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안 표결 처리를 강행하려 하자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의장석으로 향하는 통로를 막고 문희상 국회의장을 향해 '민주주의는 죽었다, 독재가 시작되었다'라고 적힌 피켓을 던지는 등 거칠게 항의하고 있다.
남소연
그러면 정치인들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후안무치한 행패를 부리는가?
국회를 독점한 담합정치형 정당 체제가 상당한 역할을 해 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평소에는 여야 거대 양당이 서로 몰살하려는 듯이 격하게 부딪치지만, 제3자(신생정당)로부터 잠재적 도전을 받을 것 같으면 갑자기 돌변하여 서로 뭉쳐서 공범이 된다.
2019년에 선거법을 개악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군소정당인 정의당 소속 심상정 의원이 비교적 발전된 선거법 개정안을 겨우 발의했다. 그러나 먼저 더불어민주당의 1차 사보타주로 그나마 25%(75석)로 늘린 비례대표 몫을 다시 원점인 15%(47석)로 되돌렸고, 이 중 겨우 30석만 지역구 의석에 연동시켰다. 이런 최소한의 개선조차 거부한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은 21대 총선을 앞두고 2차 사보타주로 비례대표제를 우회하기 위해 가짜정당을 출현시켰다.
하다못해 더불어민주당도 위장정당을 만들어 두 당 사이에는 다시 한번 바닥치기 경쟁이 벌어짐으로써 개혁의 마지막 일부조차도 와해시켜 버렸다. 개혁의 초토화에 대한 책임 공방은 두 거대 정당이 공개적으로 서로 탓하는 희극으로 상연됐는데, 속으로는 자기들만의 정당 카르텔을 지켰음을 서로 축하했을 만했다.
이런 민주주의와 국민을 무시한 오랜 담합정치의 병폐가 도를 넘은 지 오래됐고, 이제는 더 수술을 미루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왜곡된 개정으로 퇴보한 선거법은 기로에 서 있다. 후퇴해서도 안 되고 이대로 진행되어도 안 된다. 돌파구는 확고하고 획기적인 진정한 선거법 개혁이어야 한다. 위성정당을 확실히 차단하는 진정한 비례대표제의 도입이 안성맞춤의 해결책이다.
300석인 의원 정수를 유지하되 연동된 지역구 국회의원과 비례대표 국회의원의 의석 비율을 적어도 2:1 수준으로 해야 비례대표제의 효과가 나타난다. 정당 득표율에 비례하여 의석수를 할당하는 방식으로 득표율과 실질 대표율 간의 비례성을 높여야 국민의 의사가 더 정확하게 반영되고 그 결과도 더 공정해진다.
군소정당과 신생정당의 원내 진출을 수월하게 함으로써 정당 다원주의를 촉진하고, 또 이로써 사회의 다양한 집단이나 지역의 이해관계를 보다 잘 대표할 수 있다. 아울러 다당제가 형성되면 연립정부 등 타협과 협업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유인구조가 조성되고, 이로써 양당 기득권 구조의 해체를 비롯한 각종 권력 분산 효과가 나타난다.
지역구는 중선거구에서 다수 대표를 선발하고, 비례대표는 권역별로 득표율에 따라 선발하는 방식을 적용하면 사표도 줄이고 지역주의도 감소시키는 일석이조의 상승효과까지 누릴 수 있다.
물론 5% 이상의 득표율이나 지역구 의석 3석 이상의 확보가 의석 할당의 전제조건인 기존 문턱 조항을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정당 난립을 방지할 필요가 있다. 대신 풀뿌리 정당정치를 활성화하기 위해 정당 설립요건을 대폭 완화하고 지구당을 합법화해야 한다. 헌법 제8조에 의하면 정당이 "국민의 정치적 의사 형성에 참여하는 데 필요한 조직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내에 진출하는 다양한 정당 운영에 필요한 자금은 기존과 달리 정당 득표율에 비례하여 국고보조금을 배분하는 공정한 할당 방식이 요구된다.
76년 전에 이미 도입 논의

▲24일 새벽 국회 본회의에서 2023년도 예산안이 의결 통과된 뒤 본회의가 끝난 뒤 본회의장 문이 닫히고 있다.
연합뉴스
이러한 비례대표제 도입에 반론이나 회의론은 있을 수 있지만, 학계와 시민사회 전문가 대개는 확장된 비례대표제의 도입에 동의한다. 여론조사들을 보면 국민들 다수도 대체로 찬성하는 편이다.
실은 한국에서 비례대표제는 그리 낯선 것도 아니다. 무려 76년 전인 1946년 10월 12일 미군정에서 창설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의원들이 나중에 제헌의회 의원 선거법의 원형이 된 선거법을 심의했는데, 그때 비례대표제를 비롯한 여러 대안을 깊이 있게 검토했다. 결국 다수대표제를 채택하기는 했지만 의미 있는 과정이었다.
당시 다수대표제를 채택한 것은 대체로 국민들이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이해가 미숙했고 정당정치는 아직 정착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정치 선동에 의한 오도와 정당 난립으로 발생할 수 있는 불안정을 우려한 것이다.
비례대표제라는 개념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속기록뿐만 아니라, 이후 제헌의회 의원 선거법을 최종 제정한 UN 한국위원회의 기록에도 나온다. 비록 시기상조로 여겨지기는 했지만 비례대표제가 진지한 대안으로 검토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김붕준 의원이 선거법안을 설명하면서 언급한 "여하튼 비례대표제를 장래에 기대"한다는 희망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그 '장래'가 된 70여 년이 지난 지금의 한국인들에게 크게 울리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그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현재 한국에서 비례대표제의 도입은 특히 2024년 22대 총선을 앞두고 시의적절을 넘어 시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움직이면 안 된다. 이번 정치개혁만큼은 생선가게를 전적으로 여의도 길고양이들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 개정 과정을 감시하고 부적절한 정치공학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언론, 시민사회와 주권이 있는 국민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 이 글은 모두 필자가 한글로 작성했으며 편집자가 약간의 교정·교열만 했음을 밝힙니다.
▲하네스 모슬러 / 뒤스부르크-에센대학교 교수(소셜 코리아 운영위원)
하네스 모슬러
필자소개 : 이 글을 쓴 하네스 모슬러는 독일 뒤스부르크-에센대학교 (University of Duisburg-Essen) 정치학과와 동아시아연구소(IN-EAST) 교수이며, <소셜 코리아> 운영위원입니다. 관심 분야는 한국정치와 사회이고 최근의 연구주제는 선거제도, 개헌, 기억의 정치, 시민교육, 포퓰리즘 등입니다. 최근 저서로는 <Politics of Memory in Korea>(편저), <South Korea's Democracy Challenge>(편저), <The Quality of Democracy in Korea>(공편저)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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