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믿을 수 없는 이야기>(Unbelievable)는 기존의 남성 중심 범죄 드라마와는 전혀 다른 문법으로 전개된다.
넷플릭스
넷플릭스 웹드라마 <믿을 수 없는 이야기>(Unbelievable)는 기존의 남성 중심 범죄 드라마와는 전혀 다른 문법으로 전개된다. 보통의 범죄 드라마가 범인을 찾는 과정에 집중한다면, 이 드라마는 두 여성 형사가 성범죄 피해자를 대하는 태도에 좀 더 초점을 맞춘다. 이는 단순히 강간 사건 1건 정도로 치부되어 비인격적 대우를 받아야 했던 마리의 이야기와 지독하게 대비된다.
그레이스와 캐런은 성범죄 피해자를 한 사람의 인격체로 대하며 마음을 살핀다. 이건 두 사람이 같은 여성이기에 가능한 일일까? 그레이스는 함께 일하는 남성 동료 태거트의 미온적 태도에 분노하며 캐런에게 말한다.
누구도 여성 대상 폭력 자료를 들여다보지 않아. 남자 강간율도 여자만큼 높으면 어떨까? 태거트가 밤에 장 보고 가다가 낯선 사람한테 후장 따일까 걱정해야 한다면? 저 사람 분노는 어디에 있어?
드라마에서 가장 숙연해지는 장면. 지금도 15년 전 처음 맡은 강간 사건 꿈을 꾼다는 그레이스에게 캐런은 말한다. 자신도 그렇다고. "디자 존스. 16살 생일을 하루 앞둔 애였죠(캐런)." "메리 팻 오언스. 32살. 세 아이의 엄마(그레이스)." 한때 뉴스에 잠시 회자되고 말았겠지만 두 사람의 삶에 깊이 새겨진 이름들. 단순히 피해자가 아닌 서사를 가진 인간이었던 여성들이다.
8회로 구성된 드라마에는 직접적인 성범죄 묘사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 피해는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범인은 잡히지 않고 공권력은 무력하다. 피해 여성들의 무너진 삶을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무거워 한 회 한 회 보는 게 괴로웠다. 그레이스와 캐런이 여성이기에, 여성이 겪어야 했던 피해에 더 민감하고 더 분노했을 수 있다. 하지만 피해자를 한 인간으로 존중하며 수사하는 것은 경찰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직업윤리이기도 하다. 그 당연한 윤리가 현실에서는 너무 쉽게 깨진다.
기혼 여성인 두 사람의 삶의 한 축에는 가족이 있다. 캐런은 집에 와서 일을 하면서도 자다 깬 아이를 돌보고, 그레이스는 남편과 식사를 하며 일 이야기를 나눈다. 이들은 직업인인 동시에 일상을 살아가는 생활인이기도 하다. 수사 도중 아이와 통화하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남성 동료에게 캐런은 말한다. 가족 돌보는 일로 사과하지 말라고. 그 말이 그렇게 든든하게 들릴 수 없었다.
드라마에는 일과 삶의 균형에 대한 고민이 녹아 있다. 그레이스는 아이를 재울 시간에도 퇴근하지 않는 캐런을 걱정한다.
일이 중요하다는 건 알아. 하지만 일을 인생의 최우선 순위에 놓으면 문제에 부닥치게 될 거야. 물론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 내려놓는 게 쉽지 않지. 하지만 그게 생존 기술이야. 그런다고 나쁜 경찰이 되진 않아.(그레이스)
캐런은 자신이 맡았던 가정 폭력 사건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신이 퇴근 후 동료들과 잠시 맥주를 마시고 있는 사이, 감옥에 들어갔다 보석으로 풀려난 가해자 남편이 아내의 다리뼈와 두개골을 깨뜨렸던 사건을. 캐런은 말한다. 삐끗할 기회는 수도 없이 많다고. 그래서 내 안의 희미한 목소리가 집에 가지 말라고 하면 거기에 집중하려 한다고.
누구보다 일에 진심인 그레이스는 캐런이 걱정됐을 것이다. 동시에 범인이 언제 또다시 범행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어느 정도 일상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캐런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아이들이 자신을 원망할까 걱정하는 캐런에게 그레이스는 자신의 엄마도 일하느라 바빴다고. 하지만 본인은 독립적으로 컸다고 말해준다. 그 말이 그렇게 든든하게 들릴 수 없었다. 동료인 두 사람은 서로를 신뢰하고 존중한다.
일의 윤리를 묻다
그레이스는 가장 주목받을 수 있는 체포의 순간을 기꺼이, 생색 내지 않고 캐런에게 넘긴다. 여성 후배에게 영광의 순간을 만들어주는 여성 선배. 나도 저런 여자 선배가 될 수 있을까.
체포의 순간은 전혀 극적이지 않다. 캐런은 특유의 무심하지만 단단한 얼굴로 용의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미란다 원칙을 고지한다. 그리고 용의자의 집에서 꼼꼼하게 증거를 수집한다. 흔한 회식도 없이 그레이스와 캐런은 각자 차를 타고 가정으로 돌아간다. 체포만으로 모든 게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걸, 축포를 터트리기에 너무 이르다는 걸 두 사람은 잘 알고 있다.
추가 증거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캐런과 그레이스는 용의자가 3년 전 마리의 나체를 촬영한 사진을 발견한다. 직업 윤리를 놓지 않은 두 사람의 충실하고 고집스러운 수사가 3년의 시간을 넘어 마리의 진실을 입증하는 장면이다.
세상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결국 나를 지켜야 하는 건 나 자신이라고 냉소하며 살아가던 마리.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두 형사가 마리의 삶을 구원한다. 마리는 "눈을 뜨면 이제는 좋은 일을 상상할 수 있다"고 말한다.
소설가 황정은은 에세이집 <일기>에서 이렇게 쓴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의 두 형사 그레이스와 캐런은 한번도 만나지 못한 마리의 삶을 본인들의 일로 돕는다. 누군가의 애쓰는 삶이 멀리 떨어진 누군가를 구한다. 그런 일은 종종 일어나며, 픽션 드라마에서나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황정은 <일기>
나의 "애쓰는 삶"은 누구를 구할 수 있을까.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윤리는 무엇일까. 무거운 질문이 꼬리를 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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