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17 06:46최종 업데이트 23.02.17 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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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26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키이우 외곽 도시 흘레바하에서 주민들이 러시아군 공격으로 무너진 이웃집의 잔해를 정리하고 있다. 미국과 독일 등 서방이 우크라이나에 전차를 지원하기로 한 다음날인 26일 새벽부터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전역에 공습을 가해 11명이 숨지고 11명이 부상했다. ⓒ 연합뉴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되고 1년이 지난 시점에 와있다. 작년 UN이 총회 주제를 분기점으로 제시했을 만큼 전환기가 도래했고 그 주요 변수가 팬데믹, 전쟁 그리고 기후 변화일 것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는 상태다. 여전히 진행중이지만 지금까지 세계는 어느 방향으로 움직였을까.  

대서양쪽에서는 영국과 EU가 비슷해지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2016년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선거와 2020년 1월 최종 EU 탈퇴로 결별한 양쪽의 갈등은 이별 과정이 거칠었지만 근본은 독자적 정부 권한 대 자유 시장이었다. 타협하기 어려워 보였지만 양쪽은 중간 지점을 향해 한 발짝씩 움직이고 있다.


독자적 권한을 확보한 영국은 시장 쪽으로, 단일 시장을 기본으로 하는 EU는 각 정부에 독자적 권한 부여 쪽으로 가고 있다. 미래 산업에 있어서는 국가 보조금 경쟁으로 나머지 영역에서는 자유 무역 유지로 나타나고 있다. 

영국 노동당과 브렉시트

브렉시트. 난이도 최상의 문제가 돌아오고 있다. 영국은 2020년 1월 공식 탈퇴했지만 코로나와 전쟁이 잇따르면서 브렉시트로 인한 직접적 경제 여파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2023년 초 다른 G7에 비해 현저히 낮은 경제 회복률을 보이는 영국에서는 노동력 부족, 인플레이션, 저성장의 주원인이 브렉시트에 있고 EU와의 관계를 재설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국내·외 여건은 마련되었다. 시장조사 업체 스태티스타(statista)에 따르면 EU 탈퇴 찬·반은 2021년 7월까지도 양쪽 차이가 2% 포인트 차로 팽팽했다. 하지만 그 이후 잘못된 결정이었다는 쪽으로 여론이 기울기 시작했다. 격차는 점점 벌어져 지난 1월에는 '잘못된 결정' 쪽이 54%로 '잘했다' 34%를 20% 포인트 앞서고 있다.

EU 쪽도 전쟁 이후 안보와 경제 영역에서 영국과 협력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현재 집권하는 보수당보다는 노동당을 더 대화 상대로 염두에 두는 분위기다. 2024년 하반기 총선까지는 시간이 상당히 있지만 시장조사 업체 입소스(Ipsos)가 실시한 1월 말 양당 지지율 조사에 의하면 노동당 지지도가 51%로 보수당 26%보다 무려 25% 포인트 앞선 상태다.

전 EU 브렉시트 협상 수석대표였던 미셸 바르니에(Michel Barnier)는 노동당 대표 키어 스타머(Keir Starmer)를 두고 "영국 총리가 될 능력"이 있고 지리적으로 함께 묶여 있는 유럽 차원에서 대화할 수 있는 정치인이라 평했다.
  

2022년 9월 28일 키어 스타머 노동당 대표가 영국 리버풀에서 열린 영국 노동당 전당대회서 연설하고 있다. ⓒ 연합뉴스

 
과연 노동당 대표 키어 스타머는 무슨 구상을 하고 있을까. 그는 2016년 투표 당시 EU 잔류를 지지했고 이후 제2차 국민투표를 원했던 인물이다. 그는 "브렉시트는 이미 벌어진 일"이라며 차기 총리가 될 경우 재가입을 추진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탈퇴로 얻은 정부 고유 권한을 반납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는 대신 "역동적 동조 (Dynamic alignment)"를 제시했다. 농산물과 환경, 각종 경제 규제법을 EU법에 최대한 가깝게 맞춰 마찰이 일어날 부분을 최소화해 경제 관계를 확대하겠다는 생각이다. 그는 EU 외의 시장 확보를 위해 지난 1월 말 다보스에서 개최된 세계 경제 포럼에도 참가해 월스트리트 금융가와 기업가들을 만났다.   

제러미 코빈과 바이든

"역동적 동조"는 브렉시트 당시 불분명한 입장 표명으로 엄청난 비판을 받았던 노동당 대표 제러미 코빈(Jeremy Corbyn)의 아이디어다. 사실 노동당과 EU의 관계는 처음부터 매끄럽지 않았다. EU 추진 논의가 진행되던 1980년대 노동당은 노동을 고민하지 않고 시장을 통제하지 못하는 EU 결성에 반대했다.

하지만 EU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던 자크 들로르(Jacques Delor)가 시장 통제 요소를 추가해 "사회적 유럽"을 건설하겠다고 약속한 이후 지지로 돌아섰다. 노동당은 토니 블레어-고든 브라운 총리까지 13년간 집권했다.

코빈은 개인적으로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유럽중앙은행이 은행가 위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정부로부터 독립되어 있기 때문에 견제가 어렵다는 점, 선출로 이루어지지 않은 기구에 힘을 과도하게 실어주어 종국에는 각 국가가 가지고 있는 외교권까지 영향을 끼칠 점을 우려했다.
  

영국 노동당 대표 총선 참패에 사의 표명 영국 제1야당 노동당의 제러미 코빈 대표가 2019년 12월 13일(현지시간) 총선 개표 결과 자신의 지역구인 런던 이즐링턴에서 당선이 확정된 후 연설하고 있다. 영국 총선에서 보수당이 압승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 이날 코빈 대표는 기자들에게 "향후 있을 총선에서 당을 이끌지 않을 것"이라며 사의를 밝혔다. ⓒ 연합뉴스

 
특히 코빈은 EU법 중 정부 보조 규제에 강한 반감을 표했다. 정부 보조 규제란 EU 단일 시장 내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기 위해 정부가 자국 산업을 보조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이다. 경제 수준이 다른 국가들이 모인 EU 입장에서는 필수불가결한 조치지만 각국 정부로서는 자국 기업이 경쟁에서 자연 도태할 경우 발생하는 실업 문제를 해결할 조치도 취하기 어렵게 된다. 그는 EU가 최첨단 산업과 지방 중소 산업에 보조금을 줄 권리는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반이민 정서에 의존해 탈퇴를 외치는 보수당 강경파와 선을 그어야 할 필요성에 "개혁된 EU 내 잔류" 즉, 조건부 잔류로 입장을 공식화했다. 그가 원하는 EU 개혁이란 자국 문제에 대한 자국 정부의 권한을 보장받아야 하고, EU가 안보 영역까지 역할을 넓히려는 시도를 멈춰야 하며, 시장주의에 대한 견제로 노동권과 환경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2019년 총선 정국에서 코빈은 브렉시트 대신 "실질적 변화"를 내세우며 녹색 산업 혁명(Green Industrial Revolution)을 외쳤다. 결과는 참패였다. 19세기 이후 영국 노동 운동의 주축이었고 1930년대 이후 노동당의 철옹성으로 불린 소위 '빨간 벽(Red Wall)'이라고 불리던 지역을 보수당에 내주며 대표 자리에서 물러났다.  

국가 보조로 노동과 기후를 동시 해결할 그린 경제 건설이라는 코빈의 구상은 당시 너무 앞섰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구상은 계층 문제와 에너지 문제를 전면으로 끌어낸 팬데믹과 전쟁을 거치며 불과 3년 후 미국 바이든 대통령 손에서 되살아났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2년 8월 16일(현지시간) 워싱턴DC 백악관에서 기후변화 대응과 의료보장 확충 등을 골자로 한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서명하고 있다. 왼쪽부터 조 맨친 상원의원, 척 슈머 상원의원, 제임스 클리번 하원의원, 프랭크 펄론 하원의원, 캐시 캐스터 하원의원. ⓒ 연합뉴스

 
2010년대 후반부터 영국 노동당-녹색당 중심으로 구성된 그린 뉴딜 그룹은 미국 민주당 진보 세력과 선라이즈 등의 젊은 세대와 교류하고 있었고 바이든은 이를 받아들여 중도에서 개혁 및 시대 전환으로 방향을 틀었다(관련기사: "우리가 민주당을 차지하자" 젊은이들의 의미있는 도발 https://omn.kr/1vptm).

전 세계 기후 운동계와 노동계가 환영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은 그 결과물이다. 기후 변화 문제를 중심으로 경제를 빠르게 재편하는 과정에서 최첨단 산업에 정부 보조금을 주고 동시에 자국 노동자 계층을 위한 일자리 창출을 목표로 하는 이 법안은 전체 7400억 달러(약 974조 원) 규모로 그 중 3690억 달러 (486조 원)가 기후 관련 예산이다.   

아무리 급진적인 안이라도 미국이 하면 급진성이 무뎌지고 합리적이고 대세가 되는 마법이 다시 발휘되었다. 지난 12월까지도 자유 경쟁을 외치며 미국과 날을 세웠던 EU가 결국은 정부 보조금 경쟁을 수용했다.  

정부 보조금 경쟁으로

EU의 완화된 태도는 지난 7일 프랑스 재무장관 브뤼노 르메르(Bruno Le Maire)와 독일 부총리 겸 경제·기후보호부 장관 로베르트 하베크(Robert Habeck)가 미국 재무장관 재닛 옐런(Janet Yellen)과 가진 고위급 회담에서 분명히 나타났다. EU 측은 IRA가 "공격적"이고 "차별적"이라는 기존의 비판을 상호 공정한 경쟁을 위한 "투명한 법 집행" 요구로 완화했다. 옐런 장관은 그린 에너지 산업은 모두를 이롭게 할 충분한 공간이 있다며 EU의 방향 전환을 환영했다.  

통상 갈등에서 경쟁으로의 태도 전환에는 미국 군사력에 의존해 전쟁을 하고 있는 현실이 물론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미국에 꼬리를 내렸다고만 볼 수 없다. 이미 내부에서도 러시아 에너지 및 중국 경제 의존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보호 무역주의 색채가 있는 '유럽제품 구매법'과 '유럽 주권 기금' 등이 언급되고 있었다(관련기사: 국익 걸고 미국과 담판… 윤석열 정부는 없었다 https://omn.kr/21sd5).

EU의 국가 보조금 수용은 2월 1일 발표된 그린딜 산업 계획(Green Deal Industrial Plan)에 나타나 있다. 21쪽짜리 문서로 4가지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 규제 환경의 단순화 ▲ 보조금이 빨리 지급되도록 할 것 ▲ 기술 교육 ▲ 국제 공급망을 원활히 하기 위한 열린 무역이다. EU측은  2월 토론 절차를 거쳐 3월 중순에 탄소중립 산업 법안(Net-zero Industry Act)으로 상정할 계획이다.

3월 초까지 진행될 토론의 핵심 의제는 국가 보조금과 자유 시장이다. 위 산업 계획안에 따르면 각 국가는 핵심 기술 분야에 한해 자국 기업에 국가 보조금을 줄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독일과 프랑스만큼 보조금을 지급할 수 있는 국가가 없다. 이 점을 보완할 목적으로 EU는 EU 차원의 기금을 조성해 회원국에 보조금을 지급하고자 한다.   

두 가지 모두 난관이 예상된다. 절대적으로 독일과 프랑스에 유리한 국가 보조금 정책은 EU 단일 시장을 이 두 국가의 놀이터로 만들 위험이 있다. 게다가 이미 독일은 전쟁 이후 에너지 관련 2천억 유로를 자국민에게 보조금으로 지급해 단일 시장의 자유 경쟁 원칙을 해쳤다는 비판을 받은 바 있다. EU 공동 기금의 경우 전쟁 이후 안보 기능까지 확대한 EU에 힘을 더 실어줄 가능성이 농후하다.  
  

2021년 7월 14일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벨기에 브뤼셀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탄소배출 감축 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EU 행정부 격인 집행위는 이날 역내 온실가스 순배출량을 2030년까지 1990년 대비 최소 55% 감축하기 위해 탄소국경세를 도입하고, 2035년부터 EU 내 신규 휘발유·디젤 차량 판매를 사실상 금지하는 내용 등을 담은 정책 패키지를 제안했다. ⓒ 연합뉴스

 
예상되는 반발에 EU 집행위원장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Ursula von der Leyen)은 "한 세대에 한 번 올까말까 한 기회"라며 중요성을 설명했다. 미국, 영국, 중국 등 보조금 정책을 계획하는 국가들을 나열하면서 유럽에 기반한 산업들이 떠날 가능성을 언급하며 첨단 기술 분야에 국한된 보조금 정책의 정당성을 호소했다.

대서양 쪽 변화가 시장 중심의 자유 무역이 깨지는 과정인지 아니면 일부 국가 보조-자유 무역 구조가 유지되는지는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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