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토믹 블론드> 오프닝에서 주인공 로레인은 얼음이 가득 찬 욕조 안에서 몸을 일으킨다.
씨네그루(주)키다리이엔티
갑자기 찬물 샤워에 관한 호기심이 싹튼 건 샬리즈 세런(샤를리즈 테론) 주연의 영화 <아토믹 블론드>를 본 직후였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주인공은 얼음이 가득 찬 욕조 안에서 몸을 일으켰다. 카메라가 근육으로 갈라진 주인공의 등을 오래 비추었다. 푸른색 필터를 써서 촬영한, 차갑고 건조한 분위기의 영상을 보고 있자니 내 몸이 다 얼어붙는 것 같았다.
주인공 로레인은 왜 얼음물 속에 누워 있었을까. 눈가를 물들인 커다란 멍과 온몸의 상처는 그가 간밤에 험난한 작전을 수행했음을 짐작게 한다.
운동선수들도 격렬한 훈련이나 경기 후에 다친 근육을 빠르게 회복하기 위해 냉동고나 다름없는 차가운 탱크 안에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니까 그는 얼음물 속에서 지친 몸을 회복하는 중이었다.
알고 보니 영화 속의 찬물 샤워를 일컫는 용어가 따로 있었다. 최소 1분 이상 찬물로 씻는 걸 일컬어서 '스코틀랜드식 샤워'라고 부르는데 이 샤워법은 007소설 시리즈에 자주 등장한다. 그래서 '제임스 본드 샤워'라고도 부른다.
<아토믹 블론드>의 로레인은 여자 제임스 본드다. 그는 혼란과 고독 속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매력적인 여성 정보원과 특별한 방식으로 접선한다. 얼음물 속에 누워 있던 오프닝은 모두 계산된 연출이었던 거다.
그런데 다친 근육을 빠르게 회복하는 것 외에도 제임스 본드 샤워의 특별한 효능이 또 있다. 바로 중독적일 정도로 기분이 좋다는 거다. 그 옛날에 들은 체 만 체했던 그 코치의 말이 사실이었다.
못 말리는 호기심이 발동한 건 그때부터였다. 단지 찬물로 씻기만 해도 정말 기분이 좋아질까, 얼마나? 찬물이 닿는 고통을 상쇄할 만큼?
러닝 대회를 코앞에 두고 연습 중이던 12월의 어느 날, 결국 호기심이 두려움을 이겼다. 온몸이 땀에 젖은 김에 찬물 샤워를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이 엄청난 냉기를 뿜었다. 심호흡을 두어 번 하고 쏟아지는 차가운 물 아래 발을 내디뎠다. 찬물이 몸에 닿자마자 '당장 이 쓸데없는 호기심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1분간은 비명을 멈출 수 없었다. 정수리부터 시작해서 찬물이 닿는 부위가 산산이 부서지는 충격이 온몸으로 빠르게 번졌다. 동시에 숨은 들숨만 있고 날숨을 뱉을 수 없었다. 들숨, 들숨, 들숨으로 호흡이 너무 빨라져서 이대로 두면 심장이 멈출 것 같았다.
'그만해! 이건 자살 행위야.'
피부가 통증으로 찢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역설적으로 불에 덴 것처럼 뜨거운 것 같기도 했다. 거품을 모두 씻어낼 만큼 시간이 지나서야, 정말 죽어버리면 곤란하기 때문인지 고통이 사라졌다. 피부는 무감각하고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아무 생각 없이 멍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거짓말같이 기분이 좋아졌다. 극도로 상쾌하고 마치 새로 태어난 것 같은 쾌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날의 제임스 본드 샤워는 평생 했던 그 많은 샤워를 다 잊게 할 만큼 강렬했다. 나쁜 의미로도 절대 잊을 수 없고 좋은 의미로도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