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15 11:46최종 업데이트 23.02.15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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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연식의 카렌스2 ⓒ 한성안


아무리 생각해봐도 새 차는 내게 여러모로 버겁고 불필요하다. 집으로 들어오는 진입도로 공사가 2년 후에나 완공된다는데, 그때까지 땡볕이 내리쬐는 도로변에 방치하면서 바싹 말릴 판이다. 지나다 누가 긁을까 근심 걱정으로 잠을 못 이룰지도 모른다.

아들은 내게 새 차 사서 재밌게 나들이 많이 다니란다. 안전하고 편리한 대중교통을 즐겨 온 내가 뭣 하러 다시 자가용을 끌고 다니겠는가? 무엇보다 나는 쏘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집에 틀어박혀 공부하는 게 제일 재밌다. 여행은 EBS의 <세계테마기행>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차를 몰수록 위험해진다. 나이가 드니 난시가 생겨 눈의 초점이 예전 같지 않다. 야간 운전과 고속도로 운행은 삼간다. 새 차를 산들 이용률이 매우 낮은 애물단지가 될 게 뻔하다. 거의 쓰지도 않을 물건 때문에 차량 보험료는 물론 재산세와 의료보험료도 크게 오른다. 10년 이상 된 자가용 덕분에 내가 부담하는 의료보험은 제법 낮다.

그래서 더 사용하기로 했다. 도색을 맡겼더니 20년 된 차에 뭣 하러 돈을 들이느냐고 핀잔을 준다. 차라리 중고차 사는 게 유리할 것이란다. 그러나 '내 뜻을 어찌 알랴?' 앞으로 소중하게 쓸 것이니 제대로 도색해 달라며 차를 맡겼다. 1주일 후 나의 카렌스2가 휘황찬란한 자태를 뽐내며 되돌아왔다. 파손되고 찌그러진 몇몇 곳도 깨끗이 정리된 상태였다. 일단 외모가 받쳐준다. 155만 원을 입금해 주었다.

블랙박스가 없다. 방어운전을 위해 카메라를 달자! 2002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연식을 보더니 싱긋 웃던 카센터 사장이 도색된 모습에 크게 용기를 얻어 장착해 주겠단다. 2023년식에나 달릴 정도로 최신식 안드로이드 어라운드뷰를 장착했다. 전후좌우 사방을 카메라가 알려주니 주차하기가 훨씬 편하다. 후진 때 삑삑 나는 경고음도 피콜로 소리처럼 아름답다!

최신식이다 보니 스피커 소리도 훨씬 좋아졌고 운행 중 전화도 가능하다. 태블릿 PC를 장착한 것과 마찬가지니 오만 가지 기능을 터치식으로 이용할 수 있다. 공사가 좀 복잡해 총 123만 원을 지불했다. 추레하던 똥차가 스마트한 신사로 탈바꿈했다.

경제학적으로 합리적인 투자
 

최신식 안드로이드 어라운드뷰를 장착했다. ⓒ 한성안


이제 내구성이 큰 부품만 교체하면 된다. 힘이 떨어지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제너레이터가 의심이 되었다. 잠깐 나들이를 마치고 정비소로 가는 중에 일이 터지고 말았다. 정비소를 몇 걸음 앞두고 신호등 앞에서 주저앉고 만 것이다. 신호등 앞에 대기하던 중이었기에 망정이지 달리던 중이었더라면 낭패를 당할 뻔했다. 긴급출동서비스를 이용해 정비소로 견인했다.

주치의나 마찬가지인 정비소라 우리 차의 변신에 우스워 죽겠단다. 20년 된 똥차가 깨끗하게 도색된 후 최신식 어라운드뷰까지 장착해 스마트하게 나타났으니! 양아치가 하버드생으로 출세한 것 같단다.

우리 사장님, 엄청 고무된 느낌이다. "진짜 오래 탈 겁니까? 그러면 제대로 점검해 건강하게 바꿔드리겠습니다." 노후화된 핵심 장치와 부품을 갈아야 오래 쓸 수 있단다. "잘 살펴보시고 의심나는 건 다 교체해 주세요." 우리의 철학을 잘 이해하신 사장님 왈, "제가 알아서 모시겠으니 4시간 후 오세요."

4시간 후 전화가 왔다. 제너레이터는 물론이고 여러 가지 장치를 교체해 놓았다. "앞으로 소모품만 갈아 주시면 10년은 거뜬히 더 탈 수 있습니다." 118만 원을 지불했다. 명실공히 최신식, 건강한 차, 그리고 멋진 자태로 거듭난 것이다. '중생'!

아무리 때 빼고 광내도 번호판이 인물을 다 버려 놓는다. 마치 양복 입고 고무신 신은 모습이다. 번호판을 바꾸려 내친김에 차량등록소로 내달았다. 새 번호판으로 교체하니 인물이 쫙 난다. 교체 및 대행 서비스를 포함해 총 4만 원 들었다.
 

득템 카시트 내부사진 ⓒ 한성안

 
이 차도 사실 중고차다. 1년 정도 타다 싫증 났던지 원래 차주가 멀쩡한 차를 중고 시장에 내놨기에 덜렁 산 것이다. 가죽으로 카시트를 감싸놓았다. 20년간 시트 가죽이 낡고 더러워져 교체해야 할 것 같아 벗겨냈다. 헉, 완전 신품 그대로다. 출고 때 카시트를 옵션으로 걸었던 모양이다. 20년간 한 번도 햇빛을 보지 못한 채 고이 보존되어 있던 것이다. 카렌스2, 광명을 보다! 뜻밖의 득템이다.

20년 된 차지만 내장, 외부, 부품은 물론 최신식 어라운드뷰까지 갖춘 명실상부 완전한 새 차다. 정비소 사장님 왈, 본전 뽑으려면 앞으로 10년을 더 타야 한다니, 이놈이야말로 내 인생의 동반자다. 아무리 둘러봐도 마누라, 자식 빼놓고 30년을 같이 한 게 내 주위에 없다.

155만+123만+118만+4만=400만 원을 들여 중생한 최신식 차를 30년 탄다면 남는 장사다. 새 차 사면 이런저런 옵션 추가해 5000만 원 정도 든다. 그 정도 들이면 최신식 어라운드뷰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보험료, 재산세, 의료보험까지 치솟을 터이다. 400만 원 투자해 5000만 원의 편익을 누린다면 이거야말로 경제학적으로 합리적인 투자가 아닌가? 더욱이 얼마나 실용적인가!

사회적 소비의 폐해
 

20년 된 차지만 명실공히 멋진 자태로 거듭났다. ⓒ 한성안


대다수 사람들은 이처럼 경제적이고 실용적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소비한다. 사회란 경제행위자들이 '관계'로 엮인 상태를 말한다. 이 속에서 사람들은 타인을 의식하면서 소비한다. 남의 눈치를 보면서 소비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비싸더라도 남의 눈을 의식해 그것을 구매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빈곤을 타인에게 노출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제도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은 <유한계급론>에서 유한계급의 과시소비와 함께 중산층의 모방소비, 나아가 '원치 않는 주목'(unwanted attention)에 두려움을 갖는 중산층과 하층계급의 공포소비를 신랄히 비판하였다.
 
유한계급의 "생활예절과 가치기준은 공동체의 명성에 대한 기준을 제시한다." 그렇게 되면 "이러한 기준에 따르는 것은 모든 하층계급에 지워진 의무로 된다. .... 상류계급에 의해 부과된 명성의 규범은 약간의 저항에 부딪치겠지만 사회구조를 통해 최하층까지 그 강압적 영향력을 확대한다. 그 결과, 각 계층의 구성원들은 자신보다 한 단계 높은 계층에서 유행하고 있는 생활방식을 자신의 이상적 품위기준으로 받아들인 후 그 이상에 부합하기 위해 전력을 쏟아붓는다. 실패할 경우 자신의 명성과 자존심이 실추된다는 각오로 .... 공인된 규범에 맞추어나가야 한다." - <유한계급론>, 소스타인 베블런 지음, 한성안 편역, 2008, 지만지 고전선집
 
과시소비, 모방소비, 공포소비 등 '사회적 소비'는 우리 사회의 자원을 크게 낭비할 뿐 아니라 과로와 가계빚의 원인이 된다. 쓸데없이 우리는 너무 많이 일하고, 너무 많이 소비하고 있다.

주류경제학자들은 전통적으로 경제활동을 생산, 분배, 소비로 국한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경제활동은 내부적으로 소화되지 않고 외부에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폐기'! 우리의 세 가지 전통적 경제활동은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시스템 외부로 배출하고 있다. 

사회적 소비는 미시경제적으로 지극히 비합리적이다. 과로와 빚의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거시경제적으로 볼 때도 비합리적이긴 마찬가지다. 자원의 낭비를 초래할 뿐 아니라 엄청난 폐기물을 배출해 경제시스템 자체를 망가뜨리고 만다.

이걸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 부담은 고스란히 내 자식과 손주에게 넘어간다. 뜨거워지는 지구, 그래서 내 자식과 손주들이 살 수 없는 지구를 상상해 보라. 사회적 소비는 얼마나 '이기적인' 소비인가!

이런 점에서 '경제적'이면서 '실용적'인 소비는 윤리적인 소비다. 그런 소비를 우리는 '정의로운 소비'라고 불러도 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된 것"이라고 성서는 일갈했다. 지구가 급속도로 뜨거워진다고 하니, 나의 작은 실천이 하나라도 보탬이 되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페이스북에 게재한 글을 다듬었습니다.



유한계급론 (천줄읽기)

소스타인 베블런 (지은이), 한성안 (옮긴이),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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