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시는 제대로 된 복수를 하기로 결심한다
Focus Features
복수 과정에서 캐시는 당시 성폭행 현장을 촬영한 동영상을 뒤늦게 보게 된다. 의대 동기 모두가 돌려보며 낄낄댔지만 모두가 침묵했던 영상. 여느 강간 복수극과 달리 <프라미싱 영 우먼>에는 구체적인 피해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영상을 재생하자 마치 쇼를 관람하듯 환호하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영상을 보며 오열하는 캐시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캐시는 영상에서 남자 친구 라이언의 목소리를 듣는다. 다른 남자와는 분명 다르다고 생각했던, 캐시에게 조금은 삶의 희망을 갖게 했던 소아과 의사. 라이언은 그때는 모두 어렸다고, 자신을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억울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구경꾼도 공범이다. 캐시에게 관용이란 없다. 피해자는 세상을 떠났고 가해자들은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잘 살아간다. 캐시는 제대로 된 복수를 결심하고 알의 총각파티 장소로 찾아간다. 간호사 스트리퍼로 변장한 채.
영화를 보면서 처음으로 짧은 치마를 입었던 20대 초반 어느 날이 떠올랐다. 수많은 눈길을 받으며 내 몸이 마치 물건이라도 된 것처럼 느껴졌던 날. 다시는 이런 옷을 입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던 날.
여성으로서의 내 몸을 자각한 후 늘 내 몸을 스스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출이 있는 옷을 입지 않으려 했고 술을 마시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 했다. 일상적인 성희롱과 성추행을 당하면서도 단 한 번도 캐시처럼 정색하지 못했다. 혹시 내가 오해한 게 아닐까, 내가 뭘 잘못한 게 아닐까. 나 자신에게서 문제를 먼저 찾았다.
영화에서 가장 처참했던 장면이 있다. 범죄를 저지르고 겁에 질려 있는 알에게 알의 친구 조는 알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한다.
이건 네 잘못 아니야. 이건 그냥 사고였어.
여성들이 끊임없이 자기검열을 하는 동안 남성들은 서로가 서로의 다정한 면죄부가 되어준다. 영화의 제목 '프라미싱 영 우먼'은 전도유망한 젊은 여성이라는 뜻이다. 전도유망한 여성이었던 니나의 인권은 남자 의대생들의 전도유망함에 가려져 처참히 짓밟혔다. 성범죄 가해자로 지목되면서 자신도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알에게, 캐시는 차가운 얼굴로 말한다. 여자들이 꾸는 진짜 악몽이 뭔지 알기나 하냐고.
침묵하거나, 미친년이 되거나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다음 날인 11일, 문재인 대통령이 안희정 전 충남지사 부친의 빈소에 근조화환을 보낸 것을 비판하는 보도가 나왔다. 선거 기간에는 윤석열 당선인의 배우자 김건희씨가 "안희정이 불쌍하다"라는 발언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쯤 되면 누구를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건지 헷갈린다. 권력형 성범죄 가해자를 향한 배려와 공감이 왜 피해자에게는 적용되지 못하는 걸까.
윤석열 당선인은 '성범죄 처벌 강화'와 '무고죄 처벌 강화'를 나란히 선거 공약으로 내건 바 있다. 대부분의 여성이 성범죄 피해 사실을 공개하는 것조차 어려워하는 상황에서 성범죄 처벌과 무고죄 처벌이 어떻게 동일한 무게로 언급될 수 있는지 황당할 따름이다. 성폭력 피해 생존자 김지은씨는 책 <김지은입니다>에서 "그들이 말하는 '가짜 미투'가 도대체 무엇일까"라면서 "우리 한국 사회에서 누가 대체 성폭력을 당했다며 제 인생을 그렇게 해체하면서까지 강간 경험을 내놓을까"라고 반문한다.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믿음이 무너졌을 때 여성의 선택은 두 가지다. 그냥 침묵하거나, 캐시처럼 위험을 무릅쓰고 스스로를 구하거나. 대선 직후 여성들의 호신용품 검색이 늘어난 것은 결코 과민반응이 아니다.
영화 마지막, 캐시는 상상도 못했던 방식으로 복수를 완성한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지만 그렇지 않은 방법은 떠오르지 않아서 더욱 슬프다. 캐시는 정말 미친년일까. 제정신이 아닌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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