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한 야외 카페의 빈 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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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에 사는 사람들이나 빈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커피숍에서 조간신문을 보면서 아침 식사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풍경으로 자리를 잡았다. 당시 빈 사람들은 커피숍을 하루에 무려 세 번씩 드나들었다고 한다.
빈의 커피숍에서는 모차르트를 비롯하여 베토벤, 브람스, 슈베르트 등 커피를 좋아하였던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의 많은 음악가들과 문인들의 이야기가 여전히 남아 있다. 1788년 개업 당시 모차르트가 기념 연주를 하였고 이후 베토벤도 피아노를 연주하며 커피를 마셨다는 프라우엔후버(Café Frauenhuber), 빈 시민들이 사랑했던 시인 피터 알텐베르크(Peter Altenberg)가 자신의 편지 발신인 주소를 이 카페로 해서 유명해진 센트랄(Café Central), 정신분석학의 아버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단골 카페 란트만(Café Landtmann)이 대표적이다.
예술도시 빈과 히틀러
카페의 나라 오스트리아에서는 19세기 후반인 1889년 4월 20일 역사적인 인물이 태어난다. 바로 아돌프 히틀러다. 오스트리아 북부에 있는 국경과 접한 마을인 브라우나우 암 인(Braunau am Inn)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초등학교 입학초부터 아버지의 엄격한 훈육 탓에 학교와 공부를 기피하면서 아버지와 갈등했다. 공무원이 되기를 희망하는 아버지와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던 히틀러는 늘 갈등을 빚었다. 수천 년 반복되는 교육에서의 부모와 자식의 갈등에서 히틀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가 히틀러의 희망을 존중했다면 세계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고, 히틀러라는 이름은 훗날 정치사가 아니라 미술사 책에서 만났을 수도 있었으니 참 아쉬운 일이다.
히틀러는 11살 무렵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린츠로 이사하여 기술학교에 입학하였지만 역시 적응하지 못했다. 결국 1903년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와 함께 빈으로 이주하였다.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빈으로 이주했지만 이주하던 해 말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히틀러는 이후 뮌헨으로 떠난 1913년 5월까지 5년 이상의 청소년 시절을 빈에서 살았다.
어린 히틀러는 생계형 예술가 지망생이었다. 그곳에서 생계를 위해서 홈리스 생활을 하기도 하고 노동을 하기도 하며 그림을 그리는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히틀러가 당시 빈에서 화가를 꿈꾸며 드나들었던 곳이 바로 도처에 세워진 카페였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그린 그림엽서를 팔아 하루 하루 삶을 이어가고, 자신의 꿈인 화가의 길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빈 국립미술아카데미 입시에서 두 번이나 실패하고 만다. 그의 입학을 거절한 이 아카데미의 학장은 유대인이었다.
▲아돌프 히틀러
위키피디아 공동자료 저장소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그는 군대에 입대했다. 전쟁 중에 두 번(1916년과 1918년) 부상을 입었고 여러 개의 메달을 받았다. 이후 그는 빈을 떠나 뮌헨으로 이주한 후 반유대주의 정당인 독일노동당(나치당)에 가입하여 정치인으로 변신함으로써 인류 역사에 큰 아픔을 남겼다. 그가 그림으로 성공했거나, 빈의 커피숍 문화에 빠졌다면 인류 역사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2011년에는 빈 커피하우스 문화(Wiener Kaffeehauskultur)가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오스트리아의 빈은 프랑스의 파리와 함께 19세기 유럽 커피 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도시, 클림트와 에곤 실레를 탄생시킨 미술의 중심지였지만 가난하고 어린 히틀러와 같은 생계형 예술가 지망생을 품을 정도로 따듯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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