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하게 자라라고 엄마 고향의 풍습대로 묶어준 붉은 실 띠를 손목에 찬 아기.
안미선
"큰아이가 저한테 그랬어요. '엄마, 아빠랑 이혼해도 한국에 살 거지?' '엄마는 한국에 있어' 말해줬어요. '엄마가 부천에 살 테니 너 만약에 자꾸 엄마 보고 싶으면 와' 대답했어요. 다시 아이가 물었어요. '캄보디아 안 가지?' 아이가 걱정하잖아요. 만약 내가 이혼하고 캄보디아로 떠나면 엄마 얼굴을 큰아이가 다시 못 보잖아요. 그때 저한테 눈물이 나왔어요.
'엄마 안 가. 엄마는 한국 있어.' 아... 그때 내가 마음이 아파서... 큰아이가 불쌍한데 전남편이랑 같이 살면 행복할 일이 없어요. 계속 싸우고 엄마가 나중에 무슨 일 있으면 안 되니까. '엄마 너 사랑하잖아. 엄마 너 사랑해. 엄마 너 같이 안 살아도 너 사랑하잖아요... 엄마, 미안해, 같이 못 살아서... 진짜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제 큰아이는 열다섯이 되었다. 몇 년 사이에 초등학생이었던 아이가 중학생이 되었다. 알렌과 한 달에 두 번씩 얼굴을 본다. 그녀가 아기를 안고 일어섰다. 화장대 거울에 큰아이의 어릴 때 사진 두 장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큰아이의 사진을 가리키며 알렌은 아기에게 말한다. "형아야, 형아. 형아 보고 싶어?" 아직 아기는 엄마의 말을 알아듣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런데도 아기가 거울을 보고 싱긋 웃었다.
"닮았지요?" 이번에 알렌은 사진을 가리키며 내게 물었다. 통통한 뺨이며 웃는 눈매. 알렌의 품에 안긴 아기와 정말 쏙 빼닮은 어린아이의 사진이 거울 앞에 붙어 있었다. 알렌은 아기 이름의 첫 글자를 큰아이 이름의 첫 글자와 같은 돌림자로 지었다. 아기 이름도 한국 이름이다. 큰아이와 작은아이의 이름을 알렌은 입술을 달싹이며 가만히 부른다. 이름들을 자꾸 부르며 알렌은 아기를 안고 빛바랜 사진 앞에 우뚝 서 있다.
이곳이 어디건, 아버지들이 누구건 상관없다. 아이들은 여전히 그녀의 아이들이다. 아버지가 한국인이어서 그 아이가 한국인이라 해도. 정작 아이를 낳은 그녀가 여전히 한국인이 아니라고 해도 그렇다. 그녀가 여전히 외국인으로 여겨지고 새로 낳은 아이도 외국인으로 여겨져도 그렇다.
거울 앞에 선 그녀에겐 두 아이가 있다. 한 아이는 한국인이고, 한 아이는 캄보디아인이다. 두 아이가 그녀를 엄마라고 부른다. 한 아이는 엄마가 한국을 떠날까 걱정했다. 한 아이는 엄마와 떨어져 캄보디아로 가야 한다. 이 모든 일이 왜 일어나야 하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 그녀가 아는 유일한 사실은, 두 아이 모두 자신의 아이라는 것,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알렌에게는 모두 이어진 자기 삶의 이야기이지만, 이 나라에서는 가족조차 국적에 따라 조각조각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한국인인 아이, 한국인이 되고 싶은 엄마, 아직 한국인이 될 수 없는 엄마와 아기로 나누어진다. "저 때문이에요." 알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큰아이가 외할머니가 캄보디아에서 한국에 오면 좋대요. 제가 그랬어요. '엄마가 한국 국적 없기 때문에 외할머니를 초청해도 삼 개월밖에 못 있어.' '왜? 왜? 엄마? 왜 연장 못 해?' '엄마 국적이 없으니까... 네 동생도 한국인이 아니잖아. 국적도 없고. 다 영주권자이기 때문에.' 그 말 듣고 큰아이 마음이 아팠대요."
알렌의 목소리가 떨리고 울음기가 새어 나온다. 거울 앞에서 아기가 거울 속의 엄마를 보고 방긋 웃는다. 아기가 웃는데, 사진 속 큰아이의 모습은 아기의 미래 같기도, 과거 같아 보이기도 한다. 나는 거울 앞에서 그렇게 가족이 모여 있는 사진을 찍어주었다.
거울 속 알렌은 아직 품에 있는 아기를 보고 웃고 아기는 자기를 든든하게 안아 주고 있는 엄마를 보고 웃는다. 사진 속 아이는 그 앞에 서 있었을 젊은 알렌을 보고 웃고 이제 또다시 나이 든 알렌 앞에서 변치 않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모두가 이어진 한순간이 아주 잠시, 이 자리에서 빛나고 있었다.
아기는 다리에 힘을 주어 기운차게 뻗었다. 건강하게 자라라고 엄마가 고향의 전통 풍습대로 묶어준 붉은 실 띠를 손목에 찬 아기. 한국말도 캄보디아 말도 될 수 있는 옹알이를 하고 엄마의 품에 안긴 아기. 모든 나라의 말에 귀를 열고 있는, 국경을 오가는 아기.
"캄보디아에 보내면 한국말이 안 될 수 있잖아요. 주위에서 한국말을 하게 하려면 캄보디아에 보내지 말라고 해요. 주변에 아는 언니들이 있는데 아이가 캄보디아에서 태어나 몇 년 후에 한국에 오면 한국말을 못 한대요. 어린이집에 가면 말도 못 하고 친구와 같이 못 논다고 해요."
아기가 입을 열 때 흘러나오는 말이 자신의 모국어일까 봐 엄마는 염려한다. 자신이 이 땅에 닿으려고 애쓴 것보다 수월하게 살아주기를 바라면서 엄마는 아기에게 한국어로 말을 건다. 아기는 엄마 품에 안겨 잠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지금도 아기는 엄마의 옷자락을 주먹으로 꼭 붙들고 엄마를 올려다본다.
"엄마 얼굴 보이지? 아직 엄마 보이지?" 알렌은 아기를 어를 때 그렇게 말했다. 엄마가 여기 있다, 아직 여기 있다고. 네 앞에 엄마가 지금 있다고. 네가 있는 곳에, 이 한국에 아직 엄마가 같이 있어서, 너를 보고 있다고. 알렌은 오래된 약속을 지키듯 아기에게 말했다. 힘줄이 불거져 나온 거친 손이 아기의 온몸을 떠받쳐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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