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23 17:16최종 업데이트 23.02.23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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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계속 글을 쓰고 있었다. ⓒ unsplash

 
시골 어린이들은 본능적으로 부력을 익힌다. 여름에는 집 앞 개울에서 아기들처럼 손을 짚고 기어 다니다가 물에 뜬다. 겨울에는 백설기처럼 폭신폭신하게 눈 쌓인 언덕에 지푸라기 넣은 비료 포대를 질질 끌며 모여든다. 어린이들은 앉아서 균형을 잡기도 전에 미끄러진다. 붕! 도랑에 처박히기 전에 확실한 부력을 체감한다.

부력은 물건 앞에서도 작동한다. 동생 지현은 가짜 진주 목걸이를 걸고 노란색 레이스 치마를 입었을 때 제대로 설 수 없었다. 날 듯이 붕붕 떠서 뛰어다녔다. 나는 엎드린 채로 일기장을 가지고 놀다가 방바닥에서 최소 5센티미터쯤 뜨곤 했다. 내가 쓴 글인데, 친구들이랑 논 일을 만화영화 '재방송' 보는 것처럼 읽었다. 다 아는데도 재미있었다.


갈고 닦은 부력도 세월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몸과 마음이 동시에 공중으로 떠오르던 환희의 순간은 희미해졌다. 해 떨어진 줄 모르고 하던 고무줄놀이도, 귀가 닳도록 100번씩 넘게 듣던 노래들도 시들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뭔가를 쓰는 건 여전히 재미있었다. 친구의 연애편지를 대필하고, 교실에서 일어나는 흔한 일들도 정성스럽게 기록했다. 학교 졸업하고 아기를 낳아 기르고 밥벌이하면서도 글을 쓰고 있었다.

'쓰고 싶은 이야기'가 쏟아지던 그때 

시대의 급류에 올라타서 인터넷 카페도 만들었다. 회원이라고는 동생 지현과 친구 두세 명이 전부인 곳에서 글을 썼다. 댓글 쓰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날에는 무례를 범했다. 따로 이메일을 보내고서 읽어보라고 채근했다. 늘 켜져 있던 글쓰기 촉수가 <오마이뉴스>에 닿은 건 어쩌면 당연했다. 평범한 시민들도 '사는 이야기'를 보낼 수 있다는 점에 솔깃했다.

친구 몇 명 앞에서 떠들 때 담력은 필요하지 않다. 전교생이 모인 자리에서 공식적인 이야기를 하는 건 다르다. 원고료를 준다고 해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내 글을 읽는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오므라들었다. 용기가 차오를 때까지 기다리며 <오마이뉴스>를 클릭했다. 기사로 채택된 '시민기자'들의 일상 이야기를 거의 날마다 읽었다.

그때 나는 젊고 건강한 젊은이였다. 돌아다니지 않고 집에서 주말을 보내면 인생의 패배자가 된 것 같았다. 길을 잃어도 겁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고, 깊은 밤에 먼 길을 운전해도 피로가 쌓이지 않았다. 2001년 늦가을에는 유람선을 타고 다리가 놓이기 전의 선유도에 다녀왔다. 아이를 두고 혼자 여행한 이야기를 우리끼리만 노는 인터넷 카페에 올렸다.

"이야! 나도 가고 싶다야."

먼 도시에 사는 친구가 댓글을 달았다. 그 순간, 몸과 마음에 전류가 찌르르 흐르더니 초고속으로 용기가 완충되었다. 나는 그 글을 <오마이뉴스>에 보냈고 얼마 뒤에 정식 기사로 채택되었다. 뱃멀미를 하는 것처럼 속이 메슥거렸다. '배지영 기자'라는 호칭은 낯간지럽고 부담스러웠지만, 공식적인 매체에 글이 실렸다는 게 나에게는 톱뉴스였다(관련 기사 : "쓸쓸해, 그래서 그곳을 찾았지").

쓰고 싶은 얘기가 지리산 장터목의 별빛들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베이비시터의 집 앞에서 들리는 아기 울음소리가 두려워서 도망치다 달리기에 빠진 일, 덕분에 마라톤 하프 코스를 몇 번이나 완주한 이야기를 썼다. 집안 살림을 엄마한테만 맡겨놓고 골드 액세서리와 나이키 운동화와 화려한 셔츠를 좋아한 아빠의 삶도 비로소 이해했다. 새 학기에 친구를 알아가는 것처럼, 글을 쓰며 나를 둘러싼 세계와 새롭게 사귀었다.

일상 글에 달린 댓글 때문에 위기도 겪었다. 그게 아니라고, 나는 친절하게 응대했다. 상대는 더 비아냥거리며 대댓글을 달았다. 다른 사람들도 불구경하듯 몰려들어 한 마디씩 썼다. 한낮인데도, 나는 귀신이 나타날까 봐 텔레비전을 끄지 못하고 도망치던 어린이로 돌아가 버렸다. 댓글 단 사람이 모니터에서 튀어나올 것 같아 컴퓨터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정면 승부를 피했으면서 쿨한 척했다. 남이 차려준 밥이 최고라는 어머니들처럼, 남이 쓴 글 읽는 생활에 만족한다며 날마다 서점에서 책 한 권씩 사서 퇴근했다. 애 재우고서 괜히 글 쓴다고 고생했다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부모님의 노화를 목격하고, 긴 여행을 떠나고, 존경하는 선생님과 시간을 보내고서도 초등 저학년 일기처럼 짧게 몇 줄 쓰고 말았다.

용기는 누군가가 글을 잘 썼다고 칭찬해주지 않아도 저속 충전되고 있었다. 쓰지 않는 생활 2년 차에는 '무플보다는 차라리 악플이 낫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악플이 뭐가 좋아?" 상처받은 내면 아이가 튀어 나와서 고래고래 소리쳤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해 방어막을 쌓기로 했다. 박완서 작가 책과 패션잡지만 읽는 동생 지현에게 1차 독자가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사회생활과 시집살이를 안 해서 사회성이 떨어진다며 나를 놀렸던 동생이 열 번에 한 번 꼴로 "이 문장만 살짝 고쳐 봐"라고 했다. 나는 무조건 수정 작업해서 <오마이뉴스>에 글을 송고했다. 가끔씩 악플이 달렸지만 예전처럼 크게 휘청이지 않을 만큼 단단해졌다. 사람들의 평가에 덜 얽매이고도 나만의 시각을 담아 쓸 수 있는 주제 속으로 들어갔다.

내가 사는 군산은 인구 30만이 안 되는 작은 도시. 드라마나 영화는 거의 대도시를 배경으로 촬영한다. 알아주는 직장도 그곳에 있고, 문화 공연도 다 그곳에 가야 볼 수 있다. 200여 년 전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강진 유배지에서 아들들에게 편지를 썼다. 볼 것도 많고 기회도 많은 '한양 사대문 안'에서 살라고. 나는 '인 서울' 하지 않고도 자기 삶을 꾸려가는 동네 청년들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기록했다(관련 연재 : 지방소도시 청춘남녀 인터뷰).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데려가 준 '글쓰기'
  

군산 한길문고 매대에 있는 배지영 작가 책 오마이뉴스 덕분에 꾸준히 혼자 쓰는 힘을 길렀다. 덕분에 에세이, 인문지리서, 인터뷰집, 동화 등 11권의 책을 펴냈다. ⓒ 배지영

 
차츰차츰 알아봐 주는 편집자들이 생겼다. <오마이뉴스>를 통해서 출간 제안이 오기도 했다. 알아봐 주는 독자들도 생겼다. <오마이뉴스>를 통해서 강연 제안이 오기도 했다. 나는 밥벌이 시간을 줄여가며 글 쓰는 데 집중했고 마흔 살 넘어서 첫 책을 출판했다. 에세이, 인문지리서, 인터뷰집, 동화 등 11권을 펴낸 전업 작가가 되었다.

"배지영 작가는 오마이뉴스와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야자 대신 저녁밥 하는 고딩 아들' 연재기사로 <소년의 레시피>를 썼고, '지방소도시 청춘남녀' 인터뷰를 써서 <우리, 독립청춘>을 냈거든요(이 글로 브런치북 대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달의 뉴스 게릴라상, 2월 22일상, 올해의 뉴스 게릴라상, 명예의 전당 으뜸상까지 시민기자로서 받을 수 있는 상도 다 받았습니다."

<오마이뉴스> 최은경 편집기자는 연재기사 '쓰라고 보는 책'에서 나를 언급했다. 거슬러 가보면 <오마이뉴스>는 내 글쓰기의 바탕이었다. 꾸준히 혼자 쓰는 힘도 길러줬다. 덕분에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2022, 사계절)이라는 글쓰기 에세이도 펴냈다. 나는 글쓰기 수업을 받는 사람들에게 <오마이뉴스>에 글 보내라는 숙제를 꼭 낸다.

글쓰기의 부력은 존재한다. <오마이뉴스>에 실린 자기 글을 확인한 사람들은 붕붕 떠오른다. 나는 그들이 대견하고 한편으로 부럽다. 테트리스 게임처럼, 쓸 이야기가 떼로 몰려오는 구간을 지날 거니까. 하지만 그 뒤에는 아무리 해도 글이 늘지 않아서 괴로운 암흑의 터널이 기다린다. 그걸 알면서도 사람들에게 <오마이뉴스>에 글을 쓰라고 한다. 거기에 쌓인 글은 또 다른 데로 데려갈 거니까.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브런치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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