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1.14 11:54최종 업데이트 23.01.14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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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고종 황제 ⓒ 위키미디어 공용


조선왕조 스물여섯 번째 왕이며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다양하다기보다는 극단적으로 대립적인 양상을 보인다. "탄식할 정도로 놀아제끼던 자"라는 혹평으로부터, "아쉬움은 크지만... 분명 국정을 미래지향적으로 이끌어가려 한 군주"였다는 호평까지 있다.

정치적 평가의 다양함에도 고종과 관련하여 모두가 인정하는 변하지 않는 역사적 사실 하나가 있다. 커피를 좋아한 군주였다는 점이다. 물론 고종이 우리나라에서 커피를 처음 마신 주인공이라는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픽션이다. 그런데 커피와 관련된 고종의 이야기 중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건이 하나 있다.


바로 1898년 9월에 벌어졌던 이른바 고종 커피독살기도사건이다. 법은 있으나 법치는 없던, 요즘과 비슷한 시절에 벌어졌던 사건이다. 아관파천 시절 러시아어 통역으로 권력자 반열에 올랐던 김홍륙이 권세를 잃자 고종이 마시는 커피에 마약을 넣어 독살을 시도했다.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흥미로운 사건이다.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등 두 번의 정변은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진압되었다. 아직은 청나라의 위세에 눌려있던 일본이었다. 1885년에 청·일 양국은 톈진조약을 맺어 양국 군대의 철수와 출병 시 상호 통고를 약속하였다. 이 사이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열강과의 조약이 체결되었고, 10년 가까운 평화가 유지되었다.

그러던 중 1894년 2월 15일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였다. 고종은 6월 6일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였고, 일본은 6월 8일에 조선에 군대를 보냈다. 서해 풍도에서의 충돌을 시작으로 양국 간에 충돌이 이어졌고,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여 제1차 친일 김홍집 내각을 출범시켰다.

민씨 정권을 축출하고 동학 농민의 지지를 받던 대원군을 추대하였다. 이어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이른바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오랜 폐습인 연좌제, 조혼제, 노비제의 폐지, 그리고 과부재가의 허용 등을 담고 있었다. 척사파 등 보수세력의 비판 속에 이루어진 개혁이었다.

8월 1일에 청나라와 일본 양국의 선전포고로 청일전쟁이 시작되었으나 개전 초기부터 일본의 우세는 돌이킬 수 없었다. 조선은 일본의 영향권 하에 들어갔다. 대원군을 축출한 일본은 제2차 김홍집 내각을 출범시킨 후 1895년 1월 18일 근대적 헌법인 홍범 14조를 발표하였다. 250년 종주국 청나라로부터의 형식적 독립을 선언하였고, 조세법률주의, 죄형법정주의 등이 담겼다.

전쟁은 일본의 압승으로 끝났고 미국 중재 하에 1895년 4월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하였다. 일본의 급성장에 위기를 느낀 명성황후는 러시아와 협력하여 일본을 견제하려 하였고, 명성황후의 영향으로 출범한 제3차 김홍집 내각에는 친러 인사들이 대거 등용되었다. 이에 불안감을 느낀 일본은 낭인들을 동원하여 1895년 10월 8일 국모인 명성황후를 살해하였다.

그해 12월 친일파 중심의 제4차 김홍집 내각에 의해 공포된 단발령은 근대국가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충격적 사건이었다. 1896년 1월 주권을 상징하는 연호를 건양으로 정하였으나 일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896년 2월 고종은 러시아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이른바 파천을 단행하였고, 이에 흥분한 민중들에 의해 김홍집은 광화문 앞에서 살해되었다.

자주적인 근대화의 실패, 제국주의 일본의 급성장,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권 쟁탈 속에서 국정의 주도권조차 고종, 대원군, 명성황후 사이에서 떠돌았다. 서재필, 유길준, 윤치호, 주시경 등이 <독립신문>을 창간한 것이 1896년 4월 7일이었고, 이상재와 이승만 등이 이들과 결합하여 독립협회를 결성한 것이 같은 해 7월 2일이었다. 8월 덕수궁 함녕전에 전화기가 최초로 설치되었다.

대한제국의 출범

1897년 2월 11일 고종은 1년 만에 러시아공사관을 나와 덕수궁으로 환궁하였다. 8월에 연호를 광무로 정하였고, 10월 1일에는 장례원의 청을 받아 황제국을 상징하는 시설 원구단의 설치 장소를 소공동계로 정하였다. 같은 날 의정원장 심순택이 백관을 거느리고 고종에게 황제로 칭할 것을 청하였으나 거절하였다.

거듭 청하였으나 대답은 "억지로 하기 어려운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그만두어야 할 일을 그만두지 않는 것도 옳지 않다. 경들은 빨리 그만두도록 하라"였다. 10월 2일에 심순택 등이 황제를 칭할 것을 다시 청하였으나 "이것은 그대들이 청해야 할 일이 아니다"라고 거절하기를 반복하였다.

10월 3일 심순택 등이 다시 청하자 마지못해 애써 따르겠다고 대답하였다. 같은 날 장례원에서 즉위식 날짜를 음력 9월 17일로 정하였다. 10월 12일 황제즉위식을 거행하였고, 10월 13일 국호를 '대한'으로, 임금을 '황제'로 칭한다고 선포하였다. 대한제국의 출범이다.

미국이 스페인과의 전쟁을 통해 쿠바, 하와이, 필리핀을 점령하던 1898년, 러시아는 부산 절영도(영도)를 점령하려 했다. 1월 21일 군함을 부산에 입항시키고 수병들을 절영도에 상륙시켰다. 조정은 아관파천 이후 친러파 인사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저항을 시작한 것은 독립협회였다. 2월 21일 이상재 등이 상소문을 올려 입헌정치와 자주독립을 주장하였다.

고종과 친러파 정부의 미온적 대응과 러시아의 간섭에 대항하기 위해 독립협회 주도로 만민공동회가 3월 10일 개최되어 1만 명 이상의 시민이 운집, 러시아의 침략을 성토하였다. 3월 12일 2차 만민공동회를 지켜본 러시아는 재정고문과 군사교관을 철수하고 한러은행도 문을 닫았다. 만민공동회의 요구로 일본 또한 점령 중이던 거제도 석탄고기지를 대한제국에 반환하였다. 무력한 정부의 역할을 만민이 대신하였다.

러시아와 일본은 4월 25일 비밀리에 로젠-니시협정을 맺었다. 만주에서의 러시아 권리를 일본이 인정하는 대신 조선에서의 일본의 권리를 러시아가 인정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훗날 미국과 일본 간에 체결된 태프트-가츠라 협약과 유사한 구조였다.

대한제국 정부가 인지하지 못한 이 협약의 체결로 조선반도 내에서의 열강 간 세력의 균형은 잠시 이루어졌고, 자주독립국으로 나아갈 수 있는 환경이 잠시 조성되었다. 자주독립국의 정체를 둘러싸고 입헌군주제 지지세력(개화파)과 전제군주제 지지세력(수구파)이 본격적으로 대립하는 시간이었다.

로젠-니시협정 후 러시아와 일본이 잠시 관망하는 사이 독립협회가 주도하는 개혁파들의 자주민권 운동은 확대되었고, 조선 내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독립협회의 지지를 받는 민중들은 연이어 만민공동회를 열고 대외적으로는 외국의 이권 침탈에, 대내적으로는 연좌법과 노륙법 등 구제도 부활 시도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는 1898년 9월 8일 일본인에게 경부철도 부설권을 허락하였다. 수구파들은 반외세 운동에는 민중의 편이었으나, 민중의 구제도 부활 반대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고종이 버렸어야 할 것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커피를 마시는 고종 황제. ⓒ tvN


이처럼 1898년은 조선왕조 역사의 일대 전환기였다. 대외적으로는 러시아와 일본의 쟁패, 내부적으로는 개화파, 수구파, 그리고 민중의 엇갈린 요구 속에 고종은 지킬 것과 버릴 것을 선택해야 하는 곤경 속에 놓여 있었다.

고종이 버리기로 정한 것 중 하나가 통역관 김홍륙이었다. 김홍륙은 함경도 출신으로 러시아 유학 후 러시아공사관 통역관이 되었다. 아관파천으로 친러파가 권력을 잡은 후 왕명의 출납과 기록을 담당하는 시종원 시종이 된 후 정3품, 종2품, 정2품에 올랐다. 러시아공사관과 궁궐을 오가며 러시아의 이권 획득과 보호를 위한 일에 앞장섰다.

일본 공사나 친일 인사들에게뿐 아니라 윤치호 등 개화 지식인들에게도 경계의 대상이고 조롱의 대상이었다. 공식 학력이 없는 역관 출신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1898년 2월에 일어났던 김홍륙암살기도사건은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앞서 언급한 절영도 조차 요구로 러시아와 조선 사이의 갈등이 첨예한 때였다.

로젠-니시협정 체결 직전인 1898년 4월 21일 <독립신문>은 김홍륙이 러시아공사관 통역사에서 면직되고 후임으로 김희동씨가 임명된 것을 보도하였다. 이후 행적이 없던 김홍륙이 다시 궁궐 출입을 한다는 기사가 6월 30일 <매일신문>에 실렸다. 8월 17일 <독립신문>은 김홍륙씨를 정동대감이라 부르며 그의 높은 위세를 비난하는 편지를 한 독자가 <독립신문>에 전해 왔다는 보도를 하였다.

김홍륙이 세간의 관심 인물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던 중 8월 25일 관보에 김홍륙을 유배하라는 고종의 명령과 그 죄상이 실렸고, 독립협회에서 김홍륙을 제명시킨 사실 등이 <독립신문> <제국신문> <매일신문> 등에 연일 보도되었다.

관보에 실린 그의 죄는 통역을 하며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황제의 뜻과 외국 대표의 뜻을 마음대로 전함으로써 두 나라가 서로 의심하게 만든 것이었다. 이 문제를 보도하며 <독립신문>은 김홍륙이 그동안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권력을 남용한 것을 지적하는 동시에, 그의 죄가 크다 하여도 재판받을 권리는 대소 죄인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므로 재판 없이 유배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런 주장과 세간의 관심 속에 김홍륙은 8월 26일 새벽 전라도 흑산도로 종신 유배가 집행되었다. <독립신문>은 재판 없이 김홍륙의 유배형을 집행한 것에 대해 홍범(헌법)과 조칙(법률)이 정한 재판받을 권리를 무시함으로써 "정부를 위하여 애석히 여기며, 인민을 위하여 불쌍히 여기며, 국가를 위하여 탄식하노라"고 다시 유감을 표하였다. 러시아공사관에서는 외부(외교부)에 김홍륙이 잘못 통역한 부분을 조회하였으나, 외부에서는 응답하지 않았다.

법은 있으나 법치는 없던 시절, 고종이 선택한 것은 통역관 출신 세력자 김홍륙을 제거하는 것이었고, 김홍륙이 선택한 것은 법치를 하지 않는 고종을 커피로 독살하는 것이었다. 고종이 버렸어야 할 것은 통역관 하나가 아니라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리려 기를 쓰던 수구파였다.

현명하지 못한 리더가 초래한 혼란 속에 득을 보는 것은 외세였고, 고통을 견뎌야 하는 것은 힘없는 백성들이었다. 역사는 반복되기에 두렵다. 특히 불행한 역사는.

(유튜브 '커피히스토리' 운영자)

* 다음 연재에서 고종커피독살 기도사건의 전말과 의미를 다룹니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이길상(2021). 커피세계사 + 한국가배사. 푸른역사.
이길상(2022). 고종커피독살 기도사건의 역사적 의미. 한국커피문화연구 제8월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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