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사들어온 마을내가 사는 마을이다. 우리집은 집들 사이에 둘러쌓여 있다. 그저 주택이나 아파트이냐의 구분만 할 줄 알았지 자세히 보지를 못했다. 이렇게나 다닥다닥 가까이 붙어있는지를 왜 몰랐을까!
김은아
나만 몰랐다
나만 몰랐을 뿐 앞집, 뒷집, 옆집, 윗집 어르신들은 내가 짐을 나르고 정리하는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계셨다. 새벽 6시부터 오후 5시까지 짐을 정리하고 움직여도 일이 줄어들지 않았다. 더는 못하겠어 후닥닥 씻고 낙지처럼 바닥에 쫙 붙어 열을 식히고 있었다. 축 처져 바닥에 찰싹 붙어있는 나를 누군가 계속 부른다. 마당에 나가보니 앞집 어르신, 용이 할매시다.
이게 웬일인가? 그제야 나는 알았다. 우리 집 마루에서 3m 거리면 용이 할매네 주방 창문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 집 마루에서 주방에 있는 용이 할매와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순간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아뿔싸! 이렇게 가까이에 우리가 붙어살다니....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밥도 못 먹었재? 우리 집에 밥 묵으러 와라. 후딱 와라."
처음 만난 이웃인 용이 할매의 환대에 반응이 없자 용이 할매는 수차례 주방 창 너머로 날 부르셨고, 난 결국 할매집으로 갔다.
"이사한다고 밥이 어디겠나.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지? 고생한다. 이사하는 게 쉬운 게 아니야. 짐 정리하려면 시간 걸리는데 뭐라도 먹어야 정리를 안 하겠나. 우리 사위가 바다에서 한치를 잡아 왔다. 먹어봐라."
용이 할매는 날 보고 엄마라 불러라 하신다. 친정엄마와 나이가 비슷하지 않을 거냐며 말이시다. 앞뒤로 살 뿐 사실 그녀와 나는 처음 만난 사이인데 그녀는 나의 춘양엄마가 되어준다며 정을 듬뿍 주었다.
"네, 어머니. 춘양에 엄마가 생겼네요. 춘양 엄마라고 부를게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용이 할매는 한치를 회를 쳐서 한 접시를 내어주셨고, 난 달콤하고 부드러운 한치를 게눈 감추듯이 먹었다. 종일 지칠 대로 지친 나의 첫 끼니는 사막의 오아시스만 같았다.
내가 변했다
나는 타칭 차도녀이자 얼음공주이다. 첫인상이 그렇단다. 봉화에 처음 왔을 때, 직원들도 외부 기관 사람들도 너무 도시 사람 같다며 봉화에서 얼마나 견딜 수 있으려나 걱정을 많이들 했다. 옷차림부터 말투까지 봉화와는 너무 다른 이질감이 있다며 나를 보는 사람마다 한마디씩 했다.
"아이고야. 거 봉화서 살겠습니껴."
나는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상대가 자발적으로 사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 이상 절대 먼저 묻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다. 낯선 이들과는 간단한 인사 이상의 대화를 하지도 않는다. 같은 동네에 산다고 남의 집에 가거나 내 집에 사람을 들이지도 않는다. 그리고 남의 집에 가서 밥을 먹지도 않는다.
어떤 면은 차갑고 또 어떤 면은 깍쟁이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이 바로 나다. 그러나 이 모든 틀이 깨졌다.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던데 어쩌나? 죽어야 살 수 있다는 말이 진리다. 죽는 것이 나쁘란 법도 없다.
내가 변했다. 얼떨결에 낯선 이의 따뜻한 밥을 받아먹었고 그녀와 난 '구두상 가족관계'가 되었다. 그렇게 나에겐 춘양 엄마들이 생겨났고, 그녀들의 삶의 패턴에 나도 모른 채 젖어 들기 시작했다.
그것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킬지는 그때는 미처 몰랐었다. 젊은 사람이 왔다며 어르신들은 나를 신기해했고 참 사랑해주셨다. 어르신들은 각종 채소와 반찬들을 나눠주셨고, 나도 내가 해드릴 수 있는 찾아 해드렸다. 우리의 동거는 계획 없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첫 기사가 나갔다
난 사실 오랜 피로 속에서 피폐해진 나 자신을 위해 돌파구를 찾고 있었다. 생각의 시선을 전환할 그 무언가를 말이다. 뭔가에 홀린 듯 오마이뉴스에 회원가입을 하고 즉시 글을 써서 송고했다. 이게 웬일인가? 바로 다음 날 기사가 되었고 기대조차 하지 못했던 시민기자가 되었다.

▲첫 기사나의 첫 기사가 채택이 되었다. 몇 번을 들여다보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처럼 기뻤다. 처음은 그렇게 강렬하게 기억되는 법인가보다.
김은아
시민기자로서 첫 데뷔를 마친 나는 춘양의 일상들을 담아내기로 했다. 예상치 않은 할매들과의 동거까지도. 그러다보니 변하지 않을 것만 같던 나의 칼 같은 성격이 변했다. 일상을 글로 담다 보니 예전 같으면 남의 집에 불쑥 들어가지도 못하는 내가 취재(?)를 위해 할매들 안방까지 들어가 눕기도 하고 밥도 얻어먹는다.
어르신들이 우리 집 방까지 쑥쑥 들어오시는 것도 더 이상 불편하지만은 않았다. 사람은 변한다더니 낯선 이들과 같이 부대끼며 살아보니 나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좋은 점이 훨씬 많았다.
☞ 연재 기사 보러 가기 :
보그(Vogue) 춘양 https://omn.kr/2065f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다
하루는 내 집 마당이 하도 더러워서 두고 볼 수 없다며 용이 할배가 풀을 뽑고 계셨다. 그렇다. 할배집 창문을 열면 바로 우리 집 마당이 보이는데 심난한 텃밭이 어르신들에겐 시각공해였을 것이다. 결국, 용이네 어르신들이 출동해서 순식간에 마당은 정리되었다. 용이 할배는 손이 어찌나 바지런하신지 그 지저분한 마당을 아주 아주 깨끗이 만드셨다. 어설픈 날 보고 할배는 말씀하신다.
"봄 되면 내가 나물이랑 심어줄 테니까 그냥 뜯어만 먹어. 아무것도 할 줄 모르잖아."
"넵."
예스 땡큐다. 내가 할 줄 아는 게 없기도 하고 뜯어 먹어봐야 얼마나 먹겠는가.

▲지저분한 나의 텃밭보다 보다 못하신 용이네 할배께서 직접 밭을 정리하기로 하셨다.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어르신은 손도 대지 말라며 아서라 하셨다. 일머리 없는 내가 방해가 되니 말이다. 말씀은 그리하셔도 날이 더우니 일한다 고생하는 내가 자식같아 아버지처럼 말씀하셨을 것이리라.
김은아

▲깨끗이 정리된 텃밭용이네 할배가 말끔이 정리해주셨다. 우측에 보이는 창문이 어르신댁 주방이다. 우린 창문을 열면 서로 소통할 수 있을만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다. 용이네 할매는 주방문으로 내가 별일은 없는지 늘 살피신다. 혹여 어디라도 아픈건 아닌가 나를 살피시는데 나의 춘양엄마를 위해서라도 나는 창문을 활짝 열고 나의 생존을 확인시켜드린다.
김은아
예전의 나 같으면 펄펄 뛰면서 괜찮다고 할 법하지만, 이들의 마음을 알기에 놀라기보다 고마움이 앞섰다. 모든 것이 새롭게 인식되었다. 정말 내가 변한 게 맞다.
어르신들은 내 기사의 주인공들이 되어주었고, 그 글은 많은 독자에게 감동을 주었다. 무엇보다 춘양이라는 지역에 호기심을 갖는 독자들이 늘어갔다. 어린 시절 춘양에서 나고 자랐다는 독자, 춘양역에서 근무했던 역무원들의 쪽지, 춘양에서 한 달 살기를 해보고 싶은 독자, 그리고 일자리를 찾는 사람, 먹거리를 구매하고 싶은 사람 등 다양한 문의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보람이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지역에 사람들이 관심과 애정을 갖다니 말이다.
일기도 기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시민기자! 참 좋은 제도다. 일기를 왜 기사로 쓰냐는 누리꾼도 있지만, 난중일기를 보라. 이순신 장군이 군중에서 쓴 일기지만 그 안에 당시의 역사적 상황이 녹아 국보까지 되지 않았는가. 그것이 일상을 기사로 담는 '사는 이야기'의 마력인 듯하다.
생각의 시선을 전환하고 싶어 시작한 글쓰기. 목적은 이루었다. 이제는 글쓰기가 삶이 되었다. 어차피 시민기자는 정년도 없으니 내가 쓸 수 있을 때까지 쓰면 된다. 물론 편집국이 수락하는 조건으로 말이다.
말린 호박고지같이 소담하고 건조한 나의 글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고, 들깻가루 듬뿍 뿌린 호박 나물처럼 구수하고 맛깔나게 편집해 준, 그리고 무한한 조언과 검토를 해준 편집기자님께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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