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팻처럼 다른 내가 되고 싶었다.
나이너스엔터테인먼트㈜
지난해 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번아웃을 겪으며 처음 정신과를 찾았다. 연말에는 심리 상담 센터에서 상담을 받았다. '나 아침에 밥 먹었어' 정도로 가볍게 생각해 보려 했지만 정신과도 심리 상담 센터도 입구까지 가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자기 마음 하나 제대로 못 다스리다니, 나약하고 유별나고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차라리 사고를 당하거나 몸 어딘가가 많이 아팠다면 더 나았을까, 말도 안 되는 가정을 해보기도 했다.
시작은 번아웃이었지만 상담을 하면서 나를 지독하게 사랑하지 못했던 나를 발견했다. 내가 되고 싶은 이상적인 나와 진짜 나는 달랐다. 강처럼 잔잔하고 유연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내 마음속에는 자주 풍랑이 일었다.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고 남과 나를 비교하고 인정을 갈구하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질투했다.
그러면서도 결코 밖으로 티 내지 않으려 했다. '그럴 수도 있지.' 세상 쿨한 척, 여유 있는 척, 괜찮은 척 애썼다. 타인과 주변 상황에 휘둘리는 건 미성숙하니까. 멋지지 않으니까. 자연스레 생겨나는 감정을 죄악시했다. 자책은 자기혐오로, 자기 연민으로 이어졌다. 자꾸만 내게 화살을 겨눴다.
감정보다 중요한 건 명분이었다. 마음이 아프고 힘들면 '왜' 아프고 힘든지, 과연 그럴 만한 상황인지 먼저 분석했다. 이런 태도는 6살 아이를 대할 때도 그대로 나타났다. 우는 아이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읽어주기보다는 울 만한 일인지 먼저 따졌다. "도대체 왜?" "그게 그럴 일이야?" "그 정도 울었으면 됐어." 아이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었다. 심리 상담사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다정하게 말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면 좋겠다고. 나를 소외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나도 팻처럼 다른 내가 되고 싶었다. 지금보다 괜찮은 나, 지금보다 훌륭한 나. 동시에 지금의 나를 미워하고 부끄러워하고 숨기고 싶었다. 사람들이 내게 여유롭고 단단해 보인다는 이야기를 할 때면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사람들이 나를 바라본다는 생각에 기쁘면서도 자괴감을 느꼈다. 진짜 나는 만신창이인데, 거짓말쟁이가 된 것 같았다. "그게 나고, 난 자신을 사랑해요"라는 티파니의 말을 듣는데 눈물이 났다. 나도 티파니처럼 말하고 싶었다. 분명 팻도 그랬을 것이다.
나를 구원해준 사람들

▲미친 여자와 미친 남자는 서로에게서 한줄기 빛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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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캐릭터들은 다들 조금씩 미쳐 있다. 은퇴 후 사설 스포츠 도박에 빠져 미신에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있는 팻의 아버지도, 아내에게 꽉 잡혀 살면서 생기는 스트레스를 차고에서 모든 걸 다 때려 부수면서 푸는 팻의 친구 로니도, 동생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데도 자기 잘난 이야기만 늘어놓는 팻의 형과 티파니의 언니도.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팻이나 티파니와는 다르다고, 나 정도면 괜찮다고 선을 긋는다.
티파니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유일한 사람이다. 나를 구원한 사람은 타인을 구원할 수 있다. 티파니는 여전히 불안하고 휘청대지만 기꺼이 팻에게 손을 내밀고, 팻은 조금씩 달라진다. 티파니를 찾아온 전 직장 동료에게 팻은 말한다. 티파니는 아프고 슬퍼서 방황했던 거라고. 똑똑하고 섬세한 여자니까 길거리 여자 취급 말라고. 티파니를 이해하면서 팻은 점점 자신의 현실도 직시한다.
두 사람은 팻에게 악몽 같았던 노래를 부른 스티비 원더의 다른 곡 'Don't You Worry 'Bout a Thing'에 맞춰서 춤 연습을 한다. 실버라이닝은 먹구름 사이 비치는 햇살을 뜻한다. 미친 여자와 미친 남자는 서로에게서 한줄기 빛을 찾는다.
Don't you worry 'bout a thing(걱정하지 마세요)
Don't you worry 'bout a thing, mama(걱정 말아요)
'Cause I'll be standing on the side when you check it, oh(당신이 찾을 때 내가 당신 옆에 있어줄 테니까요)
-스티비 원더 'Don't You Worry 'Bout a Thing'
영화를 보면서 아프고 힘들 때 나를 구원해준 사람들을 떠올렸다. "부인은 내 자부심"이라며 언제나 응원과 지지를 보내주는 남편, "세상에 너 자신보다 중요한 건 없다"고 "너무 열심히 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엄마 아빠, 감정도 잘 못 읽어주는 부족한 엄마를 위해 어린이집 벼룩 시장에서 예쁜 머리 핀을 사온 아이, "무엇이 되든, 무엇이 되지 않든 너는 그 자체로 멋있는 사람"이라고 진심으로 말해주는 친구와 동료들. 햇살은 늘 옆에서 반짝이고 있었는데 나는 어디서 대단한 빛을 찾고 있었던 걸까.
혼자서는 결코 빛날 수 없다는 것. 손에 닿지 않는 완벽을 추구하며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걸. 먹구름의 시간을 통과하며 뒤늦게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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