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4가에서 문을 연 '박승직상점'
두산
이처럼 1910년 국권침탈 이전에 대한제국 정부와 협력하면서도 '차기 정부'와도 제휴함으로써 이윤 확대의 토대를 구축한 박승직은 일제강점기 때도 번영을 이어 나갔다. 동시에, 친일 행위도 정세 변화에 맞게 변모시켰다. 1938년부터 국민정신총동원연맹 및 국민총력조선연맹 같은 전쟁 협력 기구에 참여해 일제의 전쟁 수행을 도왔다. 국방헌금도 여러 차례 쾌척했다.
공개 발언을 통한 친일에도 가담했다. 위 사전에 따르면, 1938년 1월 1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주최한 '조선인의 진로와 각오' 좌담회에서 '중일전쟁의 책임은 전적으로 중국에 있다'라는 거짓 발언을 했다. 일본의 도발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도 그런 말을 했던 것이다.
총독부는 정치를 잘하고 있으므로 총독부 정치는 개선할 필요가 없다고도 발언했다. 지원병 제도를 환영하면서 "조선인도 제국 신민으로서의 의무와 권리를 갖추게 되었다"라며 기쁨을 표시하기도 했다. 큰 기업의 총수가 이런 발언을 하지 않는다고 일제가 반드시 커다란 불이익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기업인으로서 굳이 하지도 않아도 될 친일 행적을 남겼던 것이다.
일본인을 겨냥한 맥주 사업
대한제국 말기에 매판자본이 됨으로써 다음 시대를 위한 씨앗을 뿌렸던 그는 결과적으로 볼 때 일제강점기 말기에도 비슷한 흔적을 남겼다. 훗날 OB맥주, 동양맥주의 번영을 가져올 단서를 만주사변 2년 뒤인 1933년에 만들어두게 된 것이다.
그해 12월 그는 소화기린맥주의 취체역(이사)이 됐다. 일본의 2대 맥주회사인 기린맥주가 대주주가 되어 조선에서 운영하는 회사에 이사로 참여했던 것이다. 이것은 해방 뒤 OB맥주의 번영으로 이어졌다.
기린맥주의 역사를 설명한 1977년 12월 16일 자 <경향신문> 5면 '비화(秘話) 한 세대' 코너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맥주가 만들어진 것은 43년 전인 1934년이었다"라고 한 뒤 "이때만 해도 맥주는 한국인의 식생활 습성에 맞지 않아 일반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더구나 가격이 비싸 고급 요정이나 카페에서 주로 소비되고 있었다"라고 설명한다. 포목상으로 시작한 박승직이 맥주 사업에 가담한 것은 한국인들을 겨냥해서가 아니라 일본인들을 겨냥해서였던 것이다.
그런데 박승직이 보유한 소화기린맥주 주식은 많지 않았다. 윤해동 기고문은 2백 주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해방 직후에 산더미 같은 이익으로 불어났다.
일본인들이 버려두고 간 재산을 미군정은 적산(귀속재산)으로 규정했다. 그들은 적산과 연고가 있는 한국인들에게 헐값 불하를 단행했다. 해방 전에 갖고 있었던 소화기린맥주 주식이 해방 뒤의 박승직에게 행운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사실, 적산은 해방과 함께 한국 국민의 공공재산이 됐어야 했다. 그런 적산이 친일파 박승직과 그 집안에 헐값으로 들어간 것이다. 일본과의 연고가 해방 뒤에 재앙을 주지 않고 오히려 축복을 안겨준 것이다.
적응과 변신
박승직은 1950년에 86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인생 막판까지도 '적응과 변신'을 잊지 않았다. 대한제국 말기에는 일본제국주의를 영접했던 그였다. 그랬던 그가 해방 직후에는 독립 지사들을 영접하는 쪽으로 몸을 틀었다. <친일인명사전>은 "해방 후 1945년 10월 임시정부 요인들을 맞기 위한 '한국 지사(志士) 영접위원회'의 위원"으로 참여했다고 알려준다.
그는 일제 때 미키상사로 개칭했던 박승직상점의 상호도 원래대로 되돌려놓았다. 위 사전은 "1946년 10월 일본식 상호였던 미키상사를 박승직상점으로 환원했다가 다시 두산상사로 바꿨다"라고 설명한다. 미키상사는 그의 창씨명에 근거한 것이었다. 창씨명인 미키 쇼우쇼크(三木承稷)를 따서 그렇게 불렀다가 해방 뒤 원래대로 환원한 것이다.
1991년 12월 6일 자 <한겨레> 7면 전체에 실린 박승직 기사에 따르면, 살아생전의 박승직은 두산그룹을 이끌게 될 아들 박두병에게 "정치에는 관여하지 말고 오직 가업에 충실하라"라는 가훈을 남겼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이 가훈을 잘 지키지 않았다. 그는 정치적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기업을 불려 나갔다. 정치적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 120년 기업의 핵심 경쟁력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