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몰카 편파수사' 규탄 여성시위홍익대 누드 크로키 수업 몰카 사건 피해자가 남성이어서 경찰이 이례적으로 강경한 수사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혜화역 2번 출구 인근에서 공정한 수사와 몰카 촬영과 유출, 유통에 대한 해결책 마련 등을 촉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2018.5.19
연합뉴스
약자성과의 결별
2018년 혜화역 시위에는 남성에게만 유리한 판결을 내리는 법정에 분개하는 여성들이 모였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불법촬영 범죄에 대해 더 강력한 처벌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시위에서 젠더퀴어(Genderqueer)는 배제되었다. 젠더퀴어가 여성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얘기가 따라붙었다.
그리고 우리는 역사 속에서 목소리를 내는 약자들은 언제나 위협적인 존재로 취급받아왔다는 사실을 발견해 왔다. 서프러제트(Suffragette, 20세기 초 영국에서 참정권 운동을 벌인 여성들을 지칭하는 말)의 테러가 그랬고, 탈코르셋을 한 페미니스트들이 그랬듯이, 노동법을 준수하라고 주문하는 노동자, 거리를 걸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외치는 장애인, 사회의 일부임을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성소수자는 모두 단순한 약자가 아니라 위협적인 약자였다.
약자를 약자이게 하는 조건은 무엇이고, 그 조건을 없애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가. 해답은 물론 한 가지가 아니다. 그리고 때로 어떤 사람들은 그 조건을 없애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기도 한다.
제도를 바꾸는 것과 개인의 삶을 바꾸는 것은 어느 것을 먼저라고 할 수 없는 문제기도 하다. 자신의 마이너리티성과 타협할 것인지, 그것을 극복할 것인지는 모두에게 주어져 있는 제각기의 투쟁이다.
강자의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약자성과는 선을 그어야 할 필요가 있다. 빈곤층의 암묵적 생활습관을 계속 공유하고 있다면, 중산층 친구를 사귀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유다.
성공한 흑인, 성공한 게이, 성공한 여성 개인을 많이 만든다면 약자이게 하는 조건을 극복할 수 있는 다른 조건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성공'이라는 내용에 근거해서 우리에게 더 필요한 조건이 무엇인지 일반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건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 수도 있다. 약자의 위치에 머무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종교적 구도지, 운동은 아닐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공한 여성을 만듦으로써 세상에 테러를 하고 싶은 전여옥의 운동도 운동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지지해준 이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보수정당으로 투신한 여성 정치인을 더 강력하게 지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렇게 많은 곳에 여성의 얼굴을 늘리고, 여성의 목소리를 박아넣는다면 '성공한 여성'으로 대표되는 이들이 더 늘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다면 그 운동에 포함될 이와 배제될 이는 누구일까. 더 많은 개인들을 성공하게 만들어서, 우리 모두의 인권을 길어올리겠다는 기획에서 누락되는 사람은 '성공'의 바운더리 바깥에 놓인 사람들일 것이다.
전여옥의 동지들, 벨 훅스의 동지들
1992년 조이 레너드는 '나는 레즈비언 대통령을 원한다'는 글을 썼다. 조이 레너드의 절절한 묘사 속에 등장하는 레즈비언 여성은 흑인이고, 치아가 망가졌고, 빈곤함과 학대를 경험한 상황 속에서, 바닥에 있는 삶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시스템의 폭력으로 상실했고,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동시에 싸워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다. 그녀는 세계적인 기준의 '성공'에서 지극히 멀리 있는 누군가가 우리의 대표자가 될 수는 없는지 묻는다.
그 글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그 경험을 가진 누군가가 대표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 그 사람들이 바닥에 놓여 있는 사람들과 끝까지 어깨를 걸고 있기로 마음 먹는다면, 대표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일까.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만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일까. 바닥에 있는 모두가 함께 한 걸음을 걷는 길을 택할 수는 없는 것일까. '효과적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배제당하는 이들은 그 자리에 놓아두고, 혼자서 여러 걸음을 걸어간다면 그 걸음으로 원래 가던 그 길을 걸어갈 수는 있는 것일까.
이른 나이에 암에 걸려서 세상을 떠난 친구가 있다. 그의 방에는 여러 번 '테러'를 당했던 그 여성 정치인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장루장애인으로 긴 시간을 살아냈던 그는, 그 여성 정치인이 자신의 약자성을 세계와 공존할 수 있는 것으로 위치지어 줄 동지라고 생각했었다. N번방 방지법을 '검열'이라고 말하고, 극빈한 사람들은 자유를 상상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과 함께 나란히 서 있는 그 여성 정치인의 얼굴을 보았을 때, 친구가 뭐라고 대답해 줄지 조금 궁금했다.
마침 며칠 전에는 벨 훅스라는 페미니스트가 죽었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을 얘기하던 그녀는 같은 계급 남성들과 동등한 특권을 얻고 싶어서 인종주의나 계급 엘리트주의가 강화되도록 방관했던 페미니스트들에게 분개를 토로했다. 기존 사회구조와 결탁한 대가로 얻은 '여성해방'이 진짜 여성해방인지 반문했다. 권력을 가지기 위해서 다른 여성들을 배반한다면, 그건 페미니즘에 대한 배반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 했다. 그녀의 싸움은 성공을 쟁취하는 테러리스트가 되어서 여성의 위치를 자리매김하자는 전여옥의 싸움과는 정반대에 놓여 있다.
물론 전여옥에게도 동지들이 많다. 페이스북 CEO인 셰릴 샌드버그도 더 많은 야망을 가지길 요청했고, 힐러리 클린턴도 그랬다. 90년대생인 그 여성 정치인은 전여옥과 셰릴 샌드버그, 힐러리 클린턴의 싸움에 함께 어깨를 걸었다. 누구에게건 동지를 얻는다는 것은 좋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벨 훅스의 편에서 어깨를 걸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일이다. 우리의 적이 누군지 명확하게 알게 된다는 것은 괴롭고 아프지만 동시에 투지를 불타오르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을 일으켜서 위협적인 한 걸음을 같이 걸으려는 전선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