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0월 21일 모임을 가진 민주당 내 반노 그룹인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후단협)
이종호
3월 9일 제주에서 시작해 4월 27일 서울에서 끝난 '16부작 정치 드라마'에서 1등을 차지한 후보한테 '후보로 남고 싶거든 정몽준과 담판 짓고 그를 데려오라'는 황당한 요구까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일까지 겪은 노무현이 9월 들어 당내 신임을 회복하더니 국민통합21을 창당한 정몽준과의 후보 단일화에 성공하고 12월 대선까지 승리했으니, 2002년은 롤러코스터 같은 한 해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대반전을 예고하는 조짐들이 있었다. 정몽준이 여론조사에서 1위를 차지했다는 8월 8일 보도로부터 3주 뒤의 기사에서 그런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다.
9월 2일자 <한겨레> '민주당 신당 논의 찻잔 속 태풍?'은 "한때 민주당을 태풍의 한가운데로 몰아넣었던 신당 논의가 급격히 소멸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한 뒤 "노무현 후보 쪽은 자신들의 대선 전략과 일정을 구체적으로 짤 수 있게 됐다며 반기고 있다"고 설명했다. 8월 하순 들어 노무현에게 유리한 분위기가 조성됐음을 알려주는 기사다.
반전을 촉발시킨 그 같은 요인들 중 하나는 정몽준 쪽에 있었다. 8월 19일 그는 민주당 당발전특위 위원장인 박상천 최고위원과 전격 회동했다. 다음날 박상천 최고위원이 '신당 추진 원칙에 합의했다'고 밝히자, 정몽준은 '그런 합의를 한 일이 없다'며 공식 부인했다.
이 장면은 민주당을 격분케 만들었다. 추미애 최고위원 같은 이들은 '무슨 자격으로 정몽준을 만난 것이냐?'며 박상천 최고위원의 대표성을 문제 삼았다. 전반적으로는, 박상천보다 정몽준에게 분개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정몽준이 단칼에 합의를 부인하는 모습을 보면서 민주당 사람들이 불쾌감을 느꼈던 것이다.
8월 22일자 <국민일보> "'정몽준 환상 깨야' 반몽 정서 확산"은 "민주당의 21일 당무회의에서는 정몽준 의원에 대한 성토 발언이 쏟아져 나왔다"면서 "한 사람의 입만 쳐다보고 민주당 의원 131명이 춤을 추어서야 되겠느냐"는 발언도 있었다고 소개했다. 이렇게 돌변한 민주당 분위기는 정몽준이 민주당과 거리를 두도록 만들었고, 이는 노무현을 흔들던 세력을 멈칫하게 만드는 요인이 됐다.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통령 후보와 박근혜 한국미래연합 대표가 6일 낮 시내 한 음식점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2002.11.6
이종호
노무현이 대선후보 지위를 되찾도록 도와준 또 한명은 박근혜였다. '월드컵 특수'에 힘입어 유력 대선주자가 됐지만 조직력이 탄탄치 않았던 정몽준은 한나라당에서 이탈해 독자노선을 걷는 박근혜를 어떻게든 끌어들이고자 했다. 하지만 박근혜가 퇴짜를 놓았고, 이것이 정몽준의 가능성을 떨어트리는 결정타 중 하나가 됐다.
민주당 박상천을 곤란케 했던 정몽준은 이틀 뒤인 8월 22일 박근혜를 만났다. 이날 그는 2시간 동안 점심을 함께하면서 박근혜에게 적극적으로 매달린 것으로 알려졌다. 8월 23일자 <경향신문> '민주 회의론에 방향 선회'는 "정 의원은 박 대표와의 회동에서 '힘을 합치자'며 신당 창당을 처음으로 공식 제의했다"면서 "개혁 이미지가 강한 박 대표를 자신의 대선 행보에 동참시킴으로써 지지율을 계속 끌어올리기 위한 노력으로 풀이된다"고 해설했다.
박근혜의 거절로 인해 정몽준은 애매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민주당과도 손잡기 힘들고 박근혜와도 합치기 힘든 상황에 놓인 것이다. 조직력을 보강해줄 두 개의 우군이 등을 돌리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 상황은 노무현에게 재도약의 시간을 만들어줬고, 노무현은 이를 놓치지 않고 운명적인 대통령의 길로 뛰어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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