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6.07 07:03최종 업데이트 22.06.07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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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오지랖이 넓었던 딱따구리 마리아는 세상의 온갖 동물들에게도 늘 따뜻한 마음을 선물했다. 당신 집에 개, 오리, 닭, 염소에게도 그러했지만 남의 집 동물들에게도 늘 따뜻하였다. 우리집 개에게도 주인을 닮아 나사가 한 주먹은 빠졌다고 늘 툴툴거렸지만 항상 친절하게 뭔가를 알려주고자 지극정성이었다. 딱따구리 성님이 '북쪽'으로 떠나간 오늘, 나도 슬프고 우리집 개도 슬프다. 림수진
"림! 100달러짜리 종이 돈 열 장이면 1,000달러야? 10,000 달러야?"

어느 날 들판에 나갔다 마을로 돌아오는 길에 딱따구리 성님이 내게 물었다. 본명 '마리아'라는 참한 이름이 있지만, 워낙 유쾌하고 한편 호들갑스러워 별명 딱따구리로 불린다. 나이는 나와 동갑이지만, 생일이 몇 달 빨라 내가 기꺼이 '성님'으로 칭한다.


"뜬금없이, 왜요?"라고 되물으며 속으로 두 가지를 생각했다. 혹시 미국에 가려는 건가? 하는 생각과, 초등학교 어느 학년쯤에서 중퇴한데다 이곳 멕시코 사람들이 대한민국 사람들처럼 숫자에 강하지도 않으니, 어쩌면 100달러 지폐 열 장에 대해 1,000인지 혹은 10,000인지 헷갈릴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전 써보거나 만져보지 않은 낯선 돈이라 주눅이 들어 잘 하던 셈법도 혼돈스러울 만했다.

내가 답을 늦추자, 마리아는 자기 손가락을 하나씩 꼽아가며 100, 200, 300,,, 그렇게 숫자를 셈해 나갔다. 열 손 가락이 모두 접혀졌을 때, 그러니까 900에서 1,000으로 넘어갈 때 약간의 혼돈스러움이 보였지만, 다행히 10,000 대신 1,000을 선택하며 다시 내게 되물었다.

"맞지? 1,000달러 맞지?"

남편의 외도

제법 늦은 밤이었지만 마을 입구 너럭바위에 앉아 자초지종을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북쪽(멕시코에서 흔히 미국을 칭하는 말)'으로 간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7-8년 전부터 남편의 외도를 알고 있었고 이곳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러하듯이, 공식적으로 두 집 살림을 차린 남편에게 무덤덤하니 살아가는 것 같더니, 아무래도 며칠 전 사건이 발단인 듯했다.

사건이 있었던 그날 급하게 인근 도시에 나갈 일이 있어 남편에게 차를 태워 달라 부탁했는데 일이 바쁘다며 거절하기에 마을 입구에 나가 합승 택시를 탔다. 마침 승객이 네 명 다 차 막 출발하려던 차에 젊은 처자 한 명이 급하게 다가와 이웃 마을까지 같이 타고 갈 수 있냐고 사정하며 물었단다. 기사까지 다섯 명 정원이 이미 차버렸으니 다들 난감해하는데, 유쾌하고 호탕하고 오지랖 또한 한없이 넓은 마리아가 멀지도 않은 거리이니 잠깐 성냥갑 속의 성냥처럼 좀 찡겨 타고 가자고 나머지 승객들을 설득하여 젊은 여성을 태웠다고 했다.
 
딱따구리 성님은 들판 아무 데서나 누워 낮잠 자기를 즐겨했다. 길을 가다가도 한숨 달게 자고 일어날 때면 늘 "이만하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평생 당신 가진 것에 만족하고 자족했기에 남편의 외도에도 그러려니 하고 의연했지만 결국 참기 힘든 장면을 목격하고 미국행을 결정했다.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지만, 오직 자신의 모친 대왕대비마마와 신의 가호를 빌며 한걸음 한걸음 나아갔다. 림수진
 
하여 택시가 인근 도시로 바로 나가지 않고 중간에 있는 작은 마을에 들르게 되었는데, 그만 그 마을 여관 앞을 지나던 택시 안에서 마침 하하하 호호호 웃으며 나오던 남편과 자신의 '동업자' 꼴을 봤다며, 그날 늦은 밤 나를 찾아와 울었다.

남편의 연인을 기꺼이 자신의 '동업자'라 희화화해 부를 만큼 호탕하던 마리아도 자신의 부탁을 거절한 남편이 대낮 연인과 함께 여관에서 웃고 나오던 모습에서 많은 상처를 받은 듯했다. 한참을 울다가 '북쪽'으로 가겠다는 말을 비췄는데, 홧김에 하는 소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로 여권을 만들고 미국 비자를 신청하겠다고 인근 도시에 나가 여기저기 대행사를 알아보는 것 같더니 어느 날엔 세 시간이나 떨어진 대도시에 있는 미국 영사관에 비자 인터뷰를 하러 간다고 했다. 차라리 국경 어디쯤 훌쩍 뛰어 넘고 말지, 미국 공공기관을 상대로 뭔가를 요청하는 일이란 적어도 이곳 멕시코에서라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 곳에 가기 며칠 전부터 걱정을 한가득 끌어안고 무슨 옷을 입고 가야 하냐고 내게 몇 번이나 묻기에 최대한 평범하게 입고 가라 했거늘, 자신이 가진 가장 화려한 파티복을 입고 장롱 속에 보관했던 모든 보석을 온 몸에 주렁주렁 치장하고 다녀왔다. 대행사에 제법 많은 돈을 지불하고 가이드와 차량을 구해 다녀올 수 있었다.

북쪽으로

차림이 워낙 호들갑스러워 안 되겠구나 싶었는데, 여권을 그곳 영사관에 두고 가라 했다는 말로 미루어 다행히 비자 승인이 난 것 같았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비자가 붙은 여권이 자신에게 돌아오기까지 한 달 넘게 내내 맘을 졸였다. 몇 번이나 안심을 시켰지만 도무지 내 말을 믿지 못하고 날이면 날마다 옆 마을 영험하다는 바위 앞에 가서 빌고 또 빌었다. 그 때만 해도 설령 비자가 나오더라도 마리아가 미국으로 갈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미국과 멕시코를 가르는 장벽 일부. 수 백만 명의 이주자들이 이 장벽 어디쯤을 넘어 숨어 들어가는 데 비해 딱따구리 마리아 자신은 비자를 받아 항공편으로 미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 만으로도 신의 가호라 여겼다. 림수진
 
그녀 나이 열일곱 살에 다섯 살 많은 지금의 남편을 만나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아들 둘을 낳았다. 그러니 아들 둘은 이미 장성하여 분가했지만 늦게 낳은 딸이 이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딸 때문이라도 미국에 가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나의 예상과 달리, 마리아의 미국행은 척척 진행되었다. 말릴 겨를도 없이 큰아들을 시켜 비행기 표까지 구매했다고 알려왔다. 그 모든 과정에서 남편을 향한 분노의 기운이 씩씩 뿜어져 나왔다. 그러면서도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미국 비자가 나온 것만으로도 이미 자신의 미국행에 신의 가호가 느껴진다며 시시로 신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았다.

적어도 멕시코와 미국을 가르는 국경 장벽을 목숨 걸고 넘어야 하는 일은 면한 셈이니 충분히 그럴 만했다. 다행히 일곱 형제 중 다섯 명이 이미 미국에 살고 있으니, 맨땅에 헤딩도 아니었다.
 
날이 채 밝기도 전, 이른 새벽 마실을 나갈 때도 딱따구리 성님은 바리바리 음식을 싸들고 왔다. 항시 강조해 말하기를, 이 세상에 빈손으로 태어났다 빈손으로 가지만, 죽음 앞에 오직 한 가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먹은 것들이라고,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잘 먹어야 한다고 했다. 림수진
 
미국에 가서 어떻게든 돈을 벌겠다고 했다. 그 길이 유일하게 남편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고 또한 복수라 여겼다. 그 곳에서 무슨 일을 해서라도 달러를 벌 수 있다면, 그게 곧 남편과 '동업자'라 불리는 남편의 내연녀에 대한 복수라는 생각이었다.

문제는 그녀의 어머니였다. 팔순을 넘기신 그녀의 어머니는 일곱 자식 중 다섯을 그간 '북쪽'에 볼모 아닌 불모로 잡힌 채 살아오셨다. 10대 어린 나이에 각자 미국으로 들어간 지 30-40년이 되었지만 다섯 자식 중 제대로 서류를 갖춰 멕시코를 왕래할 수 있는 자식은 딱 한 명뿐이었다. 그러니 나머지 네 명의 자식들과는 수십 년째 전화로만 통화할 뿐 만나보지 못하고 살아가는데 이곳에 남은 두 명의 자식 중 마리아마저 미국으로 가겠다고 나섰으니 그 어머니의 상심이 클 수밖에 없었다.

비자를 받았으니 합법적으로 머물 수 있는 기간 안에 다시 멕시코로 돌아온다면 아무런 문제가 아니겠으나, 그간 그녀를 떠나간 자식들처럼 마리아 역시 그 기간을 넘겨 미국에 체류할 확률이 컸다. 그렇게 된다면 마리아 역시 그 곳에 갇힌 삶을 살게 될 게 뻔했다. 게다가 마리아의 계획대로 조만간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될 딸을 무사히 데려갈 수만 있다면 어머니가 계시는 이곳의 삶은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몇 날을 우시던 어머니가 마리아를 불러 100달러짜리 미국 돈 열 장을 줬다고 했다. 그간 미국에 있는 자식들이 자신들의 부재를 대신하여 인편에 보내온 돈들을 모은 것이었다. 그 돈을 주고받던 날 여든의 어머니와 나이 쉰을 넘긴 딸이 같이 엉엉엉 울었다. 그 이야기를 내게 전하던 마리아는 다시 또 엉엉엉 울었다. 1,000 달러인지, 10,000 달러인지 내게 물었던 그 돈의 사연이었다. 온전한 슬픔은 딱 거기까지.

이상한 축제

출국 날짜가 가까워오자 거의 매일 친정을 찾아 모친과 끌어안고 울던 슬픔의 와중에도 내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이상한 축제가 시작되었다. 이곳에 딱 두 명 남겨진 마리아와 그녀의 여동생은 하루가 멀다 하고 미국에 가져갈 물건들을 사다 날랐다. 이곳 오일장에서 볼 수 있는 조잡한 물건들이야 값이 싸니 그럴 수 있겠다 싶은데, 상하기 쉬운 식재료까지 남은 출발 날짜를 꼼꼼히 체크해가며 사다 쟁였다. 빵은 물론이요 치즈와 또르띠야까지 사다 날랐다. 물론 이곳 특유의 과자와 엿과 엄청난 양의 테킬라까지.

"미국에도 다 있지 않소?"라고 심란하게 물을 때마다 "거기 거랑 여기 거랑 맛이 다르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녀가 미국으로 간다는 소식이 '북쪽'에도 전해졌을 터, 역시나 하루가 멀다 하고 주문이 내려왔다. 하다못해 장터에서 파는 속옷과 쥐약까지 그 목록에 포함되었다. 물론 주문자들은 이곳을 떠난 후 수십 년 동안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마리아의 형제들이었다.

여든을 넘긴 대왕대비마마(마리아는 자신의 모친을 항상 그리 칭했다)의 진두지휘 아래 두 딸이 열심히 각 마을의 오일장을 헤집고 다녔다. 당신이 이곳에서 삶을 다하기까지 다시 또 한 명의 딸을 보지 못한 채 살게 될지 모를 슬픔의 와중에도 수십 년 간 보지 못한 자식들에게 보낼 물건을 사 모으는 일은 그 매일매일이 축제였다.

그렇게 50kg 가까운 음식들이 마리아의 커다란 가방에 차곡차곡 쟁여졌다. 보름여 전부터 이미 여러 벌의 파티복까지 챙겨 짐을 쌌던 마리아는 매일매일 구시렁거리며 이미 가방에 담겼던 자신의 파티복들을 하나씩 빼내며 온갖 음식과 속옷과 쥐약까지 챙겨 넣었다.

낮엔 친정에 가서 어머니를 끌어안고 울고 밤엔 자신의 집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을 끌어안고 울던 마리아가 오늘 이른 새벽 '북쪽'을 향해 떠나갔다. 영어 할 줄 아느냐는 내 질문에 호기롭게 '아플 쥬씨(Apple Juice)'라고, 딱 한 마디 답을 남기고. 작은 언니가 살고 있는 오리건 주까지 가야 하니 오늘 늦은 밤이 되어서야 그 곳에 도착할 것이다.
 
작별 인사. 그녀가 나고 자란 세상의 모든 것들과. 이른 새벽 미국을 향해 가는 그녀에게 일부러 영어로 '굿럭'이라고 행운을 빌어줬지만, 사실 어떤 상황이 행운일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림수진
남편에 대한 욕을 바가지로 퍼부으면서도 가끔 17살 먹었던 당신의 신혼 시절을 떠올릴 때면 새색시였던 자신을 딱 한 달 간 미용학원에 보내준 남편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그 덕분에 나 역시 수 년 간 마리아의 집 마당에서 머리를 자를 수 있었으니 나도 덩달아 고마워했다.

어제 늦은 밤 마지막이라고, 내 머리를 아주 짧게 잘라 주었다. 미용 값 2달러와 팁 1달러, 합 3달러나 되는 돈도 극구 받지 않았다. 마리아에게 작별을 고하면서 아무리 짐이 무거워도 미용가위는 꼭 챙겨가라 당부했다. 여기서 머리 한 번 깎아주는 값으로 2달러를 받았지만 미국에서라면 20달러는 충분히 받을 수 있으니 부디 돈 많이 벌어 꼭 돌아오라고 내 마음의 염원을 담아 당부했다.

그녀의 아들이 엄마의 미국 입국에 혹여 문제가 될까 하여 6월 2일 입국 6월 17일 출국 왕복표를 끊었다고 하니 어쩌면 6월 17일에 다시 딱따구리 마리아가 마을에 쨘! 하고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다. 어린 딸을 두고 갔으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다. 그녀의 모친 대왕대비마마가 간절히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 나 역시, 그랬으면 정말 좋겠다. 겨우 열 몇 살 먹어 '북쪽' 미국으로 간 뒤 여전히 그 곳에 자신들을 가둬 둔 채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살아가는 그녀의 다섯 형제들과 다른 삶이었으면 좋겠다.

식전 댓바람에 마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유쾌하고 호탕하게 떠들어야 할 딱따구리 마리아가 없으니, 마을이 휑~하다. 항상 그녀 스스로 '이만하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라고 물으며 가진 것에 족할 줄 알았던 딱따구리 마리아가 벌써, 그립다.
 
딱따구리 마리아가 사랑했던 우리마을 '바그다다 카페'. 북쪽 미국에 가서도 이곳이 늘 그리울 것이라 했다. 림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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