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4년 6월 7일 자 <매일신보>에 실린 '탑동카페'
매일신보
악카페의 등장
1920년대 중반을 지나며 미국식 커피 문화가 들어왔다. 미국에서는 1919년 초에 내려진 금주령으로 공개적인 술 제조나 거래가 막히자 마피아가 주도하는 술 밀조, 밀매, 밀수입이 극성을 부리던 시대였다. 국가에 내야 할 술 세금을 마피아에 내는 꼴이었다. 술이 금지되자 커피와 콜라 소비가 폭발하였다. 커피를 마시며 재즈 음악을 즐기는 문화가 유행하였다.
미국에서는 금주법으로 술 문화가 지하로 숨었지만, 조선 땅에서는 서양식 술 문화가 오히려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광란의 시대, 1920년대가 조선에 도래하였다. 카페에서 음식보다는 술을 열심히 팔았고, 이야기 나누는 소리보다는 재즈 음악 소리가 더 크게 들리기 시작하였다. 커피는 부수적인 음료가 되었다.
문제는 술을 팔기 위해 여자 종업원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여뽀이로 부르다가, 차차 여급을 거쳐 웨이트리스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급여를 받기보다는 고객이 주는 팁으로 생활을 하였다. 팁을 받으려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카페는 점차 퇴폐의 길로 접어들었다. 결국 신문에 악(惡)카페라는 명칭이 등장하였다.
악카페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는 다양했다. 술, 커피, 음악, 잡지 등은 기본이었다.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광학적으로 성적 도발을 유도하는 것, 당시 용어로 광학서비스였다. 홍등과 청등, 즉 현란한 빛으로 하는 서비스다. 실내조명을 가능한 한 어둡게 하여 여급과 고객을 편리하게 해주는 서비스였다.
단속 대상이었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1931년 10월 17일 자 <매일신보>에 따르면 본정 경찰서는 영락정에 있는 카페미쯔와에서 흐리 컴컴한 광선을 사용하는 것을 문제 삼아 주인을 호출한 후 과료 처분을 하였다.
두 번째 서비스는 일명 애로서비스였다. 1932년 1월 1일 자 <중앙일보> 신년 특집호는 한 면 전체를 "마작과 카페에 대한 비판"이란 제목의 기사로 채웠다. 문제를 제기한 이여성은 당시를 "조선 도시의 퇴폐 절정기"로 불렀다. 애로광들이 카페 문 앞에서 행렬을 짓고 있는 모습을 예로 들었다.
그는 카페가 조선을 애로와 알콜로서 죽이려는 독살범이라고 표현하며 묵인할 것인지, 반대할 것인지를 물었다. 각계 대표들이 찬반 의견을 제시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카페를 근절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물론 경제공황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에로티시즘을 성행시킨 것이기에 퇴치는 어렵다는 주장도 발표되었다.
겉은 번쩍번쩍하였지만 속은 썩은 사회
<매일신보>는 1932년 1월 7일 자에서 당시 카페를 "애로 백퍼-센트의 요염한 웨트레쓰"가 있는 곳으로 묘사할 정도였다. 물론 이런 풍기 문란은 서울에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부산일보> 1932년 2월 5일 자에는 "카페의 애로"라는 제목 아래 대구경찰서의 문란한 카페 단속 기사를 다루었고, 3월 9일 자에는 부산 시내 "카페의 애로화"를, 3월 11일에는 상주의 "카페 만원 성황"을, 6월 16일에는 "카페만 느는 군산"을, 10월 10일에는 "마산 카페 적옥 호평" 등을 연이어 다루었다.
카페의 문제를 지적하는 기사인지, 이를 빙자하여 카페 출입을 부추기는 기사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언론이 시대에 영합하였을 뿐 시대를 이끌지는 않았다. 요즘과 다르지 않았다. 애로서비스 다음에 제공되는 것은 이른바 정조서비스, 매춘이었다.
경찰이나 당국이 늘어나는 카페에서의 이런 문란한 행위를 근절하겠다고 큰소리는 쳤지만, 실제 정책은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철도국에서 운영하던 경성역 2층에는 부인 대합실이 있었다. 5년 정도 운영해 오던 대합실을 없애고 끽다점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것이 1931년 11월 20일이었다.
철도국 발표에 따르면 적자 보충을 위해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것이 끽다점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철도국은 왜 늘 적자인지는 모를 일이다. 관에서 주도하는 끽다점이기에 다른 카페나 바처럼 여급을 두거나 음악을 써서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밝히며 공사에 착수하였다.
반년이 지난 1932년 6월 1일에 완공하여, 끽다점 개업을 하였다. 그런데 그 요란하던 각오와는 달리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여 웨이트리스도 미인으로 4인을 두어 피곤한 여객에게 위안을 주는 곳"이라는 광고와 함께 문을 열었다. 철도국의 광고인지, 경성역 주변 조폭 집단의 광고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한 일간 신문의 표현대로 1930년대 초반 경성은 "카페의 전성시대"를 맞이하였다. 100여 개의 카페에, 1000여 명의 웨이트리스, 청등홍등의 으슥한 불빛과 함께 흘러나오는 "환락의 짜스"는 밤의 경성을 더욱 음탕하고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권력도 동참하였고, 언론도 함께 춤을 췄다. 1880년대 미국 사회를 보며 마크 트웨인이 말했던 "도금사회"였다. 겉은 문제없는 듯 번쩍번쩍하였지만 속은 썩은 사회였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유튜브 '커피히스토리' 운영자,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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