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2.21 17:47최종 업데이트 22.12.21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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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식탁'은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의 음식을 소재로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봅니다. [편집자말]

1945년 캘커타 폭동. 인도 파키스탄 분단의 와중, 인도 전역은 폭력 사태에 접어들었다. ⓒ 국립 간디박물관


1947년 8월 15일 인도가 독립을 선언했고, 그보다 하루 앞선 8월 14일 파키스탄이 독립을 선언했다. 분단의 기준은 간단했다. 지역별 인구 조사에 근거해 힌두가 많으면 인도연방, 무슬림이 많으면 파키스탄. 하지만 세상은 이런 간단한 원칙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영국 직할 지역은 그나마 문제가 없지만 비 직할지, 360여 개에 달하는 영국령 보호국은 그 땅을 다스리는 지배자 입장도 중요했다.

인도 남쪽 한가운데 있는 골콘다 왕국(현 안드라 프라데시주 일대)의 술탄은 무슬림이었기에 파키스탄의 일원이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인도로서는 내륙 한가운데 이슬람 국가가 생긴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 이 지역은 인도군이 진입해 합병해 버렸다. 


오늘날까지 시끄러운 카슈미르는 인구 다수가 무슬림이었으나 통치자인 마하라자가 힌두인 경우에 속한다. 분할 독립의 조건상으로는 카슈미르는 파키스탄이 되는 게 맞지만, 왕 입장에서는 지위 보전이 중요했다. 인도연방은 왕국들이 인도연방에 가입할 경우 왕이 누리던 특권의 상당수를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 결국 카슈미르는 전쟁까지 거치며 인도연방이 됐고 인구의 다수를 차지한 무슬림 거주민들의 뜻은 무시됐다.

제일 골치 아픈 지역은 동쪽 끝의 벵갈과 서쪽 끝의 펀자브지역이었다. 벵갈은 이미 영국에 의해 주가 분할됐던 전례가 있었고 이에 따라 국경을 나눌 수 있었지만, 펀자브의 경우는 기준이 없었다. 단지 1941년 인구 조사에 따라 서 펀자브의 인구는 약 70%쯤이 무슬림이고, 동 펀자브은 무슬림이 과반에 못 미쳤다. 여기에 펀자브에는 시크교라는 힌두도 아니고 무슬림도 아닌 사람이 400만이나 됐다. 

분할은 영국인 래드클리프 경의 지도하에 두 명의 힌두와 두 명의 무슬림으로 이루어진 위원회에서 단 5주 만에 결정됐다. 그 위원회가 시간에 쫓겨가며 그은 지도의 선으로 인해 3300만 명의 인구가 대이동을 해야 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자국에 남게 된 무슬림과 힌두들에게 재산의 안전과 안녕을 보장한다고 했지만, 그건 밑바닥 정서를 전혀 모르는 정치인들의 낭설에 불과했다. 이미 국경선이 확정되기 전부터 힌두와 무슬림은 서로를 학살하고 있었다. 

국경이 확정되자 파키스탄이 된 땅에서는 힌두가 살 수 없었고, 인도가 된 땅의 무슬림도 그대로는 살기 힘들었다. 둘 사이에 끼어버린 소수 종파인 시크교는 인도연방을 택했다. 자신의 이해와는 전혀 상관없이 지리적 분할이 이루어진 탓에, 시크교를 만든 구루나낙의 탄생지도, 시크교 왕국이 있던 고도 라호르도 모두 파키스탄의 일부가 되는 걸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지정된 짧은 기한 동안 재산을 모두 정리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많은 이주민들은 값나가는 소수의 금붙이와 이동 중 밥을 해 먹을 생필품 정도만 들고 고향을 등져야 했고, 이 와중에 버린 땅이나 집을 차지하기 위한 수많은 음모극이 벌어졌다. 

가장 흔한 방법은 가장 나이 많은 여성을 제외한 온 가족을 죽인 뒤, 그 살인범이 피해 가정의 양자로 들어가 버리는 경우다. 시간이 흐르면 양엄마가 먼저 죽을 테니 모든 재산은 결국 살인범의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살려둔 '인질'이 증언을 하면 혀를 자르면 될 일이다. 어차피 양자로 받아들인다는 수인만 있으면 합법적인 입양을 위한 서류는 완성되고, 혹시나 이 상황을 의심하는 경찰(그 당시엔 있었을 리 없지만)이 있으면 약간의 돈을 찔러주면 됐다.

쌍방에서 오가는 수많은 피난민의 행렬은 최대 수 킬로미터까지 이어졌는데, 이들을 약탈하려는 원주민 집단이 있었고 이주민들은 이들과 싸우면서 앞으로 나가야 했다. 그 와중에 수많은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고, 때로는 자기 집단 내에서 여성에 대한 명예 살인이 이루어졌다.

시크교도
 

2021년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사르다르 까 그랜드선'(사르다르의 손자). 분단의 와중 인도로 떠나온 할머니가 그리워하는 파키스탄의 옛집을 인도로 옮기는 과정을 다룬 영화다. 교차편집으로 당시 상황과 현재를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 넷플릭스


펀자브지역에서 가장 강렬한 폭력 사태가 발생했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2차 대전 당시 영국군으로 근무했다 종전 이후 전역한 군인 중 100만 명이 펀자브지역 거주민이었기 때문이다. 즉 펀자브에는 무슬림, 시크 양측 모두 전쟁 경험자들이 넘쳐났다. 

작게는 20만, 많게는 200만의 사망자가 이주 과정에서 발생했고, 인도 쪽 펀자브지역, 그리고 나아가 델리까지 거대한 피난민촌이 만들어졌다. 분단박물관에서 당시 사진기록을 볼 수 있는데, 현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뉴델리 지구의 후마윤의 무덤도 난민촌으로 쓰였다. 아름다운 무굴식 정원이 가득한 천막촌이라니,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풍경인 셈이다. 

힌두와 시크가 뒤섞인 난민촌에서 시크교도들은 눈에 띄었다. 시크교 전통에 따라 공동 부엌을 운영했던 그들은 그 경험을 되살려 난민촌마다 화덕을 만들고 남녀 구분 없는 협업에 의해 빠른 속도로 음식을 만들어냈다. 카스트 간 섞이는 걸 극히 꺼리기 때문에 가족별로 요리를 해먹던 힌두는 효율 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난리 통에도 망하지 않는 비즈니스 모델은 요식업이다. 시크들은 델리 일대에 식당을 만들어냈다. 물론 식당은 분단 이전에도 있었지만 대중적이진 않았다. 게다가 힌두들은 매식을 꺼렸기 때문에 여행이라도 갈라치면 며칠 치 음식을 만들어 도시락에 넣고 다녔다. 인도의 무더운 여름날 음식이 상하지 않을 리 없었고, 매번 같은 음식을 먹는다는 건 상당한 고역이다. 

눈썰미 좋은 시크교도들은 기차역과 버스정류장 그리고 교차로를 주목했다. 배가 고플 때 무언갈 먹어야 하는 사람들이 항상 존재하는 곳이었고 당시 인도는 이들을 위한 충분한 먹거리 인프라가 없었다.

'다바'는 길거리 식당을 뜻하는 인도말이다. 초기에는 '기사식당' 정도로 주로 물류를 담당하는 마차, 트럭 기사들이 이용하는 식당을 뜻했는데, 이내 길거리에서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탈리(인도 정식) 레스토랑의 표준어처럼 쓰이게 됐다.

무엇보다 시크교도들은 그전까지 인도에 소개되지 않은 강력한 무기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탄두리'라 불리는 진흙 화덕이었다. 맞다. 현재 인도 요리하면 빼놓을 수 없는 화덕인 탄두리는 분단의 산물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유래된 이 진흙 화덕은 애초에 빵을 굽기 위한 용도였고, 현재의 인도 쪽 보다는 현재의 파키스탄 쪽에서 더 광범위하게 쓰였다.

시크교도들은 집단 거주지마다 공동 탄두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시크교도 남성이라면 누구나 탄두리를 다룰 줄 알았다. 그저 통밀로 반죽을 해서 팬에 빵을 구워 먹던 인도인들에게 화덕에서 복사열로 구워진 숙성 반죽의 빵은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웠고 비로소 가정요리와 식당요리 사이의 변별점이 생겨났다.

늘 부인이나 엄마 혹은 집안일을 돌보는 가정부가 해주는 요리만 먹다 규모의 경제에서나 가능한 기름진 요리를 맛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는 매식의 성행, 식당의 성업으로 이어졌다. 

모띠 마할
 

탄두리 치킨이 탄생한 모띠 마할의 바로 그 탄두리 치킨. 원조의 맛은 확실히 다르다. 풍미와 맛, 질감에 있어서 압도적이었다. ⓒ 전명윤


현재 파키스탄 땅인 페샤와르에서 식당을 하는 모카 싱 람바라는 아로라족 출신의 시크교도가 있었다. 길거리에서 자그맣게 시작한 그의 식당은 이내 페샤와르의 명물이 되었다. 요구르트에 절인 닭을 꼬챙이에 꿰서 탄두리에 넣고 구워낸 닭요리 때문이었다.

이때만 해도 탄두리 치킨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승승장구하던 식당은 1947년 인도 파키스탄의 분단 와중에 산산 조각나 버렸다. 창업자인 모카 싱 람바를 비롯해 식당의 주방장과 직원 전원이 난민이 되어 인도로 흘러 들어갔다. 

공포 속에서 파키스탄을 탈출해 기술이라고는 요리와 서빙밖에 없는 젊은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요식업뿐이었다. 식당의 창업주인 모카 싱 람바는 자신이 애써 가꿔온 식당을 파키스탄에 두고 온 사실에 대한 상심이 컸기에 의욕이 없었지만, 자신이 키운 청년들이 '모띠 마할'이라는 상호를 그대로 사용해 탄두리에 구운 치킨 요리를 판매하는 걸 허용했다.

지금이야 모띠 마할이 있는 다르야간즈 지역이 퇴락한 올드 델리의 상징과도 같은 곳으로 변해버렸지만, 이 일대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델리를 대표하는 쇼핑거리에 속했다. 다르야간즈에 본점이 있단 말은 일종의 고색창연한 노포의 상징과도 같다. 이 모띠 마할의 후예들은 운 좋게 다르야간즈의 한 귀퉁이에 작은 식당 터를 찾아냈고 델리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한 화덕에 구운 닭요리를 팔기 시작했다. 

오늘날 탄두리 치킨이라고 불리는, 인도 식당에 가면 반드시 시키는 요리는 이렇게 탄생했다. 모띠 마할의 탄두리 치킨이 얼마나 장안의 화제였냐면 초대 수상인 네루의 연회에도 모띠 마할 주방장들이 불려 갈 정도였다. 심지어 인도의 초대 교육부 장관인 마울라나 아자드는 '델리에 와서 모띠 마할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은 아그라에 가서 타즈 마할을 보지 않는 것과 같다'는 찬사를 바치기도 했다. 

모띠 마할은 탄두리 치킨 외에도 검은 렌틸콩을 이용한 콩 스튜인 '달 마크니'를 탄생시켰으며, 1950년대에 버터 치킨이라는 인도 육식 커리사상 베스트셀러 커리를 만들어 냈다.

버터 치킨은 토마토 베이스의 커리국물 안에 탄두리 치킨 조각이 들어간다. 즉 커리와 구운 닭의 향이 동시에 느껴지는 절묘함이 핵심이다. 이 커리가 탄생한 배경에는 팔고 남은 탄두리 치킨 조각을 재활용해야 하는 식당의 고충이 있었다고 한다. 화덕에 구운 닭이란 시간이 흐르면 건조해지면서 쪼글쪼글해지기 마련인데, 당시만해도 식품, 그것도 육류는 항상 부족하던 시절이라 이 건조해진 치킨에 촉촉한 소스를 스며들게 해 재활용하자는 의도에서 탄생했다는 것이다. 

치킨 티카 마살라
 

모띠 마할의 벽면을 가득 메운 수상 경력들. 요즘 모띠 마할은 전국적 프렌차이즈 레스토랑으로 거듭나고 있다. 하지만 진짜 모띠 마할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다르야간즈의 본점으로 가야 한다. ⓒ 전명윤


이렇게 모띠 마할을 필두로 델리의 식당은 난민들, 정확하게 말하면 펀자브 출신의 시크교도들이 차지하게 됐다. 모띠 마할의 요리는 힌두들에게 무척 독창적인 요리였으나 펀자브에서 나고 자란 같은 고향 사람들에게는 한번 맛보면 따라 할 수 있는 요리였고 탄두리 사용법도 낯설지 않았다.

펀자브 요리가 수도인 델리를 장악하며 펀자브 요리는 수도의 맛이 되었고, 이렇게 만들어진 수도의 맛이 전국으로 퍼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무엇보다 부지런한 시크교도들은 델리를 벗어나 지방의 기차역 주변 식당도 장악하기 시작했다. 

원래 식당 요리라는 게 없는 나라다 보니 지금까지도 펀자브 요리는 인도 식당 요리의 대명사가 되었다. 북인도뿐 아니라 남인도 끝, 타밀나두나 케랄라주를 가도 '푼자비 다바'라고 쓴 식당 한두 개쯤은 쉽게 만날 수 있다. 식당에서 파는 요리를 펀자브 요리가 천하통일 하다시피하니 매끼 식당에서 밥을 사 먹는 외국인 입장에서도 인도 요리는 곧 펀자브 요리가 됐다.

인도 좀 여행했다 하는 사람조차, 그들이 아는 대부분의 인도 요리의 반절은 펀자브에서 유래한 요리다. 탄두리 치킨, 버터 치킨, 달 마크니, 버터 난만해도 거의 전부 아닐까? 마치 중국의 광둥요리가 중국인에게는 중국 요리의 일부일 뿐이지만 외국인들에게는 중국 요리 그 자체인 것처럼, 펀자브 요리도 인도인들에게는 식당에서 주로 먹을 수 있는 북서부 요리에 불과했지만, 외국인들에게는 인도 요리의 대명사가 되었다. 

1960년대가 되자 인도를 제패한 펀자브 요리가 인도 요리라는 이름으로 전세계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파키스탄 사람도, 인도 사람도, 심지어 네팔 사람도 인도 요리라는 이름하에 전 세계에서 펀자브 요리를 만들고 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분단이라는 비극이 가져온, 어쩌면 단 하나뿐인 열매를 우리는 무심히 따먹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글의 시작인 영국의 국민 요리 치킨 티카 마살라는 누가 만든 거냐고? 역시 분단의 와중에 영국으로 이민 간 한 시크교 가족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만들어졌다. 정확히는 버터 치킨의 사촌쯤이라고 봐야 하는데, 깍둑썰기한 닭구이인 치킨 티카의 재활용을 위해 버터 치킨의 제작법을 참고했다고 한다.

원래 이런 노골적인 카피는 표절을 피하기 위해 꽤 정교하게 살짝 다른 재료를 쓰기 마련인데, 본토의 버터 치킨에 비해 치킨 티카 마살라는 덜 맵고 더 크리미하다. 아무리 먹어봐도 차이는 그뿐이다. 그도 그럴 게 베이스가 토마토 페이스트냐 양파 페이스트냐 정도의 차이뿐이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인도 식당들이 파는 버터 치킨은 탄두리에 구운 닭을 써야 하는 원칙을 따르는 집이 거의 없다. 탄두리가 있는 식당도 드물거니와 굳이 인도 요리의 정통을 따질만한 사람도 없기 때문인지라 그냥 커리 국물에 생닭을 넣고 끓여준다. 아직까지 제대로 된 버터 치킨을 한국에서 본 기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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