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박의 복수병역 면제 판정을 받은 김재박은 육군에 납치돼 통합병원에서 다시 정밀검진을 받은 끝에 현역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김재박은 공군(성무)에 입대해 육군(경리단) 격파의 선봉에 나섬으로써 나름의 복수에 성공했다.
경향신문
병역특례의 시대
하지만 1981년에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는 데 성공하고 엘리트 스포츠를 육성하기 위한 여러 대책들이 발표되면서 야구 선수들에게도 또 다른 선택지가 생겼다. 1981년 11월 7일 <병역의무의 특례 규제에 관한 법률> 시행령을 개정해 올림픽,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대회,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3위 이내로 입상하면 보충역에 편입하고 5년간 현업에서 활동하면 그것으로 병역의 의무를 면제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프로야구가 출범한 뒤인 1982년 12월 11일에는 프로선수로서의 활동도 '현업 활동'의 범위 안에 포함하도록 규정을 확대하고, 시행령 개정 이전까지 소급적용하도록 했다. 그에 따라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최동원, 선동열, 박노준, 한대화 등이 병역 고민을 덜었고 1980년 도쿄에서 열린 같은 대회에서 준우승했던 이만수, 김용남, 박용성 등까지 소급적용의 혜택을 받았다.
하지만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한 뒤 곧바로 프로 무대로 진출한 선수들에게 병역문제는 한층 곤란한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프로선수들이 출전할 수 있는 국제대회가 없었고, 1984년에 상무로 통합된 국군체육부대에서도 프로선수들에게는 입대의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방부장관 출신인 서종철 KBO 총재의 강력한 요구와 그의 부관 출신인 전두환 대통령의 적극적인 화답으로 프로야구 선수들이 방위병으로 복무할 경우 근무 외 시간을 활용해서 경기에 출전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배려가 있긴 했다. OB의 학다리 1루수 신경식으로부터 시작해 이종범과 양준혁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선수들이 각자 소속 구단을 응원하는 향토사단 지휘관과 간부들의 전폭적인 협조와 지지 속에서 위수지역 내에서 벌어지는 홈경기만이라도 출전하는 생활을 이어가며 군 복무를 마쳤고 별다른 공백 없이 전역 후의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역병으로 입대한 선수들의 경우에는 그마저 해당되지 않았다. 프로야구 원년 14승을 기록하며 탈삼진왕에 오른 롯데의 첫 에이스 노상수와 그 해 OB의 3루수로서 우승에 기여한 3루수 양세종 같은 이들이 33개월간의 현역 군복무를 마친 뒤 선수 경력의 급격한 내리막길을 걸었던 것은 그런 고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그나마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인 1995년 국방부가 방위병 신분으로 프로선수 활동을 이어가는 것이 '군인은 영리활동을 하거나 겸직할 수 없다'는 복무규율에 저촉된다는 점을 지적했고, 논란 끝에 이듬해인 1996년부터 전면 금지되는 일도 있었다.
드림팀, 상무, 그리고 현역
숨통이 트인 것은 1998년이었다. 그 해 겨울 방콕에서 열린 아시안게임부터 프로선수들의 출전이 허용되었고 상무에서도 프로선수들의 입단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해 아시안게임에는 미국에서 뛰던 박찬호, 서재응, 김병현을 비롯해 김동주, 박재홍, 조인성 등 병역미필 프로선수들이 대거 출전해 결승전에서 일본을 7회 콜드게임으로 누른 것을 비롯해 압도적인 실력을 뽐내며 금메달을 따내 병역특례 혜택을 받았고, 한화의 임수민이 프로 출신 최초의 상무 선수가 되기도 했다.
이후 프로야구 선수들의 병역 문제 해결 방법은 세 가지 경로로 나뉘게 됐다. 첫째는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국제대회에서 특례 수혜의 자격을 갖추는 것, 둘째는 상무나 2005년부터 2019년까지 운영된 경찰청 야구팀에서 야구 활동을 하며 복무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 셋째는 현역(혹은 상근예비역)으로 입대해서 복무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