤 무너질지, 아니면 건재할지 또한 단정하기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의 질적 쇠퇴라는 위험을 방관하면 결코 안 된다. 호모부가(毫毛斧柯)라는 말처럼 화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전에 대응해야 한다. 특히, 국제무대에서 큰 소리로 '글로벌 중추 국가'와 '모범 민주주의 국가'로 보편적 가치외교 파트너라고 자처하려면 더욱 그렇다.

* 이 글은 모두 필자가 한글로 작성했으며 편집자가 약간의 교정·교열만 했음을 밝힙니다.
 

하네스 모슬러 / 뒤스부르크-에센대학교 교수(소셜 코리아 운영위원) ⓒ 하네스 모슬러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하네스 모슬러는 뒤스부르크-에센대학교 (University of Duisburg-Essen) 정치학과와 동아시아연구소(IN-EAST) 교수이며, <소셜 코리아> 운영위원입니다. 관심 분야는 한국정치와 사회이고 최근의 연구주제는 선거제도, 개헌, 기억의 정치, 시민교육, 포퓰리즘 등입니다. 최근 저서로는 <Politics of Memory in Korea>(편저), <South Korea's Democracy Challenge>(편저), <The Quality of Democracy in Korea>(공편저) 등이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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