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른 태양, 선동열고려대 2학년생 선동열이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미국, 대만, 일본전을 모두 완투해 3승을 거두며 국가대표팀의 새로운 에이스로 등극했다.
대한체육회
하지만 야수진의 공백은 생각보다 더 컸다. 1980년 도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도루와 득점 부문 1위와 타격 3위에 올랐던 것을 비롯해 지난 몇 년간 국제대회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해준 김일권의 이탈이 가장 뼈아팠고, 배대웅과 김용희가 빠진 2루와 3루도 공수 양면에서 허전했다. 특히 2루수 정구선과 박영태가 모두 빈타에 시달렸고, 그나마 동국대의 유격수 한대화가 이선웅 대신 3루수로 기용되며 2개의 실책을 기록하긴 했지만 대만전에 홈런을 기록한 것을 포함해 좋은 공격력을 선보이며 대안으로 떠오르는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그 대회 한국팀의 팀타율은 .256에 불과했는데 전체 10개 팀 중에서 8위에 해당했다.
대회 9일째인 9월 13일에 치러진 호주전은 모든 문제점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가장 큰 고비였다. 2회와 3회 유두열과 이해창의 홈런으로 먼저 앞서갔지만 에이스 최동원이 4회 초에 갑자기 흔들리며 집중타를 맞고 5실점하면서 역전을 허용했다. 최동원은 이견의 여지가 없는 한국대표팀의 에이스였지만 간혹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약점이 있었고, 그 단점이 그 날 다시 드러났던 것이다.
공격에서도 부족한 경기 경험과 매끄럽지 않은 호흡이 이어졌다. 초반에는 추가득점의 기회마다 박영태의 견제사와 장효조의 주루미스가 이어지며 맥이 끊어졌고, 역전을 허용한 뒤로는 기세가 꺾이며 공회전이 반복됐다.
그나마 오영일과 김시진까지 투입하며 총력전을 벌이고도 3점 차까지 벌어지며 기울었던 경기는 8회와 9회 한대화와 장효조의 극적인 적시타로 동점을 만들며 연장으로 이끌었고, 한 번 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다만 이미 경기시간이 3시간 30분을 넘어서면서 대회 규정에 따라 연장전은 다음 날로 넘겨졌다.
뜻밖의 큰 고비, 호주전
그 날 밤 대표팀의 분위기는 어두웠다. 호주를 가볍게 제압한 뒤 다음 날 있을 일본과의 최종전을 준비한다는 계획에 큰 차질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가장 유력한 선발투수 3명을 한꺼번에 소진해버린 상황에서, 선동열을 일본전 선발투수로 남겨둔다면 그 일본전에 우승의 기회를 남겨놓기 위해 반드시 잡아야 하는 호주와의 연장전은 어떤 투수에게 맡겨야 할지 난해한 문제였다. 게다가 충격적인 난타를 당한 선발투수 최동원이 숙소에서 말없이 사라지면서 동료 선수들이 수색에 나서는 소동마저 벌어졌고, 분위기는 더욱 어수선해졌다.
이튿날인 14일 오전 10시 30분부터 다시 시작된 연장 10회 초에 마운드에 오른 것은 임호균이었다. 왜소한 체구에, 빠른 공을 가지지 못했지만 신기에 가까운 제구력으로 이름을 알린 그는 대표팀에서도 가장 위험한 순간에 투입되는 해결사였다. 이미 파나마전과 도미니카전에서 각각 1이닝과 4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고 패배 직전의 팀을 구하는 2세이브를 기록했던 임호균이 다시 10회부터 15회까지 6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주었고, 여전히 덜컹거리며 빈공에 시달리던 타자들은 막다른 골목에 몰린 15회 말 1사 후 유두열이 띄운 희생플라이로 간신히 결승점을 뽑을 수 있었다.
하지만 채 반 나절도 쉬지 못한 채 그 날 저녁 6시 30분부터 대회 마지막 경기를 치러야 하는 힘겨운 상황이 남아있었다. 선발투수로 선동열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문제는 그가 흔들릴 경우 뒤를 받칠 투수가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전날 던지지 않은 투수는 박동수와 박노준 뿐이었지만, 최종전에, 특히 결승전에, 혹은 한일전 마운드에 올려보낼 만한 선수들은 아직 아니었다. 하지만 그 날 치러야 하는 최종전은 공교롭게도 풀리그 방식으로 치러진 그 대회에서 한국과 꼭 같은 9승 1패를 기록한 일본과의 경기였고, 그 경기에서 이긴 팀이 우승을 하게 되는 조건이었다. 간신히 한 고비 넘겼다는 안도감보다 몇 배 무거운 피로감과, 부담감을 안고 나서야 하는 상황이었던 셈이다.
최악의 상황 속, 결승 한일전

▲한일 열전의 배경1982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가 불거졌고, 극에 달한 반일감정은 세계야구선수권대회 한일간의 결승전에 더욱 관심을 집중시키는 요인이 됐다. 사진은 1982년 7월 30일에 열린 일본역사교과서왜곡문제 공청회. 신용하, 정원식 교수 등이 참석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마지막 날 경기의 상황은 굳이 자세히 복기할 필요가 없을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은 예상했던 만큼의 피로감과 부담감을 드러내며 2회 초 연속안타와 실책, 희생플라이를 허용해 2점을 먼저 내준 반면, 공격에서는 일본의 선발 스즈키에게 7회말 까지 단 1개의 내야안타 밖에 뽑아내지 못하며 끌려갔다. 하지만 전설적인 8회 말에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었다. 선두 심재원의 중전안타와 대타 김정수의 2루타로 한 점을 만회했고, 조성옥의 희생번트로 1사 3루의 동점 기회를 만든 데 이어 여전히 그 의도와 맥락이 미궁에 빠진 김재박의 '개구리 번트'가 튀어나오면서 동점 성공. 그리고 이해창의 안타가 이어지며 만든 1사 1, 3루의 역전 기회에서 장효조의 내야땅볼이 나왔지만 일본 2루수의 잘못된 선택으로 병살 위기를 모면한 직후 터져나온 한대화의 장쾌한 석 점짜리 결승 홈런.
결국 세계대회 결승전에서 만난 일본에게, 경기 초반 끌려가다가 막판에 극적인 방식으로 뒤집어내면서 얻은 5대 2의 승리와 우승. 그 뒤로 40년의 세월 동안 숱한 한일전에서, 혹은 굳이 한일전이 아니라도 어느 팀의 승리를 간절히 비는 수많은 야구팬들의 기억과 마음 속에서, 저물어가던 희망과 집념을 되살려내는 주문으로 소환되고 떠올려져 또한 수많은 극적인 역전극으로 재현되어온. 그래서 흔히 '약속의 8회말'이라 불리게 된 그 순간.
그 우승은 그 해 시작된 프로야구가 봄과 여름 내내 이어지며 만들어낸 숱한 이야기들 위에 찍은 커다란 마침표가 됐고, 여전히 야구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대부분의 한국인들의 삶에 마저 깊이 새겨진 전설이 되었다. 10년 이상 '국내 최고의 인기 스포츠'로 자리잡아온 야구가 '국민스포츠'로 비약한 것은, 아마도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개구리번트2대 1로 뒤진 8회 말 1사 3루. 스퀴즈를 경계한 일본 배터리는 공을 하나 멀리 뺐고, 그것을 예상한 어우홍 감독도 스퀴즈 사인을 거두어 들였으며, 그에 따라 3루 주자도 위치를 지켰다. 하지만 타자 김재박은 공을 향해 뛰어오르며 번트를 댔고, 공격과 수비와 관중을 모두 경악시킨 그 타구는 3루 선상을 따라 흐르며 주자와 타자를 모두 살리는 동점 적시타가 됐다. 그리고 공수주를 갖춘 야구천재 김재박은 그 날 이후 번트로 좀더 유명한 이름이 됐다.
대한체육회
'약속의 8회'에 '국민스포츠'가 태어나다
스포츠는 아주 촘촘히 한계지어진 공간과 규칙 속에서 승부를 가른다. 하지만 그 좁은 영역에서 출렁이는 승기와 패색의 흐름은 때로는 수천만, 혹은 수억의 가슴 속으로 전해져 거대한 파동을 만들고 끝내는 수십 년을 흘러 역사에 녹아들기도 한다.
1982년 9월 14일은 한국인들에게 그런 몇 개의 사건 중 하나였고, 그것이 오늘도 저녁 6시 30분이면 수백만의 눈길을 그라운드로 향하게 할 것이며, 또 8회가 되면 응원하는 팀의 짙어가는 패색에 지쳐있던 이들이 주술에라도 걸린 듯 반전의 희망을 되살리게 할 것이다.
그리고 혹시 그 희망이 현실이 되는 순간, 어떤 이들은 여전히 생생한 기억 속에서, 어떤 이들은 눈으로 귀로 전해진 전설 속에서 그 원형의 순간을 잠시나마 떠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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