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웨이퍼 팹 안에서 방진복을 입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웨이퍼 품질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내부 조명도 노란색을 씁니다. 먼지, 기압, 습도, 조명까지 모두 일정수준을 유지해야 하는 곳이 웨이퍼 팹입니다.
이봉렬
반도체 산업의 생태계
여기까지 설명을 듣고 '한국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메모리 반도체에서 세계 선두이니 앞으로 이 두 회사에 인력도 많이 공급하고 여러가지 편의도 봐 주고 규제도 풀어주고 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반도체 생태계에는 설계부터 웨이퍼 생산까지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반도체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장비가 필요합니다. 노광기를 만드는 ASML 같은 경우에는 장비 한 대당 가격이 수 천억원이 넘는데도 공정미세화를 위해 꼭 필요하기 때문에 반도체 회사들이 그 장비를 사려고 늘 줄을 서 있습니다. AMAT나 LAM 같은 장비 회사 역시 특정 공정에서 독점에 가까운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반도체 장비 회사의 발전 속도에 따라 반도체 기술 전체의 수준이 결정되기도 합니다.
반도체 장비에 쓰이는 각종 부품을 만드는 회사들도 반도체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로봇, 모터, 베어링, 전자기판, 센서…, 수많은 부품이 모여 장비를 구성하고 장비를 운영하는 동안 주기적으로 바꿔줘야 하기 때문에 신뢰성 있는 부품을 만드는 회사들이 많을수록 반도체 장비도 잘 만들 수 있습니다.
웨이퍼 팹에 사람과 장비만 있다고 반도체를 만들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가스, 케미컬, 금속류 등 생산에 필요한 수많은 원재료들이 필요합니다. 2019년 7월 일본이 주요전략수출품목에 대한 수출을 규제하겠다며 포토레지스트, 불화수소 등을 규제 품목으로 정했는데 이 둘은 반도체 생산 공정에 꼭 필요한 케미컬류입니다.
이 사건 이후 반도체에서 소재 산업의 중요성에 모두가 눈을 뜨게 됐습니다. 가스, 케미컬 같은 소재, 반도체 장비의 부품, 그리고 반도체 생산 장비의 앞 글자를 따서 '소부장' 산업이라고 한다는 것도 기억해 두면 좋겠네요. 반도체를 생산하는 팹이 있는 곳에 소부장 산업도 함께 발전할 수 있습니다.
이 밖에도 반도체 설계와 관련된 특허만을 담당하는 기업(IP 기업), 팹리스 기업이 설계한 제품을 파운드리 생산공정에 최적화할 수 있도록 돕는 디자인하우스, 팹에서 생산된 웨이퍼를 개별 제품으로 만드는 후공정 기업, 제조 공정에 사용된 부품을 세정 혹은 재생하여 다시 공급하는 기업, 중고 반도체 장비를 거래하는 기업, 팹을 건설하고 유지 보수하는 기업… 등 수많은 형태의 기업들이 반도체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고 그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습니다. 한마디로 한국의 반도체 기업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반도체 강국들이 반도체 생산을 직접하지 않는 이유1
이쯤에서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왜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은 한국이나 대만, 중국처럼 공격적으로 웨이퍼 팹을 짓는 대신 팹리스에 더 집중하는 것인지', '왜 파운드리 하는 회사들은 한국, 대만, 싱가포르 등 아시아 국가에 팹을 주로 짓는지' 같은 거 말입니다.
짐작하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돈입니다. TSMC 창업자인 모리스 창 전 회장이 얼마 전 한 팟캐스트에 출연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미국 TSMC 공장의 25년 제조 경험에 따르면) "미국 내 반도체 제조 비용이 대만보다 50%가량 많다."
인건비가 상대적으로 낮은 한국, 중국, 대만, 싱가포르 등 아시아에 팹을 지으면 비용을 많이 아낄 수 있는 겁니다. 미국에 본사가 있는 대표적인 파운드리 업체 글로벌파운드리도 대부분의 팹이 아시아에 있습니다. 팹리스 업체들도 같은 이유로 자사 팹은 포기하고 아시아의 파운드리 업체에 생산을 맡깁니다. 아시아국가에서 제조 비용이 낮은 이유는 인건비가 싸고, 안전이나 환경 보호에 들여야 할 비용을 상대적으로 적게 쓰기 때문인데 이건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두번째는 반도체 팹에서 일할 노동자를 찾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1년 365일, 하루 24시간 계속해서 팹을 가동해야 하는 특수성 때문에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은 교대근무를 하게 됩니다. 청정도 유지를 위해 기압을 높여 놓은 팹 안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뒤덮는 방진복을 입고 마스크에 보안경까지 쓴 채 주야간 교대 근무를 해야 하는 노동환경 때문에 선진국에서는 팹 안에서 일하는 오퍼레이터를 구하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상황은 좀 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