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06 10:38최종 업데이트 23.03.06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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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외교라는 거센 비판 속에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회담 비준서에 서명하고 있는 모습. ⓒ 자료사진


"국제정세를 도외시하고 세계 대세에 역행하는 국가 판단이 우리에게 어떠한 불행을 가져오고야 말았는가는 바로 이조 말엽에 우리 민족이 치른 뼈저린 경험이 실증하고 있습니다." - 1965년 박정희 대통령 한일회담 타결에 즈음한 특별담화문 

"그로부터 104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던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봐야 합니다." - 2023년 윤석열 대통령 3.1절 기념사



10년을 이어오던 한일회담이 1965년 6월 한일협정 서명으로 끝났다. '굴욕회담', '구걸외교'라는 규탄에 박정희 정권은 위수령과 계엄령으로 응수했다, 그리고 한일회담 성과를 보고한다며 특별담화문을 발표했다.

'대세에 역행하여 불행한 과거를 겪었다. 국제공산주의 세력에 맞서기 위해 일본과 국교정상화가 필요하다. 굴욕외교니 저자세니 하는 것은 피해의식 열등감의 산물이다.' 58년 전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발표되었던 한일회담 특별담화문은 올해 윤석열 대통령의 3.1절 기념사와 놀랍도록 닮았다.

국제공산 세력과 맞서기 위해 한일국교정상화가 필요하다는 논리는 심각한 북핵 위협 등 안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한미일 3자 협력을 강화해야 된다는 주장으로 바뀌었다.

박정희 정권이 졸속회담 반대 여론을 피해의식 열등감이라고 몰아붙였다면 윤석열 정부는 반일 감정 이용해 정치적 반사이익 얻으려는 세력이라고 한다. 제국주의 전쟁 범죄를 지적해야 할 자리는 세계 흐름을 역행하고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우리의 잘못이 불행한 과거를 만들었다는 주장으로 채워졌다.

일본에 또 하나의 빌미 될 가능성
 

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중구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제104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 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의 기념사는 과거 졸속 한일회담을 보는 것만큼 아찔하다. 58년 전, 잘못 꿴 첫 단추에 이어 또다시 역사의 단추가 잘못 꿰어지고 있다는 낭패감마저 든다. 사실 일본의 억지 주장과 일제 만행의 고통이 지금까지 지속되는 건 58년 전 한일회담을 졸속 협정으로 끝맺은 후과가 지속되기 때문이다.

아픈 과거의 청산은 잊고 덮어야 하는 게 아니라 피해국은 책임을 묻고 가해국은 전쟁 범죄를 인정하는 게 첫걸음이어야 했다. 그러나 1965년 한일조약은 일본에 의한 경술국치 강제병합이 침략범죄인 것도, 원인 무효인 것도 협정에 담지 못했다.

한일협정은 청구권 금액 3억 달러로 합의한 채 강제동원 피해자 보상, 일본군 위안부, 사할린동포 문제, 문화재 반환, 재일교포 법적 지위, 독도문제 등을 미해결 현안으로 남겼다. 일본의 반복되는 과거사 망언이나 독도를 둘러싼 영유권 주장, 침략의 정당화와 미화는 한일회담이라는 첫 단추가 잘못 꿰어졌기 때문이다.

한일협정으로 모든 청구권이 소멸되었다는 일본, 개인 청구권은 존중하고 배상해야 한다는 위안부와 강제징용 피해자들, 그 사이에서 우리는 역대 정부의 성격에 따라 다른 결정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정부도 1965년 합일협정이 잘못된 문제를 제기하고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못했다. 한 번 맺어진 협정의 무게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고, 뒷날 잘못을 바로잡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지 방증이기도 하다.

물론 양국 사이 협정과 대통령 연설 내용의 비중이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국가 지도자의 국가기념식 연설은 국민 일부나 시민단체의 주장과는 다르다. 하여 윤석열 대통령의 3.1절 기념사는 58년 전 졸속 한일협정을 바탕으로 온갖 억측을 늘여놓던 일본에 또 하나의 빌미가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윤석열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 해법으로 포스코 등 국내기업의 기부를 받아 대법원이 지급을 명령한 배상금을 갚겠다는 안을 내놓은 바 있다. 일본 기업의 배상금 지급이나 일본 정부에 대해서는 책임도 묻지 않는 방식이다.

우리 기업에 돈을 거둬 일본 범죄에 면죄부를 주자는 윤석열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 또다시 일본의 잘못보다 우리의 과오와 반성을 꺼내 들었다. 강제동원 피해자 해법과 3.1절 기념사, 보고 듣는 국민에게서 '자해외교' '굴욕외교'라는 비판이 나오는 건 이상할 것도 없다.

미래 갈등의 또 다른 불씨 지핀 꼴
 

‘104주년 3.1절 - 윤석열 굴욕외교 한일합의 중단! 일본 식민지배 사죄배상 촉구! 범국민대회’가 1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일본의 강제동원 사죄와 전범기업 직접배상을 촉구하는 의원모임 공동주최로 열렸다. 집회 후 일본대사관까지 행진을 벌인 참가자들이 일본군국주의를 상징하는 욱일기를 찢고 있다. ⓒ 권우성


3.1절 기념사에 대한 일본의 반응은 호평 일색이다. 지난 2일 야후 재팬에는 '양국 간 역사적 갈등을 언급하지 않고 일본을 협력 파트너로 규정하고 한미일 연대를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한국이 일본 식민지배를 받기 시작한 원인으로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 것이라는 견해를 드러냈다'며 2월 경제인연합회의 '한일관계에 대한 인식조사'까지 인용해 윤석열 대통령을 치켜세운 기사가 올라왔다.

<아사히신문> <마이니치> 등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에 대한 명확한 비판이 없었으며 일본 정부와 조율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안전운전을 했다', '강제징용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으니 일본 정부가 빠르게 나서서 매듭지어야 한다'는 훈수까지 등장했다. 국내에서 박수받지 못한 3.1절 기념사가 일본에서 환영받는 모습, 씁쓸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3.1절과 광복절은 다른 국경일과 의미가 다르다.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한 날과 해방된 날의 기념이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메시지는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일본의 올바른 역사 인식을 주문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 두 나라 관계 발전에는 일본 정부와 국민의 진지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 가해자인 일본 정부가 '끝났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문재인 전 대통령. 모두 3.1절 기념사에 담긴 내용이다.

비단 진보 진영 대통령만 그런 것도 아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역사의 진실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인식은 천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다고 했다. 3.1절에 일본의 성찰과 책임을 촉구하는 것, 진보 보수를 떠나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역사인식의 발로다.

우리가 준비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 상실의 고통을 받았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3.1절 기념사. 국민들의 비난 정도로 그칠 문제가 아니다. 일본이나 일본의 주장을 옹호하는 나라들은 이번 3.1절 기념사 내용을 가지고 '스스로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느냐'며 전쟁 책임과 배상 요구에 적반하장식 태도를 보일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잘못된 역사 인식에 바탕을 둔 3.1절 기념사로 미래 갈등의 또 다른 불씨를 지핀 꼴이 됐다.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 해법으로 거론되는 제3 변제 방식의 발표도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보도다. 우리 기업의 돈으로 강제징용 피해자의 대법원 배상 판결을 이행한다니 어떤 역사적 인식을 가졌으면 이런 듣지도 보지도 못한 방법을 입안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한일협정 때 일본 측에서 역청구권을 내세운 적이 있다. 패망해 물러가면서 한반도에 남겨놓은 부동산 등에 일본의 청구권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윤석열 정부에서는 일본의 이런 억지 다시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런 주장이 나온다고 일본인 땅 찾아주기 운동이야 하지 않겠지만 윤석열 대통령의 역사 인식, 이래서 될까? 걱정스러운 일들이 점점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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