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말레이시아 총선이 있었습니다. 개표 결과는 전 부총리 안와르의 희망연대(PH)가 82석, 전 총리 무히딘의 국민연합(PN)이 73석, 말레이시아 독립 이후 가장 오랜 기간 여당을 했던 국민전선(BN)이 30석을 차지했습니다.¹
▲ 2022년 11월 9일에 열린 말레이시아 총선 결과. 말레이시아 선거 역사상 처음으로 과반을 차지한 정당이 나오지 않아 집권여당이 되기 위해 다른 당과 동맹을 맺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 위키피디아
말레이시아는 왕이 국가 원수인 입헌군주제 국가이면서도 정부의 형태는 의원내각제로 실권은 총리가 가지고 있습니다. 총리는 하원의원 과반수의 신임을 받은 의원을 국왕이 임명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번 선거에서는 말레이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의원 과반수를 차지한 정당이 나오지 않아 개표 직후부터 24일까지 어느 당이 집권여당이 되고 누가 총리가 되는 지를 두고 상당한 혼란이 펼쳐졌습니다.
선거 결과만 보면 안와르의 PH가 다수당이지만, 무히딘의 PN이 6석을 차지한 GRS(사바연합)와 23석의 GPS(사라왁연합)의 동맹을 이끌어 내는 것처럼 보여 상황은 PN에 좀 더 유리했습니다. 다만 30석의 BN이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고 야당으로 남겠다고 하는 바람에 안와르와 무히딘 두 명 모두 과반의 지지를 확보하지는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집권여당과 총리를 정하지 못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이 길어지자 국왕은 안와르와 무히딘을 왕궁으로 불러 두 정당의 연립정부 구성을 권고했습니다. 안와르는 그 권고를 받아들였지만, 무히딘은 이미 과반의 지지를 얻었기에 연정할 이유가 없다며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무히딘의 거부는 그가 총리가 되는데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어 버렸습니다. 말레이시아의 국왕은 임기가 5년으로 관례적으로 9개 주의 술탄이 돌아가면서 맡습니다. 실권은 없지만 선거 결과에 따른 총리 임명과 일부 헌법 개정에 대한 거부권, 주요 정부 인사 임명에 대해 협의할 권리 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 선거 결과처럼 승패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 국왕의 판단에 따라 여당과 총리가 결정될 수도 있습니다.
실례로 지난 2020년 마하티르 전 총리가 재신임을 노리고 총리직을 사임했을 당시 그의 기대와는 달리 국왕이 다른 의원들의 의견을 모은 후 무히딘을 총리로 임명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국왕에 의해 총리로 지명된 무히딘이 이번에는 국왕의 권고를 거부하고 연정 없이 단독으로 총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말레이계 무슬림이 다수인 말레이시아에서 정치인들은 일반적으로 술탄에게 맞서는 걸 꺼립니다. 무슬림들은 민족과 종교의 이익을 지켜주는 술탄과 맞서는 정치지도자를 경계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권고가 거부당하자 국왕은 말레이시아 통치자 회의를 소집해 버렸습니다. 말레이 연방을 구성하는 13개 주의 술탄(지방 군주)과 주지사가 모여 논의하는 회의체인데, 이번에는 9개 주의 술탄이 모여 차기 정부의 구성에 대해 의견을 나눴습니다.
이런 국왕의 적극적인 행보에 무히딘의 PN과 동맹을 맺겠다고 했던 소수 정당들이 기존의 입장을 번복하고 국왕의 권고를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BN도 PN을 제외한 정당과 통합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고 입장을 밝히면서 결과적으로 안와르의 PH를 중심으로 하는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쪽으로 결론났습니다.
▲ 말레이시아 새 총리로 임명된 안와르 ⓒ 연합뉴스
통치자 회의를 마친 국왕은 말레이시아의 10대 총리로 안와르를 지명했습니다. 1982년에 정치를 시작한 이래 정치적 박해로 두 번의 수감 생활을 해야 했던 만년 2인자 안와르가 말레이시아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전임 정부의 부정과 부패에 지쳤던 말레이시아 국민에게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모습을 보였던 안와르 정부의 출범은 말레이시아에 새로운 희망을 갖게 해 줍니다. 안와르 총리가 발표되던 그 날 말레이시아 주식시장은 3.82%가 올랐습니다. 안와르 총리에 대한 말레이시아 국민의 기대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수치입니다.
선정적 거짓 혐의로 제거 당한 2인자
올해 75세인 안와르 이브라힘은 1968년부터 1971년까지 말레이시아 무슬림 학생 전국 연합의 회장을 시작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1974년에는 시골지역의 기아 문제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다 체포되어 첫 구치소 생활을 겪기도 합니다.
청년무슬림 운동을 하던 안와르는 1982년 젊은 말레이계의 지지가 필요했던 마하티르 총리의 권유로 당시 집권당이던 암노(UMNO)에 입당한 후 빠르게 정권의 핵심이 되어 갑니다. 총리실 차관과 청년암노 회장을 시작으로 삼십대 중반이던 1983년에 문화청년체육부장관, 1984년 농업부 장관을 거쳐 1986년에는 교육부 장관이 됩니다.
1991년 안와르는 재무장관이 되었고 1993년에는 부총리가 되면서 권력의 정점에 한걸음 더 다가섰습니다. 당시 말레이시아는 전례 없는 번영과 경제 성장을 누렸고 세계도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마하티르의 뒤를 이을 차기 지도자로 모두들 안와르를 꼽았습니다.
하지만 하늘에 태양이 두 개일 수는 없습니다. 마하티르와 안와르의 관계는 1996년부터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마하티르는 금권선거를 없앤다는 명목으로 당내 선거운동을 금지하고 당직후보에 대한 사전 심사를 하도록 했는데 이는 마하티르에게 유리하고 세력을 넓히려던 안와르에게는 불리한 내용이었습니다. 심사를 통해 안와르 측 인사들의 입후보를 원천적으로 막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가 시작되면서 이에 대한 입장 차이를 계기로 둘은 더욱 멀어지게 됩니다. 안와르는 정부 지출과 장관 급여를 삭감하고 주요 프로젝트를 연기하는 등의 긴축 정책을 도입했습니다. 이 때 마하티르의 아들 미르잔 마하티르의 말레이시아 국제 해운 공사에 대한 구제금융을 안와르가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안와르는 IMF 구제 금융이 요구하는 내용을 적극 수용하며 외국인의 투자를 자유롭게 하려고 했지만 마하티르는 금융위기가 조지 소로스와 같은 제1세계 투기꾼들의 농간이라고 비난하며 외환 통제와 외국인 투자에 대한 엄격한 규제를 요구했습니다.
그 와중에 1998년 5월 인도네시아에서 금융위기 대응에 실패한 수하르토가 퇴진을 하자 안와르는 "말레이시아 집권 세력 안에 만연하는 족벌주의와 정실주의가 말레이시아의 발전을 막는 부패의 핵심"이라며 "정치적 개혁을 단행하지 않으면 인도네시아와 같은 상황을 맞이할 것"이라 주장하며 사실상 마하티르의 퇴진을 요구했습니다.
그에 대한 답으로 마하티르는 퇴진 대신 안와르를 몰아내는 걸 선택했습니다. 그 해 9월 부총리와 재무장관에서 해임했고 곧바로 경찰이 안와르에 대해 동성애, 부패, 반역 등의 혐의를 내세워 수사를 시작했습니다.
▲ 말레이시아 안와르 부총리의 해임을 알리는 1998년 10월 타임지 아시아판 표지 ⓒ TIME
안와르는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반정부시위를 주도하며 정치적 개혁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악법 철폐와 언론, 출판의 자유를 주요 의제로 내세우면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안와르의 측근을 구속하고 안와르와 동성애를 했다는 진술을 받아냈습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동성애가 불법입니다. 안와르는 동성애와 부패 혐의로 구속되었는데 법정에 나타난 안와르의 왼쪽 눈이 멍들어 있었습니다. 수감 첫날 라함 경찰청장에게 구타를 당했던 겁니다. 이 소식에 분노한 시민들로 인해 곳곳에서 안와르를 지지하고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은 국제적으로도 크게 이슈가 되어 국제앰네스티는 안와르를 양심수로 규정했고, 많은 국가에서 안와르의 구속에 대해 비판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1998년 당시 미국 부통령이었던 앨 고어는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에 참가해 말레이시아 총리 앞에서 안와르의 개혁 운동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습니다. 함께 간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은 구속 중인 안와르 이브라힘 전 부총리의 부인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 권력의 정점인 마하티르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경찰을 동원해 시위를 진압하고 안와르지지 세력에 대한 제거작업을 계속 했습니다. 1999년 이후 말레이시아 경제가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면서 마하티르에 대한 지지도 함께 상승했습니다. 이로 인해 1999년 총선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퇴진 이야기는 물밑으로 가라앉고 마하티르는 5번째 총리직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반면 안와르는 동성애 혐의로 9년형을, 부패혐의로 6년형을 선고받은 후 2004년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을 때까지 5년 이상을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후 안와르는 영국 옥스퍼드대학과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등에서 객원연구원과 교수직 등을 맡으며 잠시 정치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안와르가 감옥에서 나왔을 때 마하티르는 22년의 임기를 마치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 재직한 선출직 지도자라는 기록을 남긴 채 총리직에서 사임한 이후였습니다.
▲ 안와르의 부인 아지자 이스마일은 안와르가 수감 중일 때 정치를 시작해서 지금의 안와르를 만들어 냈습니다. ⓒ 안와르 페이스북
40년 정치적 박해 이겨내고 드디어
안와르가 감옥에 있는 동안 그의 아내 아지자 이스마일과 딸 누룰 이자흐 안와르가 정치에 뛰어 들어 의회에 진출했고, 안와르는 2008년 보궐선거를 통해 공식적으로 정치를 재개했습니다. 다시 정치를 시작하는데 10년이 걸린 겁니다.
여당의 차기지도자였다가 야당 지도자가 된 안와르는 3개 정당으로 구성된 선거연합 PR(인민동맹)을 이끌고 2013년 총선에 참여해 50.9%의 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당에 유리하게 만들어진 선거구제도 때문에 정권교체에는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안와르의 야당은 의석을 크게 늘렸고 나집 정부는 그런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습니다.
안와르에게 두 번째 동성애 혐의가 씌워졌습니다. 2008년 한 온라인 뉴스사이트에서 안와르의 보좌관이 안와르에게 성교를 당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안와르는 곧바로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2012년 고등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검찰은 항소했고 2014년 3월 보궐선거를 앞두고 있던 안와르는 항소 법원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고, 2015년 2월 연방 법원에서 5년 형이 확정되어 수감되었습니다. 결혼해서 여섯 자녀를 둔 일흔에 가까운 야당 지도자가 동성애 혐의로 두 번이나 수감된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말레이시아 나집 정부는 1MDB 부패 스캔들로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1MDB는 나집 전 총리가 말레이시아 경제개발 사업을 위해 2009년 집권과 동시에 설립한 국영투자기업인데 나집과 측근들이 이 회사를 통해 45억 달러 이상을 유용한 걸로 밝혀졌습니다.
이 때 수감 중인 안와르 대신 마하티르가 다시 정치의 전면에 나섰습니다. 마하티르는 나집 총리의 사임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어 정부를 압박했습니다. 하지만 나집은 총리에게 전례 없는 권한을 부여하는 법을 의회에서 통과시키며 오히려 권력 장악을 강화하는 행보를 보였습니다.
야당은 기존의 PR을 해산하고 PH라는 새로운 야당 연합을 구성해 2018년 총선에 참여했습니다. 수감 중인 안와르를 대신하여 그의 아내가 PH를 주도했는데 마하티르가 여기에 손을 내밀었습니다. 마하티르는 자신이 집권하게 되면 안와르를 빠른 시일 내에 석방하고 그에게 총리직을 물려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안와르는 자신을 정계에 입문시키고 부총리까지 만들어 줬지만 결국 자리를 빼앗고 감옥까지 보냈던 마하티르와 다시 한 번 손을 잡게 됩니다.
▲ 마하티르는 자신이 22년간 총리를 지냈던 정당을 나와 안와르와 손잡고 말레이시아 역사상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뤄냈습니다. ⓒ 마하티르 페이스북
선거 결과는 마하티르와 안와르의 PH가 과반에서 1석을 넘긴 완벽한 승리. 이로써 말레이시아는 역사상 첫 정권교체가 이뤄지고 92세의 마하티르는 다시 한 번 총리가 됩니다. 선거가 끝난 후 일주일 만에 안와르는 사면을 받아 출소했고 그 해 10월 보궐선거를 통해 의회에 진출했습니다. 이제 마하티르로부터 총리직 위임만 기다리면 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마하티르는 사퇴할 생각이 없었고 결국 2020년 초 연립내각 안에서 마하티르를 반대하는 이들의 이탈 움직임이 나타났습니다. 과반에서 1석이 많았기 때문에 의원 몇 명의 이탈과 다른 세력과의 동맹은 정권을 바꿀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움직임을 미리 알았던 마하티르는 2월 전격 사퇴를 선언합니다.
과반수 의원의 지지를 받는 새로운 연립정부가 등장하기 전에 국왕을 등에 업고 재신임을 받는 방법으로 판을 흔들고자 했다는 게 지배적인 해석입니다. 하지만 국왕은 발 빠르게 의원들의 의견을 모아 무히딘 야신을 신임총리로 임명해 버립니다. 사표 반려를 기대했는데 사표 수리와 함께 후임자 임명까지 일주일도 안 걸려 처리해 버린 겁니다.
상황이 급변하자 마하티르는 다시 한 번 안와르에게 손을 내밀었으나 안와르는 거부했고 역사상 처음 이뤄냈던 정권교체는 22개월만에 옛 정권의 세력들에게 돌아가 버렸습니다. 자진사퇴를 한 마하티르는 그렇다 치더라도 총리직 위임을 기다리던 안와르는 총리직 바로 앞까지 갔다가 다시 고배를 마시고 야당이 되어 버렸습니다.
신임투표도 없이 총리가 된 무히딘은 2021년 1월 코로나 사태를 핑계로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의회와 선거를 중단해 버렸습니다. 취약한 지지기반을 숨기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하지만 그 해 8월 안팎으로 사임 요구를 받자 스스로 물러나고 이스마일 야콥이 다음 총리로 취임했습니다.
2년 사이에 두 번이나 바뀌는 혼란스러운 정국이 이어지면서 2022년 11월 조기총선이 치러졌고, 여기서 안와르의 PH가 1당이 되고 앞서 이야기 한 대로 안와르가 총리로 선출되었습니다. 정치 입문 후 40년 만에 오랜 정치적 박해를 이겨내고 드디어 말레이시아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올랐습니다.
▲ 정치를 시작한 지 40년 만에 총리가 된 안와르 이브라힘 ⓒ 안와르 페이스북
한편 안와르와 오랜 애증의 관계인 마하티르는 어떻게 됐을까요? 97세의 나이에도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랑카위에 다시 출마했는데 다섯 명 중 네 번째 성적으로 낙선했습니다. 그가 만든 정당 역시 단 한명의 의원도 배출하지 못했습니다. 마하티르의 시대는 완전히 끝나고 안와르의 시대가 이제 막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