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자상 수상1993년 4.3 특별취재반이 한국기자상을 수상하고 찍은 기념사진. 오른쪽부터 양조훈 김종민 고홍철 강홍균 고대경 서재철.
제민일보
- 신문사를 나온 뒤에는 유족 및 시민단체가 참여한 '제주 4·3특별법 쟁취를 위한 연대회의' 상임공동대표로 나섰는데, 진상규명작업에서 특별법 제정으로 방향을 틀게 된 데에는 어떤 배경이 있습니까.
"세계 여러 나라의 과거사 정리과정을 비교 검토한 프리실라 헤이너가 '아는 것'과 '인정하는 것'은 뚜렷한 차이가 있다고 했습니다. '인정하는 것'은 국가가 잘못을 확인하고 시인한다는 것이고, 인정하지 않는 '아는 것'은 진실이면서도 마치 존재하지 않는 양 취급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4·3의 실체를 인정받기 위해선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와 보고서 작성이 절실하다는 판단에서 그 근거가 될 특별법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또 조사결과로 대통령의 사과를 받아내는 것이 이념적 누명 해소의 길이라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 4·3 특별법 제정 당시 마지막까지 쟁점이 됐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1999년 12월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지만, 그 여정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처음엔 20개 조문을 상정했는데, 국회 논의과정에서 팔 다리가 잘리고 몸통만 남았어요. 진상조사와 명예회복 등 달랑 11개 조문만 남고 국가추념일 지정, 재심 규정, 재단설립 등의 근거조항이 다 잘려나갔으니 유족회와 시민단체 등에서 '반쪽 특별법'이라며 당연히 반대했죠. 그럼에도 그 '허술한 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유족회와 시민단체를 설득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특별취재반 당시부터 4·3 현안을 풀기 위해서는 단거리 선수가 아닌 마라토너의 인내와 끈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해왔습니다. 특별법은 그후 4·3 희생자 범위에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수형자'를 추가하는 등 개정됐어요. 결국 그 허술한 법에서 탈락한 규정들을 차근차근 모두 복원해 오늘의 4·3 위상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4·3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양조훈은 다시 진상규명 작업에 나서게 된다. 특별법에 따라 구성된 4·3위원회 수석 전문위원으로 2년 간의 진상조사와 6개월 동안의 보고서 작성 실무책임을 맡게 된 것이다. 4·3 특별취재반이 금기의 벽을 깨뜨리는 작업이었다면, 이번에는 국가 차원의 조사작업이었으니 중압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마침내 2003년 12월 정부 차원의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나왔다.1988년 제주신문의 특별취재팀 출범으로부터 따지면 15년 만의 일이었다. 한국현대사에서 특별법에 의해 작성된 최초의 정부보고서에 대해 양조훈 스스로는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
"4·3위원회나 진상조사기획단에 국방부, 경찰청, 보수단체 등도 참여한 갈등구조를 뚫고 이뤄낸 것이어서 더없이 소중한 결과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갈등구조를 극복할 수 있었던 데는 이념보다 인권을 중심으로 조명했던 점도 주효했다고 봅니다. 보수단체에서 '내란 은폐 보고서는 인정할 수 없다'면서 헌법소원을 제기했지만 각하된 일도 있었습니다. 정부 차원의 진상보고서는 법률의 절차에 의해 확정된 법정보고서로 임의로 수정이 불가합니다. 또 사적 영역이 아닌 공공영역에선 이를 따라야 하는 구속력이 있지요.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과거사 규명작업의 업적 뒤집기를 노골화했지만 법정보고서여서 한 줄도 고치지 못했어요. 그 전인 2004년에는 국방부가 펴낸 '6·25 전쟁사'에서 이를 무시했다가 혼쭐이 난 끝에 35군데를 고친 수정본을 발간한 적도 있습니다. 진상조사보고서가 나온 후 노무현 대통령의 공식사과를 이끌어낸 점도 매우 뜻깊은 일이었습니다."
- 진상조사보고서의 위상은 확고하다고 하지만 최근에도 4·3위원회에 4·3을 폄훼해온 극우 성향의 인사가 위촉됐는가 하면, 4·3 수형자 재판과정에서 사상검증 논란이 있었고, 교과서에 4·3 관련 기술 근거를 삭제한 2022 개정교육과정이 확정되는 등 4·3과 관련한 시비가 잊힐 만하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항공기 운항 중 이상기류를 만나서 기체가 불안정하게 요동치는 격입니다. 이명박 정부에선 항공기를 회항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박근혜 정부 역시 과거사에 부정적이었지만 2014년 '4·3 희생자 추념일'을 법정기념일로 지정했어요. 이런 전례를 볼 때 새로운 도전이 있을 수 있지만 단합해서 응전하면 극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근본적인 원인은 아직도 '이념이 절대 가치'라고 여기는 맹목적인 집단이 존재하기 때문이죠."

▲워싱턴 4.3 심포지엄2022년 12월 8일 워싱턴 윌슨센터에서 열린 '제주4.3과 인권, 한미동맹' 심포지엄에서 발언하는 양조훈 위원. 오른쪽은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미국대사.
제주4.3평화재단
- 말도 꺼내지 못했던 4·3의 진상이 어느 정도 드러나고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진행되는 과정에까지 왔습니다. 기적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여기까지 온 원동력은 무엇이었다고 보나요. 그리고 남은 과제라면 어떤 게 있을까요.
"먼저 남은 과제로는 미국의 책임문제와 4·3의 올바른 명칭을 찾아주는 정명(正名) 등 난제가 있고, 또 현재 진행중인 보상문제로 새로운 갈등을 유발해선 안 될 것입니다. 미국의 책임문제와 관련해서 2019년 뉴욕 유엔본부에서, 지난해에는 워싱턴에서 한·미 전문가들이 모인 심포지엄을 개최한 바 있습니다. 또 4·3 평화재단에서 미국현지 자료를 수집하기도 했고요. 한·미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4·3 당시 미국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인식을 널리 확산하고, 인권적 관점에서 미국정부가 희생자 추모 등 성의있는 조치를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4·3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데 대해 저는 과유불급, 지나치지 않으면서 꾸준하게 한 계단 한 계단 밟아온 것이 주효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자세가 더디게 보일 수도 있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기적같은 일을 성취할 수 있었던 원동력 아닐까 합니다."
제주사람 양조훈이 걸어온 4·3 이야기는 3시간이 지났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4·3과 관련해 < 4·3은 말한다>(공저)를 비롯해 많은 책도 발간했고, 한국기자상(특별취재반) 송하언론상 제주문화상 아시아태평양조정포럼(APMF) 평화상을 수상하는 영예도 누렸다. 마지막으로 요즘의 심경과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봤다.
"4·3 진실찾기 작업이 모두에게 박수만 받는 일은 아니었어요. 때로는 모멸감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는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기도를 하죠. 돌이켜봐도 4·3은 제가 선택했다기보다는 운명처럼 다가온 것이었습니다. 4·3 75주년이 바로 제 나이이기도 하지요. 이젠 후배들에게 맡기고 뒤에서 도와주고 격려해주는 역할을 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작가 현기영은 양조훈의 저서 < 4·3, 그 진실을 찾아서>가 발간되었을 때 "양조훈은 온갖 협박과 비난, 방해의 완강한 벽을 뚫고 4·3 진상규명의 대의에 일생의 절반을 바쳐 헌걸차게(당당하게) 살아온 이름"이라고 했다. 잘 어울리는 헌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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