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비아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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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14개 생산국과 미국이 참여하는 미주커피회의가 1940년 6월 10일에 소집되었고, 긴 논의 끝에 미주커피협정(Inter-American Coffee Agreement)을 맺었다. 결론은 생산국별로 수출량을 할당하는 것이었다. 세계 커피 소비량의 50% 이상을 차지하던 미국이 수입할 1590만 자루 중 브라질이 60퍼센트 가까이 그리고 콜롬비아가 20퍼센트를 조금 상회하는 분량을 수출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미주커피회의 기간에도 전쟁은 확대되었고, 커피 가격은 계속 하락하여 파운드당 5.75센트까지 내려갔다. 1941년에 발효한 이 협정 덕분에 전쟁 기간 미국에서의 커피 가격이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고 중남미 커피 생산자들도 최악의 상태를 벗어날 수 있었다.
미국인의 1인당 연 커피 소비량이 7.5킬로그램으로 역대 최고 수준에 오른 것이 전쟁이 한창이던 1941년이었다. 역사적으로 라틴아메리카 지역과 미국의 관계가 최선의 상태를 유지한 것도 아이러니하게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이었다. 전쟁과 커피가 가져다준 희한한 선린우호관계였다.
아메리카노의 탄생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습격으로 미국의 참전이 본격화되면서 커피 가격이 불안해졌다. 군의 커피 수요 증가 그리고 선박을 이용한 커피 이동의 불안감 증가가 합해져 커피 시장의 미래가 더욱 불투명해졌고, 이는 커피 가격의 급등으로 이어질 조짐을 보였다.
미국이 선택한 것은 일반인에 대한 커피 배급제였다. 커피 배급제는 두 가지 이유에서 시작되었다. 첫째는 기호품을 모든 시민들에게 공평하게 배급하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족한 물품이던 커피를 군대에 우선 배정하자는 것이었다. 1942년 11월에 시작된 커피 배급제는 유럽에서 전세가 연합국에 유리하게 전개되기 시작한 1943년 7월까지 유지되었다.
국가는 배급제를 선택하였고, 미국 국민은 커피를 묽게 마시는 습관을 선택했다. 적은 양의 커피에 많은 양의 물을 섞어서 마시는 방식이었다. 전쟁 기간 동안 익숙해진 묽은 커피를 마시는 습관은 전쟁 이후까지 지속되었다.
전쟁에 이긴 미국은 패전국 독일, 이탈리아, 일본에 군대를 보냈다. 이들에 의해 새로운 커피 문화의 씨앗이 뿌려졌다. 이탈리아에 주둔한 미국 군인들은 이탈리아의 쓴 에스프레소에 적응하지 못했다. 이들에게 에스프레소와 함께 뜨거운 물이 제공되었고, 미군들은 원하는 만큼의 물을 섞어 마셨다. 이탈리아 바리스타가 본 미국식 커피였다. 그들은 "카페 아메리카노 Caffe Americano"로 불렀다. 미국의 커피라는 뜻이다. 물론 커피같지 않은 커피라는 승전국 군인을 향한 조롱의 의미도 있었다.
전쟁터에서 일상으로 회복한 미국 군인들은 묽은 커피를 선호했다. 당시 미국에서 개발되어 인기를 끌고 있었던 커피메이커는 원두 가루로 묽은 커피를 내리는 기계였다. 음료 이름이 아직 아메리카노는 아니었다. 그냥 커피였다.
▲서울 시내 한 스타벅스 매장에서 직원들이 다회용 컵에 음료 담아 고객에게 제공하고 있다. 2021.9.28
연합뉴스
묽은 커피에 아메리카노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스타벅스였다. 1982년 스타벅스에 합류한 텀블러 세일즈맨 하워드 슐츠는 1983년 이탈리아 출장에서 에스프레소를 활용한 커피 음료를 판매하는 카페 문화를 경험하였다.
잠시 스타벅스를 떠났던 슐츠는 '일지오날레'라는 이름의 카페를 차렸다. 메뉴 첫 줄에 '아메리칸 커피 American Coffee'가 등장하였다. 슐츠는 1987년에 스타벅스를 인수하였고 드디어 에스프레소에 뜨거운 물을 부어 만든 아메리칸 커피가 아메리카노라는 이름을 얻었다. 더 이상 '아메리칸 커피'도 '묽은 커피'도 그냥 '커피'도 아닌 '아메리카노'가 정체성을 얻는 순간이었다.
스타벅스의 세계 진출로 아메리카노는 많은 세계인이 공통으로 마시는 커피의 대명사가 되었다. 물론 이탈리아를 포함한 에스프레소 문화의 본고장 유럽에서 커피의 대명사는 여전히 에스프레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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