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재산 조사, 4년의 발자취.에 수록된 방태영.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2010년에 펴낸 <친일재산조사, 4년의 발자취>는 방태영과 관련해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9호의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고문 또는 참의로 활동한 행위를 한 자에 해당한다"는 위원회의 판단을 소개한다. 방태영이 친일파로 규정된 핵심 이유는 중추원 관직 역임에 있다.
중추원은 조선총독부 자문기구로 국회와 비슷한 위상을 보유했다. 명예직에 가깝긴 했지만, 중추원 참의가 됐다는 것은 그만큼 친일을 많이 했으며 일제 지배하의 위상도 높았음을 반영한다. 지역 유지의 감투가 실권과는 관련이 없을지라도 지역 내 위상을 반영하는 것과 같다.
중추원의 정원은 총독부 정무총감이 겸직하는 의장직을 포함해 70명이 안 됐다. 방태영이 일제 치하에서 어느 정도 위상을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인간적'으로 매정한
그는 저명한 동시에 실세를 가진 친일파였다. 이 점을 입증하는 지표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근무 이력이다. 만 28세 때인 1913년에 기자로 들어간 그는 1918년에 과장이 되고 1919년에 발행인 겸 편집인이 됐다. 1920년에는 편집국장 직무대리를 맡았다. 총독부 기관지의 발행인이었으니 핵심적인 일제 부역자였다고 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하필이면 1919년에 그런 위치에 도달했다. 온 나라가 "대한독립 만세!", "조선독립 만세!"로 뜨겁던 시절에 <매일신보> 발행인이 됐던 것이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은 "1919년 8월 <매일신보>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았으며"라고 설명한다. 거국적인 만세운동으로 수많은 동족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거나 투옥 혹은 망명한 직후에 그가 그 자리에 취임했던 것이다. 민족을 떠나 '인간적'으로 매정한 인물이라는 느낌을 줄 만한 이력이다.
김옥균의 갑신정변 이듬해인 1885년에 태어나 한국전쟁 중인 1950년에 납북된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그가 거물급인 동시에 '발자취가 꽤 빽빽한 친일파'라는 느낌도 갖게 된다.
그는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기간인 65년간의 거의 대부분을 봉급 생활자로 살았다. 그 기간 동안에 거의 항상 어디선가 봉급을 받고 있었다.
눈에 띄는 것은 다종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봉급을 받았다는 점이다. 대한제국 때인 1902년에 17세 나이로 철도학교에 입학한 그는 이듬해에는 탁지부 인쇄국에 견습생으로 들어갔다. 그랬다가 1904년에는 경무청 순검으로 변신했다. 이듬해에는 일본어 통역관이 됐다가 경성기업합자회사 통역으로 들어갔다.
1906년에 경찰로 복직했다가 1910년에 부정행위가 발각돼 퇴직한 그는 1913년에 <매일신보>에 입사했고 뒤이어 친일파들의 모임인 대정친목회 간사 활동을 겸했다. 1921년에 퇴사한 뒤에는 동아흥신·조선서적인쇄에서 임원 생활을 했고 경성부 학교평의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기도 했다.
총독부 기관지에 근무했던 그는 총독부 지원을 받는 방송국에서도 일했다. 경성방송국에서 이사로 재직한 경력이 있다. 또 조선방송협회 이사로도 활동했다. 이뿐 아니라 광업 분야에도 발을 디뎠다. 1931년에는 의주광산 취체역(이사)이 됐다.
1936년에 중추원 참의가 되어 1939년까지 연봉을 수령한 그는 그 뒤로도 기업체 임원 경력을 쌓아갔다. 동양지광사 이사, 조선축산 감사역, 조선서적인쇄 취체역, 조선공영 취체역, 조선영화제작 취체역도 역임했다.
말 그대로 몸 바쳐 친일
돈 버는 일만 한 것은 물론 아니다.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전쟁을 응원하고 식민지 한국인들을 그리로 내모는 데도 가담했다.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생위원, 지원병 권유대 대원,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으로도 뛰어다녔다.
당시 그가 억압받는 동족들을 향해 던진 한마디가 있다. 1942년 2월호 <조광>에 기고한 글에서 "조선 사람은 과거 일청·일로 전쟁 때에 가졌던 구경꾼 태도를 버리고 황국신민의 일원, 다시 말하면 나도 성전(聖戰) 전투원의 한 사람이라는 철석 같은 결심을 가질 것"을 촉구했다. 청일전쟁·러일전쟁 때처럼 남의 나라 대하듯이 일본을 대하지 말고, 이 나라의 일원이며 이 전쟁의 일원이라는 의식을 갖자는 것이었다.
그는 "구경꾼 태도를 버리고" 황국신민의 일원으로 살자고 촉구했다. 그런 그의 친일행위에서 나타나는 특징이 하나 있다.
백범 김구가 서거한 날에 발행된 1949년 6월 26일 자 <조선일보> 기사 '방태영을 불구속 취조'는 "방(方)은 과거 중추원 참의까지 지냈으며 일방(一方) 조선서적주식회사 사장으로 당시 조선총독부 지정 교과서를 혼자 도마터 판매하던 친일자"라고 언급했다. 친일행위에 힘입어 일제강점기판 국정교과서 판매를 도맡았으니 상당한 부를 축적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