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 차 사건을 그린 전형적인 석판화 (1846년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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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3년 11월 27일 차를 가득 실은 동인도회사 소유의 다트머스(Dartmouth), 일리너(Eleanor), 그리고 비버(Beaver) 호가 보스턴 항에 정박하였다. 새뮤얼 애덤스(Samuel Adams)를 비롯한 무역상들은 이 배에 올라 차 상자 모두를 바다에 던졌다.
영국 정부는 애덤스를 포함한 사건 주동자들을 대역죄로 기소함으로써 미국인들 사이에 영국 차에 대한 거부와 커피의 선택이 독립 정신의 상징이 되게 만들었다. 차를 마시는 일은 영국에 대한 호의를 상징하였고, 차를 파괴하는 것은 식민지의 혁명을 상징하였다. 차 대신 커피를 마시는 것이 애국적 의무로 여겨졌다. 우커스는 당시 미국인들의 심리 상태를 '차=영국=나쁨', '커피=미국=좋음'으로 묘사하였다.
물론 약간의 과장일 수는 있다. 왜냐하면 기대와는 달리 동인도회사는 1800년대 초반에도 독립된 미국에서 차 판매 사업을 재개했고 미국에서 차는 여전히 인기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이 커피를 선택한 것은 차에서 나는 '영국 냄새'를 싫어해서라기보다는, 커피가 노예 제도 덕분에 많이 싸졌고 많은 이윤을 남기는 상품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영국은 차 때문에 귀중한 식민지를 잃게 되었고, 미국은 차 문제로 시작된 저항으로 귀중한 독립을 얻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후 미국이 서쪽으로, 남쪽으로, 나아가 태평양을 건너 세계 최강의 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은 미국이 '커피의 나라'로 변신하는 과정이었고, 미국이 세계의 커피 문화와 커피 시장을 주도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커피 소비의 거인, 커피 생산의 거인
미국인, 그들 스스로는 대영제국의 정치적·경제적 노예 상태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미국인의 음료가 된 커피를 싸게 얻기 위해 검은 피부를 가진 노예들이 커피 농장에서 겪어야 했던 아픔과 슬픔은 외면하였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사람들을 잡아다 커피 농장에 노예로 팔았고, 여기에서 구입한 커피를 유럽과 미국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이곳 공장지대에서 생산한 면직물과 총기 등을 아프리카 노예 사냥꾼들에게 비싼 값에 팔았다. 이런 삼각 무역의 고리 중간에 미국이 있었다. 미국 혁명 직후인 19세기 초에 대서양 지역에서의 노예무역은 종식되었지만 노예제는 지속되었다.
많은 도시에 카페가 등장하였지만 확산 속도가 빠르지는 않았다. 보스턴, 뉴욕, 필라델피아 등 동부에서 시작하여 시카고, 노퍽, 세인트루이스, 뉴올리언스에도 카페가 생겼지만 많지는 않았다. 19세기 중반인 1843~1845년도 시카고 주소록에는 오직 2개의 커피하우스만 등록되어 있을 뿐이었다. 커피하우스의 등장은 프랑스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던 뉴올리언스에서 가장 활발하였지만 유럽의 대표적 도시들에 비하면 매우 조용한 편이었다.
이런 분위기에 반전이 마련되기 시작하였다. 결정적인 계기는 1830년 스페인-프랑스 전쟁 위기의 여파였다. 스페인 내정에 간섭해오던 프랑스가 스페인을 침략할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로 인한 커피 품귀 현상을 경험하였던 많은 유럽 국가들은 두 나라 사이의 전쟁에 대비하여 커피를 대량으로 매입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벌어지지 않았다. 많은 커피가 낮은 가격에 시장에 쏟아져 나왔고, 이것이 커피 소비를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에서는 1821년에 파운드 당 21센트였던 커피가 1830년에는 8센트로 떨어졌다. 이후 20년 동안 커피 가격은 파운드 당 10센트를 넘지 않는 안정세를 유지하였다. 1800년에 680그램 수준이었던 미국인 1인당 커피 소비량이 1850년에는 무려 2.3킬로그램으로 3배 이상 증가하였다.
▲브라질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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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대 초에 미국인들이 마시던 커피는 주로 프랑스령 생도맹그 수입품이었지만 노예혁명으로 생도맹그가 아이티로 독립한 이후에는 자메이카와 쿠바산 커피로 대체되었다. 쿠바가 1840년대에 연이은 자연재해로 인해 커피 산업을 포기하고 사탕수수 산업으로 전환한 이후에는 미국에서 소비되는 커피는 대부분 브라질로부터 들여오기 시작하였다. 커피 소비의 거인 미국과 커피 생산의 거인 브라질 사이의 애증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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