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0.28 14:32최종 업데이트 22.10.28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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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를 꿈꿨던 네로와 충견 파트라슈의 이야기를 담은 <플랜더스의 개>. 플랜더스는 벨기에 플란데런의 영어명이다. ⓒ 닛폰 애니메이션


"먼동이 터오는 아침에 길게 뻗은 가로수를 누비며, 잊을 수 없는 우리의 이 길을 파트라슈와 함께 걸었네. 하늘과 맞닿은 이 길을."

화가를 꿈꿨던 네로와 충견 파트라슈, 이 둘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은 <플랜더스의 개>는 1980년대 어린이들에게 많은 감정을 전한 만화였다. TV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면 우유를 싣고 가는 네로와 할아버지 그리고 파트라슈의 앞날에 좋은 일만 가득하길 기도했다. 가난하지만 성실하고 착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결국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던 시절이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네로와 파트라슈가 살고 있는 마을은 어디일까 항상 궁금했다. 넓은 구릉, 작은 교회와 풍차는 생경하지만 또 어딘가 익숙한 풍경이었다. 성인이 된 후에야 이 만화의 이름이 이미 정답을 알려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네로와 파트라슈가 마지막 잠이 든 안트베르펜 성당이 있는 곳, 북유럽 르네상스의 중심이자 화가 루벤스의 고향 그리고 향기로운 신맛이 가득한 빨간색 맥주를 품고 있는 이곳은 벨기에 플랜더스였다.

벨기에는 맥주 천국의 또 다른 이름이다. 바로 옆 네덜란드는 하이네켄이라는 거대 브랜드가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반면 벨기에에는 작지만 개성을 뽐내는 수백 개의 양조장이 상생하고 있다. 특히 벨기에 북부 플랜더스는 다른 나라에서 경험할 수 없는 독특한 전통 맥주를 갖고 있다. 젖산균과 미생물로 발효한 람빅, 수도원에서 시작된 두벨과 트리펠, 강한 알코올을 자랑하는 벨지안 골든 스트롱 에일 등 벨기에는 맥주 박물관과 같다. 

이런 무시무시한 맥주 사이에 무려 '플랜더스'라는 이름을 라벨에 달고 있는 맥주가 있다. 향기로운 붉은 과실, 입 안을 짜르르 울리는 신맛, 뭉근한 단맛, 농밀한 빨간 색을 지닌 플랜더스 레드 에일(Flanders red ale)이 그 주인공이다. 

지역 전통주에 불과했던 이 맥주를 벨기에 대표 맥주로 만든 것은 로덴바흐 가문이다. 1749년 군인이었던 페르난드 로덴바흐는 퇴역 후 플랜더스 서쪽 지역 루셀라러로 이주한다. 그의 아들인 콘스탄틴, 알렉산더, 페드로 3형제는 1821년 양조장을 운영하던 페드로의 장인이 세상을 떠나자 공동으로 인수하고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맥주보다 더 중요한 것을 만드는 데 힘을 쏟는다. 바로 벨기에였다. 

국가 벨기에의 탄생
 

벨기에 웨스트 플랜더스 ⓒ 위키피디아


벨기에는 여러 열강의 지배를 받는 작은 공국과 백국으로 이루어진 지역이었다. 16세기 초 카를 5세의 합스부르크 치하였고 17세기 네덜란드가 공화국으로 독립했을 때는 스페인령이었으며 스페인 왕권 계승 전쟁 이후에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가 된다. 18세기 후반 나폴레옹에 의해 프랑스 지배를 받다가 1815년 빈 체제에서 네덜란드 공화국과 합병되어 네덜란드 연합왕국이 된다. 

네덜란드 공화국 출신이자 칼뱅 개신교도인 초대 왕 빌렘 1세는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가톨릭을 믿는 남부 네덜란드, 즉 현재 벨기에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프랑스어와 가톨릭을 금지했을 뿐만 아니라 이 지역 사람들을 등용하지 않았다. 게다가 북부 네덜란드에는 적극적인 투자를 한 반면 남부 네덜란드에는 인색했다. 

언어와 종교 탄압 그리고 경제적 차별을 받는 남부 네덜란드의 불만은 쌓여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1830년 프랑스에서 7월 혁명이 발발한다. 이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물러나고 다시 공화정이 수립되자 벨기에에도 혁명의 기운이 전해졌다.

도화선은 빌렘 1세의 생일이었다. 1830년 8월 25일 브뤼셀에서 빌렘 1세의 생일 축하를 위한 오페라가 열렸다. '포르시티의 벙어리'라는 오페라는 하필 스페인에 지배받던 나폴리 사람들의 저항을 담고 있었다. 이 공연 이후 남부 네덜란드 사람들은 거리로 뛰어나와 독립을 외쳤고 마침내 혁명이 시작됐다. 

무력 진압이 무산되자 벨기에 독립 문제는 열강들의 모임인 런던 회의로 넘어가고 1830년 12월 영구 중립국을 조건으로 독립이 인정된다. 입헌군주제를 채택한 벨기에는 정치적으로 열강과 큰 연관이 없는 독일의 작은 공국 출신의 레오폴트 1세를 왕으로 즉위시킨다. 벨기에라는 국가의 탄생이었다. 

벨기에 독립과 맥주를 만든 로덴바흐
 

플랜더스 레드 에일의 원조 로덴바흐 ⓒ 윤한샘


벨기에 혁명이 발발하자 로덴바흐 형제들은 독립 투쟁을 결심한다. 워털루 전투 참전 경험이 있는 군인 출신 페드로는 브뤼셀에서 전투를 지휘했고 맹인이었던 알렉산더는 벨기에 독립의 정당성을 담은 청원서를 통해 대중을 설득했다. 콘스탄틴은 벨기에 초대 왕 레오폴트 1세를 보좌하며 벨기에 애국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1830년 벨기에 독립이 완성되자 전장에서 복귀한 페드로가 다른 형제의 지분을 인수하며 독자적인 양조장 운영을 시작한다. 1864년 페드로의 아들인 에드워드는 새로운 시설과 효율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며 기틀을 마련했고, 1878년 유진 로덴바흐는 맥주의 캐릭터를 선명히 가다듬으며 본격적인 성장을 이끌었다. 이때 그에게 영감을 준 맥주가 영국 다크 에일인 포터였다. 

유진 로덴바흐는 양조 유학을 위해 영국 런던에 있을 때, 포터 양조 방식을 보며 큰 통찰력을 얻는다. 전통적인 포터는 거대한 나무통에서 발효되었고 이때 발생하는 산미를 중화시키기 위해 서로 다른 포터를 섞는 방식으로 양조되었다. 그는 이를 맥주에 접목하며 강한 산미와 붉은색 그리고 블랜드라는 정체성을 정립한다. 

우선 유진은 맥주에 신맛을 내기 위해 다른 맥주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한 양조 방법을 고안했다. 모주를 푸더라는 큰 오크통에 넣고 고의로 미생물의 영향을 받게 한 것이다. 이렇게 먼저 맥주를 만든 후, 야생에 있는 미생물을 통해 추가적인 발효를 하는 양조 과정을 혼합 발효라고 한다. 

공기 중에 있는 젖산균, 초산균, 야생효모 같은 미생물은 오크통의 미세한 구멍으로 맥주와 접촉하게 되는데, 이때 날카로운 산미가 생성된다. 이후 최소 2년 정도 진행되는 장기 숙성은 이 뾰족함을 우아한 신맛과 체리와 라즈베리 같은 섬세한 과일 향으로 다듬는다. 플랜더스 레드 에일이 지닌 와인 못지않은 복합적인 풍미는 이렇게 형성된다. 

짙은 붉은 색 또한 이 스타일의 핵심이다. 로덴바흐에 따르면 짙은 색 맥주가 장기 숙성에서 나올 수 있는 과도한 산화와 미생물의 오염으로부터 조금 더 안전하다. 쓴맛을 내기 위해 첨가하는 홉도 이 맥주에서는 항균용으로만 사용된다.

유진의 이런 연구와 노력은 흐릿했던 플랜더스 지역 맥주에 명확한 방향성을 제시했다. 곧 수많은 양조장이 뒤따랐다. 심지어 로덴바흐는 1999년까지 자신의 효모를 루셀라러 반경 50km 내에 있는 양조장과 나누기도 했다. 이런 움직임은 확고한 지역성을 형성하며 플랜더스 레드 에일을 정착시켰다. 로덴바흐를 플랜더스 레드 에일의 원조로 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다양한 플랜더스 레드 에일
 

로덴바흐 빈티지 ⓒ 윤한샘

 
로덴바흐에는 294개의 푸더가 존재한다. 각 푸더 속에 있는 맥주의 향미와 품질은 모두 조금씩 다르다. 로덴바흐 브루마스터는 이중 가장 뛰어난 한 개의 푸더를 선택해 빈티지 맥주로 출시한다.

7% 알코올을 가진 로덴바흐 빈티지는 플랜더스 레드 에일의 결정체로 신선한 체리, 라즈베리, 갓 수확한 자두 향 그리고 섬세한 오크 향을 뿜어낸다. 존재감이 뚜렷한 산미는 과일 풍미를 입 안 곳곳으로 퍼트리며 멋진 복합성을 자아낸다. 누구든 이 맥주를 한 번 마시면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다. 

빈티지를 제외한 숙성주는 모주와의 블랜드를 통해 다양한 카테고리로 재탄생한다. 로덴바흐의 시그니쳐인 그랑크뤼는 1:3 비율로 모주와 숙성주를 섞은 버전이다. 신선한 체리, 산뜻한 산미 그리고 6% 알코올은 플랜더스 레드 에일의 우아함을 보여준다. 모주와 숙성주를 4:1로 혼합한 로덴바흐 클래식은 높은 음용성을 자랑한다. 옅은 체리와 적당한 산미, 5.4% 알코올은 마치 음료수와 같다.  

체리 과즙 같은 부가물은 다양성에 깊이를 더한다. 이중 가장 유명한 것이 로덴바흐 알렉산더다. 창립자이자 맹인 정치가였던 알렉산더 헌정 맥주로 로덴바흐 그랑크뤼에 천연 체리 과즙을 넣어 우아한 향과 멋진 음용성을 담고 있다.

로덴바흐 카락테루즈는 생 체리를 비롯해 라즈베리와 크랜베리를 빈티지에 넣고 6개월 동안 숙성한 맥주다. 농익은 체리와 라즈베리 속에 뭉근한 신맛을 가진 이 맥주는 플랜더스 레드 에일의 백미 중 하나다.

<플랜더스의 개>의 마지막 화에서 네로는 안트베르펜 성당에 걸려 있는 루벤스의 그림을 본 후, 파트라슈와 함께 세상의 미련을 내려놓는다. 잊고 있었던 결말을 다시 찾아보게 만든 건, 로덴바흐 때문이었다. 맥주와 만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장르가 '플랜더스'라는 단어로 연결되다니. 성인이 된 나는 차가운 성당에 있는 네로의 어깨를 감싸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괜찮아. 그리고 수고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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