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철도 박물관에 전시된 것으로 고종 황제(오른쪽)와 함께 철도원 초대 총재였던 친일파 민병석(왼쪽)의 사진도 보인다.
이민선
일본 경조사를 열심히 쫓아다니는 일은 그의 지위뿐 아니라 통장 잔고도 두둑이 만들어주었다. 명문가의 일원이었으므로 집안에서 전해진 재산도 있었을 것이고 조선왕조 및 대한제국 관료로서 받은 봉급도 있었고 관민 합작으로 출자한 대한천일은행 은행장을 하면서 벌어들인 수입도 있었지만, 친일파로 두각을 보이며 일본과 제휴하는 동안에 벌어들인 소득이 적지 않았다. 이왕직 장관(8년 재임)이나 중추원 고문·부의장(15년 재임) 같은 월급쟁이 친일파로 근무한 기간도 상당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친일 행위에 뛰어든 것은 1904년이고, 막판까지 친일을 하다가 사망한 것은 1940년이다. 82년 인생 중에서 36년을 친일파로 살았고 친일파 지위를 기반으로 소득을 축적했으니, 적어도 햇수로만 친다면 절반에 가까운 소득의 출처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적극적 친일을 하던 기간인 1920년에 해동은행 취체역(이사)이 되고 1921년에 고려요업 대표가 되고 조선생명보험 사장이 되고 1923년에 조선제사(製絲) 사장이 되고 1924년에 계림전기 창립위원장이 됐다. 친일파 지위를 발판으로 이런 기업활동을 했으므로, 이런 데서 생긴 소득도 친일재산 산정 때 고려하는 게 이치일 것이다.
금전 문제와 관련해 검토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관계가 있다. 대한제국 시절에 그가 한일 양국을 매개하면서 공금을 사용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1904년에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에게 제공한 정치자금 30만 엔을 중간에서 전달한 사람이 그였다. 1905년에 고종이 이토를 왕실고문으로 영입하라며 내놓은 업무 추진비 10만 엔을 사용한 사람도 그였다.
왕조시대 관점에서 보면, 그는 충성심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다. 임금과의 언약을 증표하는 부신을 챙기지도 않고 자기 몸부터 챙긴 행위는 군주와의 신뢰관계를 소홀히 다루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낳을 소지가 컸다. 그런 사람이 고종과 이토 사이를 매개하면서 비밀자금을 만졌던 것이다.
고종은 10만 엔을 준 그해에 그를 귀양보냈다. 성과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처럼 그는 친일 행위 과정에서 양국 위정자들의 돈을 맡아두는 일도 있었고, 그 과정에서 잡음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는 관료치고는 재산이 많았다. <친일인명사전>은 "1933년 2월 현재 30만 원 이상의 재산을 보유한 자산가"였다고 말한다.
1927년 4월 8일 자 <조선일보>에 경성사범학교 출신 교사의 초임 봉급에 관한 기사가 보도됐다. "초입이 남자 오십이 원, 여자가 사십사 원"이라고 한 뒤 일본 사범학교 출신과 비교할 때 너무 많으니 깎을 필요성이 있다는 주장을 담은 기사였다. 초등학교 교사 초임 봉급이 50원이던 시절에 민병석은 30만 원 이상의 재산을 갖고 있었다. 단순 계산하면 초등 교사가 500년을 벌어야 하는 돈이다. 주업이 관료인 사람이 이 정도 재산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민병석은 인생의 절반 가까이 친일파로 살았고, 친일파라는 지위가 그의 재산 형성에 기여했다. 그런데도 2013년에 법무부가 발표한 것처럼 정부는 민병석 재산을 8억 7천만 원어치 환수하는 데 그쳤다. 자료의 한계 때문에 친일 재산을 충분히 찾아내기 힘들었으리라는 점을 감안한다 해도, 36년간의 친일 활동 기간과 비교하면 금액이 소소하다고 평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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