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06 06:57최종 업데이트 23.02.06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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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몇 년 전 8월에 흙집과 관련된 책 하나를 주문해서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 뭔가 조짐이 불안했다. 하지만 흙 부대를 쌓아서 리모델링한 집이 완벽한 실패로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터라 '설마' 했다.

그런데 남편은 농사를 지으며 8월 한 달 내내 그 책을 반복해서 3번을 읽었다. 공포스러운 사건이 곧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남편의 행동을 빈틈없이 감시하는 한편 매일 통장의 잔고를 체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남편이 비록 주변 사람들에게 '경솔의 아이콘'으로 유명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책 한 권 읽고 흙집을 짓겠다고 나서지는 않겠지, 하고 생각했다. 책 하나 읽고서 흙집을 지을 수 있다면, 세상은 온통 DIY 흙집으로 가득 차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밤송이들이 살짝 벌어지기 시작할 때쯤 남편은 갑자기 한옥학교에서 사용한 수공구와 전동공구들을 창고에서 꺼내 점검하기 시작했다. 기계톱과 전동대패를 어루만지며 실실 웃는 남편을 보니, 뭔가 엄청나게 큰 암흑의 회오리가 들이닥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우와! 기계톱과 전동대패 멋지다. 이걸로 한옥학교에서 일한 거야?"
  

남편이 대팻날을 갈기 위해 전동대패를 분해 중이다. ⓒ 노일영

 
남편은 1/3이 어른이고 1/3이 질풍노도의 사춘기 청소년이며 나머지 1/3은 알 수 없는 뭔가로 구성돼 있다. 그런 남편이라 이럴 때는 적당히 비위를 맞춰 주며 구슬리거나 외계인과의 첫 만남처럼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남편은 고개를 휙 돌려 나를 쳐다봤는데 어이없게도 거만한 표정이었다.

내가 어이없다고 표현한 것은 남편이 한옥학교 6개월을 못 버티고, 졸업을 한 달 앞두고 자퇴했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표정이면 몰라도, 거만한 얼굴을 내게 들이밀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멋지지? 이걸로 나무도 자르고 대들보도 깎아 만들고, 안 한 게 없다고."
"쿨하네. 근데 곧 밤을 주워야 하는데, 이것들은 왜?"


남편은 말없이 내 눈을 잠깐 쳐다봤고, 나는 그 눈빛에서 많은 것들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뭘 하려는지 대강은 감이 왔는데, 남편도 갈등 중인 것은 분명했다. 이 지점에서 너무 닦달하면 남편은 궤도를 벗어나 저 멀리 안드로메다 은하계로 날아가 버릴 것이 뻔하다.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일단 밤부터 줍는 게 어떨까? 지금 뭘 시작하면, 밤 줍기가 힘들어서 회피하는 꼴이 되는 거니까, 좋은 모양새는 아니지. 대의명분이 부족해, 안 그래?"

전해, 남편은 밤 줍는 것을 많이 힘들어하며, 이제 이런 일은 하고 싶지 않다고 투덜거리곤 했다. 이 부분을 공략하면 남편의 계획을 잠시 미룰 수 있을 것 같았다. 밤 줍기가 싫어서 흙집을 짓는다는 건 누가 들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밤농사는 시골에서 그나마 손쉬운 돈벌이가 아닌가! 남편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말이야, 올해 밤을 줍는 것보다는 내 계획을 실행하는 게 살림에 더 보탬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래도 뭐 밤을 다 줍고 나서 시작해도 그다지 늦은 건 아니니까···. 아무튼 당신은 너무 근시안적인 사고방식이랄까, 뭐 그런 게 있어. 좀 고쳐야 한다고."

일단은 남편이 한발 물러나는 것으로 대화는 대충 마무리됐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요랬다조랬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남편이다 보니, 한 달 보름 정도 밤을 줍고 나면 마음이 바뀔지도 몰랐다. 그리고 밤농사가 끝나면 체력이 달려서 집짓기는 엄두도 못 낼 거라 생각했다.

돌 옮기고 쌓는 사이 밤은 비오듯 쏟아지고

밤 줍기가 시작되고 일주일 정도가 지난 9월 중순, 엄마가 사는 집의 마당 빈터에 동그란 원 2개가 페루의 나스카 유적 지상화처럼 그려져 있었다. 동심원을 만든 원 2개 위에는 하얀 석회 가루도 뿌려져 있었다. 나스카 유적에 대해 아직도 정확한 설명이 불가능하듯이, 이 2개의 원에 대해서도 미스터리 그 자체로 남겨 두고 싶었다.
  

석회 가루를 뿌린 원 2개. 이 원 위에다 흙집을 만들 예정이다. ⓒ 노일영

 
"어때? 멋지지 않아?"

안쪽 원의 지름이 5.5m, 바깥쪽 원의 지름이 5.9m인 동심원이 뭐가 멋지다는 것인지 남편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뭐야?"
"이 위에다 동그란 흙집을 세울 거니까, 땅으로 옮겨진 일종의 도면이라고 할 수 있지. 어차피 요즘은 밤이 많이 안 떨어지니까, 오전에는 밤 줍고 오후에는 돌을 좀 주우러 가자고. 산에서 밤도 줍고 돌도 줍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부아를 삭이기 위해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돌은 왜? 밤은 주워서 농협에 내면 돈이라도 주지, 돌은 어디다 팔려고?"
"파는 게 아니라 돌로 기초를 만들어서 그 위에다 흙집을 세워야 하거든. 멋지겠지?"


남편은 이미 현실을 벗어나 멋지게 완성된 흙집이 존재하는 가상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 세계에는 밤나무도 없고 가족도 없는 듯했다. 내가 예상하는 바로는 남편의 가상 세계에서 현실 세계로 흙집이 옮겨지면, 분명 미완성인 채로 폐허로 변할 것이다. 하지만 더는 남편을 말릴 수 없는 상태였다. 아무리 말려도 어차피 시작할 것이고, 더구나 남편은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오전에는 밤을 줍고 오후에는 산에서 굴러다니는 돌들을 집으로 가져온 지 4일 정도가 되자, 남편은 크고 작은 돌들을 두 개의 원 사이에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약속한 대로 나는 산에서 돌을 옮기는 작업만 도왔을 뿐, 냉정한 관찰자 겸 냉혹한 비평가로 변해 남편의 행동을 하나하나 지켜보며 악담과 참견을 늘어놓았다.

"어이구, 저 저주받은 손 좀 보소. 그 돌은 거기에 가면 안 되지. 거기는 더 큰 돌이 놓여야 균형이 맞지. 저 손을 갖고 뭘 하겠다고, 쯧쯧쯧!"
  

기초로 놓은 돌에다 시멘트 모르타르 처리를 끝낸 상태 ⓒ 노일영

 
내가 뱉는 비아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편은 이틀에 걸쳐 돌을 쌓은 뒤, 시멘트 모르타르를 발라서 돌들을 고정했다. 내가 보기에도 제법 그럴듯한 돌 기초 작업이 끝난 듯했다.

"돌 기초 작업도 마쳤으니, 기왕 시작한 김에 바로 벽체 올리면 안 될까?"

남편은 애원하듯 내게 물었다. 돌을 옮기고 쌓는 사이 밤은 비가 오듯 후두두 쏟아지며 산을 뒤덮고 있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함양타임즈에 함께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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