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P 라벨
ITP
자급자족의 원칙과 생계를 위한 생산은 트라피스트회의 중요한 원칙이다. 트라피스트 수도사들은 예외 없이 노동을 한다. 기도, 명상, 독서를 제외한 시간에는 수도원 운영과 상품 생산을 위한 일을 하며 하루를 보낸다. 수도원에서 만드는 상품은 다양하다. 맥주, 와인, 치즈, 케이크, 수건, 옷 등이 수도사들의 손에서 빛을 본다.
트라피스트라는 이름이 붙은 상품들은 항상 수요가 공급보다 많다. 하지만 트라피스트회는 성장을 추구하지 않는다. 항상 수도원 운영에 도움이 될 정도만 생산하며 덕분에 트라피스트 상품들은 프리미엄 가치를 가진다. 맥주는 그중 가장 인기가 많으면서 논란을 일으키는 존재다.
맥주는 로마 시대부터 수도원에서 만들어 온 음료였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과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의 많은 수도원이 사라지면서 수도원 맥주도 줄어들었다. 19세기 말 수도원의 이름을 붙이거나 수도원 레시피를 이용한 상업 맥주들이 등장했다.
예를 들어 파울라너, 바이헨슈파텐, 프란치스카너 같은 상업 맥주들과 레페나 아플리겜처럼 수도원 레시피로 일반 양조장에서 생산되는 맥주들이 수도원의 이름을 등에 업고 나타난 것이다. 특히 후자는 '애비비어'(abbey bier)라는 카테고리로 시장에 출시되어 소비자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트라피스트 수도사들은 자신들의 가치가 혼탁해지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며 1998년 국제 트라피스트 협회(ITA)를 결성했다. ITA의 일차적인 목적은 트라피스트 상표(Trappist®)가 불법 혹은 상업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막아 원산지와 소비자를 보호하는 것에 있었다. 또한 수도원들이 원래 취지에서 벗어나 과도한 경제적 이득을 취하거나 잘못된 생산 방식을 추구하는지 감시하려는 취지도 있었다.
ITA는 여기에 자신들의 가치를 높이는 적극적인 방법도 도입했다. ITA의 엄격한 기준을 인증하는 ATP(Authentic Trappist Product) 라벨을 제작한 것이다. 육각형 ATP 라벨은 다음과 같은 가이드라인을 충족해야만 받을 수 있다. 우선 모든 제품은 반드시 수도원 내에서 만들어져야 하며 모든 수도사 혹은 수녀들의 관리 감독을 받아야 한다.
판매 수익은 수도원의 생계 혹은 트라피스트의 목적이나 기부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또한 ATP 라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5년마다 재평가를 받아야 하며 만약 탈락하면 지체 없이 인증은 취소된다.
보석 같은 트라피스트 맥주들
트라피스트 맥주 상표가 붙은 맥주 중 모든 맥주가 ATP 라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 ITA에 소속된 19개의 수도원 중에 트라피스트 맥주를 생산하는 곳은 13개이며, 이 가운데 육각형 ATP 인증을 받은 트라피스트 맥주는 시메이, 오르발, 로슈포르, 베스트말레, 베스트블레테렌, 라 트라페, 트레 폰타네, 틴트 미도우, 엥겔스만, 준데르트 총 10개뿐이다.
ATP 인증 트라피스트 맥주는 원산지뿐만 아니라 트라피스트 공동체적 가치와 품질을 지니고 있음이 보증된다. 트라피스트 맥주는 빛나는 맥주들로 가득하다. 모두 소개하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함께 꼭 마셔봐야 할 4개의 트라피스트 맥주를 공개한다.
라 트라페 콰드루펠

▲라 트라페 콰드루펠
윤한샘
1880년 프랑스 정부에 의해 추방된 라 트라페 수도사들이 네덜란드 브라반트로 망명해 1881년 3월, 버려진 헛간을 수도원 삼아 첫 미사를 진행한다. 수도원의 이름은 코닝쇼벤(Koningshoeven), 왕의 농가를 의미했다. 1884년부터 양조된 맥주는 수도원 재정에 큰 도움을 준 효자로 수도사들은 맥주의 이름으로 '라 트라페'를 헌정했다.
다양한 맥주 중 1991년 태어난 '라 트라페 콰드루펠'은 코닝쇼벤의 명성을 드높인 맥주다. 콰드루펠은 10%의 알코올, 불투명한 브라운 색, 농축된 검은 과실과 수지 같은 향 그리고 묵직한 바디를 지닌 에일이다. 겨울용으로 생산됐지만 세계적으로 대히트를 치며 대표적인 벨기에 맥주 스타일로 자리를 잡았다. 맥주 속에 흐르는 기품이 무엇인지 느끼고 싶다면 반드시 경험해야 한다. 이왕이면 콰드루펠의 원조, 라 트라페라면 더할 나위 없다.
베스트말레 두벨과 트리펠

▲베스트말레 두벨
윤한샘
1794년 벨기에 플란더스 베스트말레에 수도원이 들어선다. 1836년 트라피스트회가 된 이 수도원은 같은 해 맥주 양조를 시작했다. 20세기 초 베스트말레 수도원은 맥주 역사에 큰 획을 긋는 두 맥주, 두벨과 트리펠을 세상에 내놓았다.

▲베스트말레 트리펠
윤한샘
1926년 출시된 두벨은 7% 알코올, 불투명한 갈색, 말린 감초와 캬라멜, 섬세한 수지 향을 가지고 있는 에일로 우아한 바디감을 자랑한다. 1934년 출시된 트리펠은 9% 알코올, 밝고 불투명한 황금색, 멋진 배와 꽃 그리고 수지 향을 지닌 에일로 묵직한 바디감에 대비되는 깔끔한 목 넘김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 스타 맥주다. 진짜 수도원 맥주를 원하는가? 베스트말레의 두 맥주를 절대 지나치지 말길.
베스트블레테렌 12
▲베스트블레테렌12
윤한샘
베스트블레테렌은 구하기 쉽지 않다. 한정된 수량으로 양조장 앞은 이 맥주를 구매하기 위한 사람들로 매번 북적인다. 그만큼 트라피스트 맥주 중 가장 높은 프리미엄을 자랑한다. 1831년 벨기에 플란더스 베스트블레테렌에 지어진 세인트-식스투스 수도원은 1838년부터 맥주를 생산했다.
베스트블레테렌 12는 10.2% 알코올과 불투명한 마호가니 색을 가진 콰드루펠이다. 이 맥주는 트라피스트 맥주의 마스터피스라 할 수 있다. 건포도, 블랙베리, 섬세한 감초, 바이올렛, 구운 빵과 같은 향은 묵직한 바디 속에서 섬세한 결을 만든다.
알코올은 뚜렷하나 지나치지 않고 쓴맛과 단맛은 도드라지나 균형감을 이룬다. 분명한 자기 색깔은 절제와 함께 기품이 되어 돌아온다. 가격은 사악하지만 베스트블레테렌 12의 유혹을 이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장담한다.
자본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1000년 전 성인의 말씀을 묵묵히 실행하고 있는 트라피스트 수도사들은 이 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다. 이들은 노동하지만 소유하지 않는다. 가난은 수도사들에게 빛나는 가치다. 필요한 만큼 생산하고 공동체의 가치를 위해 나눌 뿐이다. 그래서 트라피스트 맥주는 세상 어떤 맥주보다 선하다.
맥주가 공동체를 위한 선물이 될 수 있음을, 맥주 한 잔으로 신에게 다가갈 수 있음을, 백의 수도사들은 보여준다. 기도와 노동이 부족한 이들이여, 맥주로 회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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