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13 09:43최종 업데이트 23.03.13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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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법고전 산책>(조국 지음)을 읽은 다양한 독자들이 '15권의 고전을 통해 바라본 한국사회와 민주주의', 그리고 '우리의 공동체와 삶'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글은 독후감 대회 최우수상(청소년) 수상작입니다.[편집자말]
책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 있는 부분은 제각각이다. 그래도 사람들이 꼽는 꼭 읽어야 하는 구절은 대부분 머리글이나 마무리 글이 아닌 본론 속에 들어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누군가 나에게 <조국의 법고전 산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어디냐 묻는다면 머리글에 있다고 말할 것이다. 

초, 중, 고등학교를 보내면서 읽은 책은 많지만 첫 페이지부터 끝 페이지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읽은 책은 드물다. 나는 보통 머리글과 마무리 글은 뛰어넘은 채 책의 본론만 읽었다.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은 책의 본론에 있다, 라는 생각을 당연시했다. 어쩌면 내가 읽은 책의 대부분이 시, 소설과 같은 문학이었기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기 전, 어떤 내용인가 인터넷에 미리 찾아봤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잘한 일이었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나는 이 책의 머리글도 뛰어넘었을 것이고,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말을 전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서평과 다른 사람이 쓴 소개글을 읽던 내게 보인 것은 작가 조국이 고전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이었다. 고전에 대해 이야기하는 반 페이지 정도의 구절은 내 가슴을 따끔하게 만들었다.

많은 고전 작품을 읽고 그 해석을 배우면서 내가 느낀 고전은 멋있지만 이해하기도, 본받기도 힘든 작품이었다. 이를 끝으로 고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고리타분하고 뻔한, 지금은 쓸 수 없는 옛 논리. 나는 모르는 사이 고전을 그 틀에 가두고 멀리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고전에 대한, 어쩌면 그 고전을 쓴 작가들에 대한 죄책감 덕인지 나는 책의 끝까지 집중하며 읽을 수 있었다. 물론 이 독후감을 쓰기까지 몇 번은 더 반복해서 읽어야 했지만, 그 과정에서 내 안의 고전은 점점 바뀌어갔다. 언제나 보지 않고 지나쳤던 머리글이 던져준 '고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덕분이었다. 

'나'의 고전이 어떻게 바뀌었는가에 말하기 전에 이 책이 세상에 대한 내 시야를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먼저 말하고자 한다. 무언가의 의미는 그를 해석하는 사람의 시야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15권의 고전이, 그리고 그를 소개해 준 작가의 말이 내 생각을 넓혔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세 가지를 말하고자 한다.

내 생각을 넓혀준 15권의 고전
 

조국의 법고전 산책 ⓒ 이은영

 
첫 번째는 이 책의 1장,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이다. 루소는 내게 친숙한 철학자 중 한 명이다. 그가 쓴 <에밀>을 힘겹게나마 읽어냈던 기억과 <에밀>을 다 읽은 후, 정작 루소는 제 자식을 보육원에 보냈단 사실을 알았을 때의 충격이 한몫했다. 그의 이중성, 혹은 인간성이라고 할 수 있는 면모를 알고 있어서 그럴까, 작가의 루소에 대한 설명에 더욱 몰입하며 읽어갈 수 있었다.

<사회계약론>에서 루소는 시민의 정치 참여의 중요성, 인민 주권론, 자유와 평등 그리고 민주주의에 관해서 주장한다. 이 중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만 2가지, 정치 참여의 중요성과 자유와 평등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2016년, 내가 11살 때 촛불집회가 열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집회에 간 적이 없다. 뉴스로 먼발치에서나 보았을 뿐이다. 집에서 멀다거나, 학원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가 소용없는 것을 안다. 당시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지금도 남에 비하면 정치 까막눈이다. 내게 정치는 어른들의 일이었다. 대통령이니 뭐니 하는 것은 어른들이 알아서 할 것이라고 마음 놓고 지냈다. 만약 루소가 나를 보았다면 길길이 화를 냈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시민의 정치 참여를 강조했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정치에 대한 내 생각을 반성하게 되었다. 나는 학교에서 정치 참여의 중요성에 대해 배웠다. 사회 시간에 정부의 구성과 투표의 중요성을, 역사 시간에 시민의 정치 참여를 얻기 위해 투쟁했던 역사를 배운다. 그런데도 나는 평화로운 일상에 심취해서, 정치와 나를 구분해서 보고 있었다. 정치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배웠어도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자유와 평등 부분에서 기억에 남는 구절은 "지위와 재산은 상당히 평등해야 한다"란 부분이다. 상당히 평등해야 한다니, 얼마나 평등해야 '상당히' 평등한 거지? 라는 질문이 들었다.

아마 밑으로 이어지는 설명이 없었다면 더욱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작가의 설명에서 나온 예시들은 수업이나 뉴스에서 한 번쯤은 들어본 것들이었다. 수업 시간 가볍게 지나쳤던 정책들의 기반에 루소의 논리가 깔려있다는 사실은, 고전이 그저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두 번째는 이 책의 4장, 체사레 바카리아의 <범죄와 형벌>이다. 이 부분은 내 진로와도 연관 있어 세심하게 읽었다. 장래 희망이 10가지는 가뿐하게 넘기던 어린 날을 제외하고 생각해보면 내 진로는 범죄와 법과 관련이 있다. 프로파일러, 경찰, 그리고 변호사. 그러다 보니 왜 죄를 지었는지, 어떤 벌을 주고 어떻게 교화를 시킬 것인지 짧게나마 생각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오만 중 하나는 나는 이성적인 사람이란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가진 오만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만은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범죄를 볼 때, 그리고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볼 때면 항상 무너진다. 범죄 관련 뉴스의 댓글에는 '죗값을 치러야 한다'라는 내용이 빠지지 않는다. 사형을 시켜야 한다는 내용도 본 적이 있다.

뉴스를 접할 때 나는 분노하고, 가해자는 피해자가 겪은 고통의 10배는 당해야 한다는 댓글들에 공감한다. 만약 내가 이성으로 무장한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생각을 한다. 나는 내 분노와 공감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고 이러한 범죄를 막는 것이 벌의 이유라 여겼다.

<범죄와 형벌> 속 체사레 베카리아는 벌의 이유를 다르게 잡는다. 그에게 처벌의 목적은 가해자의 죗값을 치르는 복수가 아니라 사회의 이익 회복이다. 범죄자에 대한 분노에 치중되어 있던 내게 사회의 이익은 또 다른 개념으로 다가왔다.

이 외에 베카리아가 주장한 이론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형벌의 확실성이다. 생각해본다면, 잔혹한 형벌보다 확실한 형벌이 더 무섭기 마련이다. 거짓말의 대가가 회초리 10대라면 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반드시 죄가 밝혀진다는 조건이 덧붙는다면 죄를 짓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형벌의 확실성 이론은 내게 반드시 받게 되는, 신속하고 정확한 처벌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마지막은 8장,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크리톤>이다. 철학을 배우지 않더라도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는 일상에서 많이 접한다. 그들이 남긴 명언이나 그들과 관련된 일화들은 살면서 한 번은 들어보게 된다.

그 중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남겼다고 알려진 이 말은 사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새겨진 문구다. 초등학교 고학년쯤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멋지다고 생각한 문구였기에 실망감도 컸다. 이때 함께 알게 된 것이 '악법도 법이다'가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란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이야기나 그림으로 많이 접했다. 그걸 보면서 왜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택한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고는 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크리톤>을 읽으면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을 깨우치는 자신의 일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소신이 있었고, 법을 잘못 집행한 사람이 아니라 법 그 자체를 존중했기에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이 장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크리톤>에서 나온 "어떤 경우에도 악으로 보복해서는 안 된다"라는 구절이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행하기는 꽤 어려운 일이다. 타인에게 피해를 입어 불같이 치솟는 화는 불의나 정의와는 상관없고 그저 보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나도 동생과 싸웠을 때 옳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그저 분노 해소를 위해 보복한 적이 있었다. 죽음을 앞에 두고도 이렇게 말하는 소크라테스를 보며 악으로 보복하고 불의를 행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제라도 의미를 두게 되어 다행

지난 날 '그저' 읽었던 고전에게 사과하고자 한다. 과거 내가 고전을 대한 방식은 '읽는' 것이 아니라 '훑는' 것이었다. 책을 쓴 저자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학교와 학원 숙제를 하는 것만이 목적이었다.

그동안 나는 고전의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 것을 어렵기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내가 그에 대해 아무런 의미도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국의 법고전 산책> 덕에 나는 새로운 고전을 알게 되었다. 고전은 내게 더 이상 허구의 논리가 아니다. 단조로운 현실에 잠들어있던 내 시민 의식을 깨워주고, 진로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각성제가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살아가면서 그 의미를 잊을 때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 번 새롭게 정립된 고전은 내 안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살면서 만나게 될 고난을 헤쳐 나갈 지혜를 빌려주고, 나태해진 나를 깨워주며 함께할 것이다. 내게 보다 넓고 유연한 시야를 갖게 해준 저자와 15명의 철학자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며 독후감을 마친다.


조국의 법고전 산책 - 열다섯 권의 고전, 그 사상가들을 만나다

조국 (지은이), 오마이북(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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