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선 결선 투표에 오른 국민연합 후보 마린 르펜. 올해 53세로 2012년, 2017년에 이어 세번째 대선에 도전한다.
AP=연합뉴스
극우 후보가 대선 결선 투표에 처음 오른 2002년 프랑스인들은 마치 나치 깃발 한 자락을 목격한 듯 화들짝 놀라며, 사랑받지 못하던 당시 자크 시라크 대통령에게 몰표를 던졌다. 1차에서 19.8%를 얻었던 시라크는 2차에서 82.2%를 얻으며 압승했다. 프랑스에서 극우라는 말은 인종주의자를 직설적으로 가리키며, 인종주의는 나치와 혹독한 야만을 야기하는 위험으로 간주된다.
2010년 당에서 아버지를 '폐위'시키고 당권을 차지한 쟝 마리 르펜의 딸 마린 르펜은 당에서 아버지의 색깔을 지우는데 주력했다. 특히 지난 5년간 마린 르펜은 당명을 국민전선(FN)에서 국민연합(RN)으로 바꾸며 괴물 같은 극우 정당의 이미지를 탈색시키는데 역점을 뒀다.
2012년 처음 대선 후보로 나선 이후 3번째 도전인 이번 선거에서 그는 여성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의 선거 포스터에 새겨진 슬로건은 '여성 대통령'이며 그의 공식 전단은 이렇게 시작한다.
엄마로서, 저는 제 아이들이 불안정하며 파멸로 나아가는 나라에서 자라게 할 수 없습니다. 여성으로서, 저는 우리가 쟁취한 것으로 여겨온 사회적 권리와 자유가 후퇴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낯선 극우의 언어를 접한 사람들은 '마린 르펜은 정말 극우인가?'라고 질문하기도 한다.
그의 대표 공약은 구매력 상승과 유럽연합으로부터 프랑스 주권 확립이다.
20%이던 에너지(석유·가스·전기 등) 부가세를 5.5%로 내리는 것을 비롯해 100가지(식재료·생리대·기저귀 등) 생필품에 대한 부가세를 0%로 내려 서민들의 구매력을 증가시키고, 금융 소득에 대한 과세를 33%까지 강화하여 조세 정의를 실현한다는 것을 첫 공약으로 내세웠다.
유럽연합의 독주에 끌려가던 태도를 바꿔 프랑스의 주권을 지키고, 국익을 먼저 고려하겠다는 것도 그의 핵심 공약이다. 5년 전 유럽연합 탈퇴를 말했던 시절과 비교하면 많이 물러섰다. 프랑스 법과 유럽연합 법이 충돌할 때 프랑스 법을 우선 적용하며 유럽연합에 내던 분담금 규모도 (50억 유로 정도) 축소하겠다고 밝혔다.
유럽연합으로부터 에너지 주권을 확립하겠다는 공약도 내세웠다. 다국적 기업들의 로비에 휘둘려온 유럽위원회의 일방적 결정에 순응해 온 지금까지의 태도를 버리고 자국의 이해를 우선적으로 고려한다는 면에서 대 유럽연합 정책은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LFI)의 대표 멜랑숑과 거의 일치한다. 20대 청년·학생들에게 월 200-300 유로를 직업교육과 학업 장려를 위해 지원하며 30세 이하에게는 소득세를 물리지 않겠다며 청년 세대에 대한 지원 의지도 피력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러시아 제재에 관해서도 러시아로부터 가스 수입을 중단한다는 결정은 러시아가 아닌 프랑스인에 대한 고통이 될 것이므로 이런 자승자박의 제재엔 동참하지 않겠다는 것이 르펜의 공약이다.
65세부터 연금 수령이 가능하도록 연금법을 개정하려는 마크롱에 반해 르펜은 60세부터 연금을 받을 수 있게 하자고 한다. 그는 시장과 금융자본가의 논리에 정치 권력이 한없이 물러서던 지난 30여 년간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브레이크를 밟겠다는 의지, 시민 경제를 돌보는 실리적 정책을 펼치겠다는 의지를 다각도로 표현한다. 농민들에 대한 최저 생계비 지원도 약속한다. 그의 지지층은 고소득층보다 저소득층, 수도권보다 지방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는 지지자들의 요구를 잘 간파하고 있는 셈이다.
극우 마린 르펜의 공약은 놀랍게도 극좌 후보 멜랑숑과 70% 겹친다. 그러나 이민자 정책에서 양 후보의 차이는 명백하다. 르펜은 이론의 여지없는 인종주의자, 순화해서 말하자면 국가주의자의 면모를 드러낸다.
▲ 범행을 저지르는 외국인은 감옥 대신 본국으로 송환한다. ▲ 이민의 자격을 강화하기 위한 이민법 전면 개정을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한다. ▲ 외국인의 국적 취득 요건을 강화한다. ▲ 사회적 지원은 우선 프랑스인에게 한다(지금까진 프랑스인과 프랑스에 합법적으로 거주 중인 외국인 사이의 제도적 차별은 금지되어 있었다). ▲ 역사 교육과 불어 교육을 교육의 중심에 둔다. ▲ 히잡(혹은 부르카) 금지를 철저히 적용한다.
이중 히잡 착용은 특히 엄청난 사회적 논란을 야기한다. 프랑스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정교분리의 원칙(laïcité)은 공공 장소에서 종교적 신념을 드러낼 수 있는 복장의 착용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이슬람 탄압으로 해석되면서 거센 저항을 야기해왔기에 그간 법이 실제 적용되지는 않았다.
마린 르펜은 이슬람 공동체에 속한 여성들의 히잡을 착용하지 않을 자유를 억압한다며 히잡 착용 시 벌금을 부과하겠다고 한다. 이 법 적용이 현실화 할 경우 사회적 갈등이 들불처럼 번질 것은 명확하다.
캐스팅보트 쥔 멜랑숑 지지층

▲극좌 정당의 후보로 3번째 대선에 도전하는 장뤼크 멜랑숑. 가장 활기찬 선거 운동을 펼쳤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1차 투표에서 22%를 득표하며 3위에 그쳐 결선 진출이 좌절됐다. 사진은 프랑스 파리의 노동법 개정 반대 집회에 참석한 장 뤼크 멜랑숑 하원의원
연합뉴스
1차 투표 결과가 또렷해지던 지난 10일 저녁 결선 진출 좌절을 시인하며 지지자들에게 감사를 표하던 자리에서 멜랑숑은 마린 르펜에겐 단 한 표도 주지 말 것을 호소했다. 22%를 얻은 그의 목소리는 2차 결선의 향방을 가를 가장 중요한 메시지다.
5년 전 그는 같은 호소를 했고 그의 지지자들은 마크롱에게 표를 던지거나 백지 투표 혹은 기권을 택했다. 그러나 이번 멜랑숑의 발언은 당 안팎에서 격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5년 전 프랑스인들은 마크롱을 겪지 않았고, 이젠 모두 그 혹독한 지옥의 맛을 본 상태였기 때문이다. 마크롱이 마련한 지옥은 극우를 덜 두렵게 만들었다.
멜랑숑과 르펜은 정치공학상으론 먼 거리에 있지만, 앞서 살폈듯이 구체적 정책 제안에선 유사점이 누구보다도 많다. 특히 현재는 중단된 상태이나 언제든 필요하다면 다시 적용할 수 있다고 마크롱이 밝히고 있는 백신 패스에 둘 다 반대한다.
백신 접종 거부로 지난 9월 중순부터 해직된 수만 명의 의료인들을 복직시키겠다는 것도 두 후보가 나란히 내놓은 약속이다. 코로나라는 전쟁터에서 열심히 싸운 전사들을 버린 마크롱 정부에 대한 분노와 실직 의료인들에 대해 미안함을 가진 시민들에게 큰 호소력을 가진 공약이기도 하다. 멜랑숑 지지자들이 어떤 점에서 그를 지지했느냐에 따라 선택의 향방은 달라질 수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프랑스를 통치해 오던 부르주아 양 당 사회당과 공화당이 각각 1.75%. 4.78%를 득표하며 존립 불가의 상황으로 내려앉은 대신 극좌와 극우 정당이 20% 이상을 얻었다. 이런 극단적인 변화로 24일의 결과는 장담할 수 없게 됐다. 24일의 결과가 무엇이든 평화를 약속하진 않을 것이다. 금융자본가들의 충실한 친구가 이어갈 익숙한 지옥의 2.0 버전이냐, 노골적 국가주의자가 운전할 색다른 공기의 프랑스냐. 일주일 뒤에 뚜껑은 열린다.
▲훼손된 두 후보의 포스터 이번 선거에선 유난히 훼손된 포스터를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마크롱 포스터(왼쪽)에는 “나도 너를 괴롭힐거야” 라고 적혀있다. 이는 마크롱이 백신 패스 적용을 앞두고 한 언론 인터뷰에서 "난 비백신자들을 끝까지 괴롭히고 싶다"고 말한 것을 비꼰 것이다.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 그 놀라운 발언은 두고두고 많은 시민들이 마크롱을 향해 사용하는 문장이 되었다. 괴물스러운 극우의 이미지를 여전히 가지고 있는 마린 르펜의 포스터(오른쪽) 역시 훼손되어 있다. 'Prout'는 유아어로 방귀 나오는 소리를 뜻한다.
목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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