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보 핀토스 로고
청보 핀토스
재설계의 뼈대는 코칭스태프의 교체와 거물급 선수의 영입이었다. 우선 감독 및 코치들을 전원 해임하고 완전히 새로운 인물들로 교체했다. 인천 야구를 대표해온 두 간판인 박현식과 김진영 그리고 그들이 각각 대표하던 동산고와 인천고 출신 지도자들의 영향력이 인천 연고 프로야구팀에서 제거되는 순간이었다.
그 대신 영입된 것이 바로 만 34세 7개월의 젊은 TV 해설자 허구연이었다. 그보다 더 젊은 감독은 아직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나오기 어려울 것으로 보이는데, 선수 수명이 길어져 어지간한 수준의 선수라면 그 나이까지는 은퇴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허구연 감독은 부산 지역의 야구 선배인 김명성 투수코치를 영입하고, 선수 중 최고참인 김무관을 은퇴시켜 타격코치로 기용했다. 또한 구단은 경험이 부족한 감독을 보좌하기 위해 베테랑 코치들을 영입했는데, 1973년 장효조 등을 이끌고 대구상고를 전국대회 3관왕으로 이끌었던 전설적인 지도자 강태정 수석코치와 해태와 MBC에서 각각 코치를 지낸 유남호, 한동화였다. 김무관을 제외한 네 명의 코치는 훗날 모두 프로야구팀 감독을 지내게 된다.
그리고 김정우 구단주가 직접 허구연 감독과 함께 일본으로 가서 '장명부 급'의 재일동포 투수를 영입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선발로서는 다승과 탈삼진 2관왕을 경험했고, 마무리 투수로 전업해서는 세이브왕에 오른 경력이 있는 사이드암 투수 김기태였다. 그리고 또 다른 사이드암 투수 김신부도 함께 영입했는데, 그도 나름 일본 프로야구 1순위 지명자였다.
사이드암으로만 두 명을 영입한 점에서는 스타 해설가 출신다운 날카로움이 엿보인다. 장명부나 김일융의 빠른 공에 주목했던 팬들과 달리, 해설가 허구연은 그 선수들의 성공 비결로 변화구를 주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국내에 수준 높은 잠수함 투수가 없었고, 타자들의 대처능력도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감독의 실수와 구단의 무리수
그런데 믿었던 김기태 투수가 명성에 비해 노쇠했고, 시즌 초 적응에도 어려움을 겪으며 부진했던 것이 문제의 출발이었다. 1984년 롯데의 최동원처럼 전천후로 승리를 챙겨주기를 기대했던 김기태가 첫 두 경기에서 3이닝 5 실점하며 승리를 날리면서 감독의 시즌 구상이 완전히 깨져 버렸다.
개막 7연패 후 1승 하지만 또다시 연패와 연패들. 그러다 보니 계획적인 투수진 운영은 불가능해졌고, 그나마 자기 역할을 하던 투수들에게 과부하가 걸렸다. 4월 말까지 23경기 중 10경기에 나와서 661구를 던진 정은배가 언론 인터뷰 중에 '선발로 등판하면 이기든 지든 사나흘은 휴식을 보장해줘야 한다'고 하소연을 했지만 허구연 감독은 '팀 사정이 어려워서 별다른 도리가 없다'고 답할 정도의 무리였다(경향신문 1986년 3월 29일 자). 정은배는 이후 부진에 빠지며 시즌 2승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래서 5월 12일까지 전적이 8승 23패였고, 기대 이하의 성적은 자연스럽게 내부 분열로 이어졌다. 선수들 사이에서는 전임 김진영 감독 때가 나았다는 이야기들이 말버릇처럼 오갔고, 고참 코치들은 각자 진단과 처방을 내놓기 시작했다. 구단주는 감독 요구대로 영입한 거물 재일동포 투수들이 부진한 것을 계기로 감독을 불신했다.
그 시점에서 구단주가 결단을 내리는데, 그것이 결정적 한 방이었다. 전기리그가 한창 진행 중인 5월 중순에 갑자기 허구연 감독을 일본으로 연수를 보내 버리고 강태정 수석코치를 감독대행으로 기용한 것이다. 당시의 기사들은 대부분 그것을 감독 경질 절차로 이해했다. 그런 임시조치에 이어 조만간 감독 퇴진과 신임 감독 선임 절차를 밟을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하지만 뜻밖에 한 달 뒤인 6월 13일에 허구연 감독이 복귀했고, 강태정 대행은 수석코치로 돌아갔다. 한 달 전 급작스런 연수 조치의 진의는 무엇이고 복귀의 명분은 무엇인지, 강태정 대행 체제에 대한 구단의 판단은 무엇인지, 근본적으로는 팀의 실질적 지휘권이 누구에게 있고 어떻게 유지될 것인지에 대한 일체의 판단과 예상을 무너뜨리는 기이한 행보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또 한 달 반 뒤인 8월 4일에는 백인천 전 MBC 감독이 타격 인스트럭터로 영입됐다. 감독급의 인사를 팀 내로 들인다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차기 감독으로 내정한 것이거나, 그럴 가능성을 암시하면서 현직 감독을 견제하는 포석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강태정이라는 전설적인 고교야구 지도자가 강력한 차기 감독 후보로 버티고 있는 마당에 또 백인천이라는 거물급 감독이 들어온다는 건 허구연과 강태정 둘 다 구단주의 성에 차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백인천 감독은 허구연 감독의 직접적인 부탁에 응한 것이라고 밝혔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허구연 감독이 강태정 수석코치를 견제하기 위해 백인천 카드를 활용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당시 청보 핀토스의 감독 자리를 놓고 굉장히 어수선한 분위기가 연출됐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백인천 인스트럭터 영입과 어떤 방식으로 연관된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 사흘 뒤인 8월 7일에 결국 허구연 감독의 퇴진이 이루어진다. 당시 기사에서 허구연 감독은 '강태정 코치와의 불화설'에 관한 질문에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다, 다만, 둘 다 이기기만을 바라진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멘트를 남겼다(경향신문 1986년 8월 7일 자).
결국 그 해 청보 핀토스의 성적은 32승 74패였는데, 그중에서 허구연 감독이 직접 지휘한 경기만 추리면 15승 2무 40패였고 강태정 대행이 지휘한 경기가 17승 34패였다. 그리고 그 32승 중 시즌 중반 이후 리그에 적응한 김기태·김신부 두 재일동포 투수가 기록한 것이 합쳐서 19승이니까, 허구연 감독의 안목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돌이켜보면, 1986년 청보 핀토스의 신임 감독이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우선 김진영 감독을 비롯한 인천 출신 지도자들이 한꺼번에 쓸려나가는 걸 지켜본 인천 출신 선수들의 마음을 보듬는 것이 중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잠재적 감독 후보일 수도 있는 베테랑 코치들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 것도 필요했다. 거기에 더해 적절한 성적을 내 감독을 향한 불신을 잠재우면서 시간을 벌어 체질을 개선해야 했다. 그런데 그것이 1년 혹은 한 달 안에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경험 없는 젊은 감독이 아니라 어느 명감독이었다면, 곧장 가능했을까?
그래서 그 해 벌어진 일들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은 모든 일에 개입하고 결정한 청보 그룹의 김정우 구단주에게 있다. 기존 지역 야구 인맥의 리더십을 일거에 해소해버렸지만, 새로운 리더십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시간과 시행착오의 여지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젊은 지도자와 노련한 코치를 묶어놓으면 보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리더십을 혼돈에 빠트릴 수 있다는 점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한 달 만에 지휘권을 빼앗았다가 돌려주고 다시 뺏는, 일관성 없고 원칙 없는 결정으로 시행착오를 통해 개선할 가능성마저 완전히 제거해 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1982년 삼미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만, 구단주의 이런 이상한 행태가 유독 인천에서만 두 번이나 일어났다는 것이 인천 야구팬들에겐 비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