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으로 가기 전 딱따구리 마리아는 늘 "이만하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어디서든 그녀가 있는 곳이라면 유쾌한 농담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딱따구리 마리아의 생일을 맞아 마을 돈 쎄르히오가 들판에서 주운 소똥에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초를 대신해 꽂아 선물하고 있다. 역시나 딱따구리 마리아는 호탕하게 누워서 선물을 받았다. 불과 1년도 채 되지 않은 시간들인데, 아득하게 느껴진다.
림수진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태연하게 작은 물건들에 손을 대고 마리아에게도 슬쩍 권했지만 그녀 말로는 그 때마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학교에 다니고 있는 딸이 떠올라서 차마 그럴 수 없었다고 했다. 딱 한 번 중국인이 운영하는 에어비앤비 숙소로 청소를 갔을 때 손님이 떠난 방에 작은 코카콜라 두 병이 놓여 있기에 동료와 함께 나누어 마셨는데, 그 날 저녁 여섯 시가 되기 전에 집 주인으로부터 불만이 제기되어 매니저한테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고 하마터면 하던 일을 잃을 뻔했다.
물건을 파손하거나 훔치지 않아도 저녁 여섯 시가 되기까지는 항상 묘한 긴장 속에 있었다. 집 주인이 뭐라고 하면 할 수 있는 말이 오직 "제쓰(Yes)"와 "오우 쏘리(Oh Sorry)" 밖에 없어서 한 동안 그 두 마디로 모든 의사소통을 해결하였는데, 한 번은 당연히 "노(No)"라고 해야 할 상황에서 "제쓰 제쓰"라고 하는 바람에 또한 매니저한테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고 쫓겨날 뻔하기도 했다. 그 이후로 아예 입을 닫아버렸는데 워낙 말이 많아 별명이 딱따구리인 그녀의 미국 생활이 얼마나 고달팠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한국 사람의 집으로도 청소를 간 적이 있는데 다행히 인자한 주인을 만난 모양이었다. 물론 통하지 않지만 손짓 발짓을 다 동원해 자기의 고향 마을에 한국 친구가 있다고 어찌어찌 말을 했는데 일을 하고 나오면서 주인아주머니가 같은 천주교 신자임을 알고 작은 십자가를 하나 주셨다고 했다.
뭐니 뭐니 해도 그녀의 모든 무용담 중 가장 짜릿한 것은 역시나 나이키 사장님 댁 일이었다. 일이 끝날 때마다 팁과 나이키 상품 할인권을 제시하고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했다는데 마리아는 그럴 때마다 상품 할인권을 골랐다. 모든 나이키 가게에서 50%를 할인 받을 수 있는 종이였다.
그렇게 모은 할인권으로 넉 달 동안 자그마치 나이키 신발을 열일곱 켤레나 사 모았다. 이곳에 남겨진 자식들과 친정 식구들 모두에게 몫을 지워 바리바리 싸 짊어지고 돌아왔다. 오직 한 사람, 남편만이 나이키 운동화 수혜로부터 제외되었다.
9천 달러, 마리아의 딴 세상
일주일이 넘도록 나이키 사장님 댁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가끔 그 곳에서 끝내 합법적인 지위를 얻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신산스러운지에 대해서도 전해주었다. 남자들이라면 더 외진 곳에서 더 험한 일을 찾을 수밖에 없고 여자들이라면 합법적 지위가 있는 남자들을 만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더라고 했다. 그들이 떠나온 고향에 남편이 있고 없고는 차후의 문제, 어떻게든 미국에 들어온 그들이 합법적 지위를 얻어야 고향에 남겨진 가족들이 다시 그들을 발판 삼아 올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이다.
마리아가 4개월 만에 다시 이곳 멕시코로 돌아올 때 그녀의 언니부터 그녀를 아는 모든 동료들이 그냥 미국에 눌러 앉을 것을 강권했다. 유쾌한 성격으로 일터에서 늘 흥을 돋우다 보니 청소업체 사장님도 그녀의 귀향을 만류했다. 합법적 서류를 갖춘 남자들로부터 소개팅 제의도 두 건이나 들어왔다고 은근슬쩍 내게 고백 아닌 고백을 했다. "아예 눌러 앉지 그랬소?" 했더니 엉뚱하게도 커피에 핑계를 댄다.
"빌어먹을 맥도날드 커피가 원체 맛이 없어서..."
어쩌면 내년 초, 마리아는 다시 미국으로 갈 것이다. 이 곳에서라면 그녀가 10년을 일해도 모으기 힘든 돈을 넉 달 만에 벌어왔으니, 게다가 100달러 지폐로 팁도 받아봤으니 남은 생 이곳에서 예전과 같이 욕심 없는 마음으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미국에 가기 전, 들판에 나가 도시락을 까먹고 달게 낮 잠 한 숨 자고 일어날 때마다 '이렇게 살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라고 스스로 묻던 그녀가 미국에서 돌아온 뒤 크리스마스를 목전에 두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들판에 나가 아침을 먹다가 뜬금없이 물었다.
"우리 크리스마스 파리(party)를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녀에게, 아무래도 딴 세상이 생겨버린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