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채 밝기도 전, 이른 새벽 마실을 나갈 때도 딱따구리 성님은 바리바리 음식을 싸들고 왔다. 항시 강조해 말하기를, 이 세상에 빈손으로 태어났다 빈손으로 가지만, 죽음 앞에 오직 한 가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먹은 것들이라고,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잘 먹어야 한다고 했다.
림수진
미국에 가서 어떻게든 돈을 벌겠다고 했다. 그 길이 유일하게 남편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고 또한 복수라 여겼다. 그 곳에서 무슨 일을 해서라도 달러를 벌 수 있다면, 그게 곧 남편과 '동업자'라 불리는 남편의 내연녀에 대한 복수라는 생각이었다.
문제는 그녀의 어머니였다. 팔순을 넘기신 그녀의 어머니는 일곱 자식 중 다섯을 그간 '북쪽'에 볼모 아닌 불모로 잡힌 채 살아오셨다. 10대 어린 나이에 각자 미국으로 들어간 지 30-40년이 되었지만 다섯 자식 중 제대로 서류를 갖춰 멕시코를 왕래할 수 있는 자식은 딱 한 명뿐이었다. 그러니 나머지 네 명의 자식들과는 수십 년째 전화로만 통화할 뿐 만나보지 못하고 살아가는데 이곳에 남은 두 명의 자식 중 마리아마저 미국으로 가겠다고 나섰으니 그 어머니의 상심이 클 수밖에 없었다.
비자를 받았으니 합법적으로 머물 수 있는 기간 안에 다시 멕시코로 돌아온다면 아무런 문제가 아니겠으나, 그간 그녀를 떠나간 자식들처럼 마리아 역시 그 기간을 넘겨 미국에 체류할 확률이 컸다. 그렇게 된다면 마리아 역시 그 곳에 갇힌 삶을 살게 될 게 뻔했다. 게다가 마리아의 계획대로 조만간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될 딸을 무사히 데려갈 수만 있다면 어머니가 계시는 이곳의 삶은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몇 날을 우시던 어머니가 마리아를 불러 100달러짜리 미국 돈 열 장을 줬다고 했다. 그간 미국에 있는 자식들이 자신들의 부재를 대신하여 인편에 보내온 돈들을 모은 것이었다. 그 돈을 주고받던 날 여든의 어머니와 나이 쉰을 넘긴 딸이 같이 엉엉엉 울었다. 그 이야기를 내게 전하던 마리아는 다시 또 엉엉엉 울었다. 1,000 달러인지, 10,000 달러인지 내게 물었던 그 돈의 사연이었다. 온전한 슬픔은 딱 거기까지.
이상한 축제
출국 날짜가 가까워오자 거의 매일 친정을 찾아 모친과 끌어안고 울던 슬픔의 와중에도 내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이상한 축제가 시작되었다. 이곳에 딱 두 명 남겨진 마리아와 그녀의 여동생은 하루가 멀다 하고 미국에 가져갈 물건들을 사다 날랐다. 이곳 오일장에서 볼 수 있는 조잡한 물건들이야 값이 싸니 그럴 수 있겠다 싶은데, 상하기 쉬운 식재료까지 남은 출발 날짜를 꼼꼼히 체크해가며 사다 쟁였다. 빵은 물론이요 치즈와 또르띠야까지 사다 날랐다. 물론 이곳 특유의 과자와 엿과 엄청난 양의 테킬라까지.
"미국에도 다 있지 않소?"라고 심란하게 물을 때마다 "거기 거랑 여기 거랑 맛이 다르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녀가 미국으로 간다는 소식이 '북쪽'에도 전해졌을 터, 역시나 하루가 멀다 하고 주문이 내려왔다. 하다못해 장터에서 파는 속옷과 쥐약까지 그 목록에 포함되었다. 물론 주문자들은 이곳을 떠난 후 수십 년 동안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마리아의 형제들이었다.
여든을 넘긴 대왕대비마마(마리아는 자신의 모친을 항상 그리 칭했다)의 진두지휘 아래 두 딸이 열심히 각 마을의 오일장을 헤집고 다녔다. 당신이 이곳에서 삶을 다하기까지 다시 또 한 명의 딸을 보지 못한 채 살게 될지 모를 슬픔의 와중에도 수십 년 간 보지 못한 자식들에게 보낼 물건을 사 모으는 일은 그 매일매일이 축제였다.
그렇게 50kg 가까운 음식들이 마리아의 커다란 가방에 차곡차곡 쟁여졌다. 보름여 전부터 이미 여러 벌의 파티복까지 챙겨 짐을 쌌던 마리아는 매일매일 구시렁거리며 이미 가방에 담겼던 자신의 파티복들을 하나씩 빼내며 온갖 음식과 속옷과 쥐약까지 챙겨 넣었다.
낮엔 친정에 가서 어머니를 끌어안고 울고 밤엔 자신의 집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을 끌어안고 울던 마리아가 오늘 이른 새벽 '북쪽'을 향해 떠나갔다. 영어 할 줄 아느냐는 내 질문에 호기롭게 '아플 쥬씨(Apple Juice)'라고, 딱 한 마디 답을 남기고. 작은 언니가 살고 있는 오리건 주까지 가야 하니 오늘 늦은 밤이 되어서야 그 곳에 도착할 것이다.

▲작별 인사. 그녀가 나고 자란 세상의 모든 것들과. 이른 새벽 미국을 향해 가는 그녀에게 일부러 영어로 '굿럭'이라고 행운을 빌어줬지만, 사실 어떤 상황이 행운일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림수진
남편에 대한 욕을 바가지로 퍼부으면서도 가끔 17살 먹었던 당신의 신혼 시절을 떠올릴 때면 새색시였던 자신을 딱 한 달 간 미용학원에 보내준 남편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그 덕분에 나 역시 수 년 간 마리아의 집 마당에서 머리를 자를 수 있었으니 나도 덩달아 고마워했다.
어제 늦은 밤 마지막이라고, 내 머리를 아주 짧게 잘라 주었다. 미용 값 2달러와 팁 1달러, 합 3달러나 되는 돈도 극구 받지 않았다. 마리아에게 작별을 고하면서 아무리 짐이 무거워도 미용가위는 꼭 챙겨가라 당부했다. 여기서 머리 한 번 깎아주는 값으로 2달러를 받았지만 미국에서라면 20달러는 충분히 받을 수 있으니 부디 돈 많이 벌어 꼭 돌아오라고 내 마음의 염원을 담아 당부했다.
그녀의 아들이 엄마의 미국 입국에 혹여 문제가 될까 하여 6월 2일 입국 6월 17일 출국 왕복표를 끊었다고 하니 어쩌면 6월 17일에 다시 딱따구리 마리아가 마을에 쨘! 하고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다. 어린 딸을 두고 갔으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다. 그녀의 모친 대왕대비마마가 간절히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 나 역시, 그랬으면 정말 좋겠다. 겨우 열 몇 살 먹어 '북쪽' 미국으로 간 뒤 여전히 그 곳에 자신들을 가둬 둔 채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살아가는 그녀의 다섯 형제들과 다른 삶이었으면 좋겠다.
식전 댓바람에 마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유쾌하고 호탕하게 떠들어야 할 딱따구리 마리아가 없으니, 마을이 휑~하다. 항상 그녀 스스로 '이만하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라고 물으며 가진 것에 족할 줄 알았던 딱따구리 마리아가 벌써, 그립다.
▲딱따구리 마리아가 사랑했던 우리마을 '바그다다 카페'. 북쪽 미국에 가서도 이곳이 늘 그리울 것이라 했다.
림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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