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움이 필요한 누군가가 요청한 대로 손길을 내밀어준다면 기쁨을 느낄 사람들이 제법 많다는 걸 기억해 주면 좋겠다.
김승재
[세 번째 이야기] 어디 가리키는지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몇 해 전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내에서 조금 난폭한 차에 놀라 방향 감각을 잃은 적이 있었다. 내가 사는 100동을 향하고 있었는데 어디서 잘못 길을 들어섰는지 좀 엉뚱한 곳으로 갔다. 그래봤자 같은 아파트 단지 내이니까 난 별걱정 없이 바로 옆을 지나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다.
"저기, 100동이 어디지요? 제가 방향 감각을 잃었네요. 허허허."
하얀 지팡이를 들어 보이며 나름대로 부담 없이 답을 할 수 있도록 나는 한껏 미소까지 지었다. 어색하고 마지못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저쪽이에요."
또 듣게 된 의미 없는 답, 저쪽. 난 다시 물었다.
"아, 예. 근데 저쪽이 어딘지 제가 알 수가 없네요. 괜찮다면 제 손으로 그쪽을 좀 가리켜 주시겠어요?"
"아…아…예."
천천히 내게 다가온 그 분은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내 소매를 잡아 어느 방향을 살짝 가리키고는 서둘러 손을 놓아 버렸다. 난 지금도 그 젊은 여자분이 내가 더럽거나 너무 혐오스럽거나 불쾌해서 그런 건 절대 아니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때는 순간적으로 기분이 확 상해버렸다. 내가 어디를 가리키는지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마치 무슨 벌레인 양 서둘러 놓아버린 그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쪽, 그쪽으로 가시면 100동이 나와요."
마지못한 목소리가 다시 뒤를 이었지만 난 그냥 형식적으로 고마움을 표하고는 옆을 지나는 다른 사람에게 다시 도움을 청했다. 막 정년퇴직 하셨다는 그 분의 최근 생활 이야기를 들으며 난 편하고도 안전하게 집 앞에 도착했다.
[마지막 이야기] 끝까지 옆에 있어준 사람들
늘 다니던 도서관이었지만 아무 도움도 없이 혼자서 다녀 보기로 한 첫날. 볼일을 마친 나는 하얀 지팡이를 앞세워 복잡한 도서관을 무사히 빠져나왔다. 이제부터는 복지택시를 타기로 한 횡단보도까지 점자 블록을 따라가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생각보다 장애물이 많았다. 그리고 부지런히 뛰노는 아이들도 많았다. 나는 자주 멈칫거렸고, 자꾸 점자 블록을 벗어났다.
"제가 도와 드릴까요? 어디까지 가세요?"
태연한 채 걷고 있었지만 사실 무척 당황하고 있었던 내게는 천사의 음성과 다름없는 반가운 목소리였다.
"아, 예. 저기 횡단보도 앞에서 복지택시를 타야 합니다."
"그래요? 그럼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가볍게 내 말에 답을 한 그 분은 살짝 내 팔을 잡고서 나를 횡단보도까지 안내해 줬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길이 아직 익숙지 않아서..."
내가 감사의 인사를 했지만 그 목소리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제가 택시가 올 때까지 같이 있을게요. 아이들이 너무 많네요."
다음날 비슷한 시간에 도서관을 나온 내가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데 그날따라 복지택시가 엉뚱한 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초조하게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막 전화해 보려는데 어제의 그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택시가 안 왔어요?"
"아, 예. 분명 도착했다고는 했는데..."
"이런, 잠시만요."
그 아름다운 목소리가 다른 어떤 분에게 내 사정을 설명했고 두 사람이 도서관 주변 이곳저곳을 살펴보는 눈치였다. 도서관 주차장 입구 근처에 노란 복지택시가 도착해 있었다.
"저기 와 있네요. 이리로 오세요."
다시 내 팔을 잡은 그 분이 나와 함께 횡단보도를 건넜고 우릴 발견한 복지택시가 다가왔다. 택시가 멈추고 내가 등에 멘 가방을 벗으려는데 또 다른 손이 내 가방을 받아 드는 게 느껴졌다.
"아, 괜찮은데... 감사합니다."
두 분은 내가 택시에 타서 문을 닫을 때까지 날 도와줬다. 차를 출발시키고 먼저 사과를 한 기사님이 두 분이 누구인지를 물었다.
"모르는 분들이세요. 근데 정말 친절하고 고마우신 분들이네요."
기사님은 놀라는 눈치였다. 그 두 분이 내 가족이거나 최소한 잘 아는 사람들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내일 또 만나면 꼭 인사하세요. 마음이 그리 곱다니... 하하하. 천사네, 천사야."
하지만 난 그분들께 인사를 할 수 없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난 그분들을 만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만났을 수도 있지만 더 이상 두 분의 목소리는 듣지 못했다. 도서관 직원들일 수도 있고, 그곳을 뛰놀던 아이의 어머니들일 수도 있다. 하여튼 그 두 분은 지금 내 기억 속에서 거의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간직돼 있고 가끔 떠올릴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모두 날 도우려 했던 분들 이야기다. 그런데 두 이야기는 지금도 날 미소 짓게 만들지만, 두 이야기는 여전히 씁쓸하다.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내 아둔한 머리로는 딱 한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손길, 말 다음에 이어진 그 따뜻한 손길, 그것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학교에서도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를 돕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고 대부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막상 그런 상황에 맞닥뜨리면 지나치게 조심스러워지는 것 같다.
남에게 도움을 주려고 할 때 말만으로는 부족한 경우가 많다. 따뜻한 말에 이어진 따뜻한 손길은 생각보다 대단한 힘을 보여준다.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가 요청한 대로 손길을 내밀어준다면 내가 느꼈던 이 기쁨을 느낄 사람들이 제법 많다는 걸 기억해 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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